10만 대군 양병설
개요
선구안을 가진 조선의 선비 율곡 이이가 주장한 10만 대군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지금 조선은 200년이상동안 아무런 전쟁없이 평화롭게 있어 국방이 물러 터져있다. 남쪽에서 왜구들이 자꾸 백성들을 괴롭히고 일본의 동향을 보아 곧 대규모로 쳐들어 올꺼 같으니 국방을 정비하고 10만이상의 군을 만들어야 한다.' 라는 주장이었다.
물론 헬조센 선비들 답게 이 주장은 말도안되는 개소리로 치부되었고 1년뒤 귀신같이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이 일어나 모든 나라가 다 갈아 엎어질 정도였다.
이로부터 약 500년뒤 디시인사이드를 설립하여 PC통신 시절부터 대한민국의 IT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진 김윾식 머튽이 10만 폐인 양병설을 주장하였다.
반박
10만 양병설이라 함은 한양에 2만명, 각 도에 1만명씩 총합 10만명의 병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게 얼마나 큰 무리수인지를 알아야 한다. 지금 대한민국이 5천만명의 인구를 가졌으니 저게 작아보이지만 당시에는 엄청 큰 인구인 셈<ref>삼국지 시대의 후한 역시 인구가 2~3천만명에 불과했고 사마염이 천하통일을 할 때는 1천만명으로 급감했다. 또한 중국의 인구가 1억명을 넘어가기 시작한 것 역시 청나라 이후이다. 게다가 당대에는 10만명 이상의 병력을 보유한 세력이 위나라 이후의 조조 맹덕(50만명), 오나라 이후의 손권 중모(22만명), 촉나라 이후의 유비 현덕(10만명), 유표 경승(12만명) 딱 이렇게 4명에 불과했고 원소 본초나 동탁 중영도 그런 큰 병력을 갖진 못했다.</ref>이다.
10만 양병설을 도입하기 위한 비용은 실로 엄청나며 게다가 조선에서 그정도의 비율은 경제가 휘청일 정도로 무시못할 인구수이다. 그 엄청난 유지비는 뭘로 충당할 것이며 방대한 부대규모 역시 관리하기 매우 어렵다.
때문에 10만 양병설은 이율곡 이외의 모든 이들이 전부 반대했고 특히 류성룡이 10만양병설을 반대하면서 내놓은 대안이 이순신을 천거한 것이었다. 실제로 그 광활한 면적을 자랑했던 삼국지의 오나라도 병력은 22만명에 불과했으며 수나라는 살수대첩때 30만명 잃었다고 나라가 멸망해버렸다. 그 대국인 수나라가 말이다.
이율곡의 변호와 반박
물론 병농일체 체제의 둔전병제를 활용해서 10만 양병을 할 수 있다고 이율곡의 입장을 변호할 수는 있다. 그런즉 군사훈련과 농사를 병행하자는 것인데 삼국지에 등장하는 둔전병제를 조선에 적용시키는 것도 문제다.
둔전제는 중국에서 만들어진 병역제도로 중국은 땅이 워낙에 넓어빠져서 그걸 이용해서 병력에게 땅을 주고 거기서 농사지은 수확물을 급여로 땜빵한 뒤 땅을 준 값으로 군복무를 시키는 것을 병호(兵戶)라 한다. 하지만 한반도는 중국만큼 땅이 넓지도 않은 주제에 그나마도 무시못할 비율의 면적이 산이다. 10만명 어치의 땅은 무슨 수로 구할 것인가? 이것부터가 문제다.
둔전을 하지 않는다면 병력의 급여지급문제는 더 골치아파진다. 뭘 생산해서 뭘 줄 것인가?
게다가 중국의 둔전병제는 모든 국민을 다 이렇게 한 것이 아니라 당대의 중국은 백성을 민호(民戶)와 병호(兵戶)로 나눠서 병호에게만 이렇게 하고 민호가 경제활동에 종사했다. 하지만 10만 양병설을 이런식으로 적용해봤자 조선에는 죄다 병호밖에 안남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뿐이다. 그러면 군량미는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 적어도 중국 삼국시대에는 군량을 민호에서 조달하고 병호는 징발밖에 안했다. 그런데 10만 양병설 대로라면 백성들에게는 민호와 병호의 단점만 결합한 꼴이 되고 만다.
결론
10만 양병설이 아니라 5만 양병설로 서울에 1만, 각 도에 5천명으로 하자고 했으면 현실성 있는 대안이었을 것이다. 당시 조선의 경제력은 병력을 10만명이나 운영할 정도로 수준이 높지 않았다.
군대는 뽑는다고 다가 아니라 훈련수준, 군대의 전투의지, 그리고 부대 유지 비용이 뒷받침되어야 유지가 가능하다. 하지만 10만 양병설은 부대 유지에 대한 개념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함께 보기
참조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