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터 섬: Difference between revis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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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라파누이어 : Rapa Nui 스페인어 : Isla de Pascua 영어 : Easter Island
남태평양에 위치한 있는 조그마한 화산섬. 폴리네시아의 동쪽 끝. 현재 칠레 영토이다. 사실 칠레 본토랑도 3000km 정도 떨어져 있지만, 그나마 제일 가까운 나라가 칠레다. 가는 방법도 화물선(!)을 얻어타고 가지 않는 이상 칠레의 산티아고나 타히티, 페루의 리마에서 비행기 타고 가는 방법밖에 없다.
원래 이름은 라파누이어로 라파누이(Rapa Nui)다. 원주민 말로 큰 땅이라는 뜻. '테피토오테헤누아(Te pito o te henua , 세계의 배꼽)'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이 곳을 발견한 네덜란드인 탐험가 야코프 로헤베인(Jacob Roggeveen)이 이 섬을 발견했을 때가 마침 부활절(Pasen, Easter day)이라서 이름이 이스터 섬(Paasch-Eyland, Easter Island)이 되었다.
[모아이]는 이 섬을 널리 알린 일등공신이다.
개요
실제 면적은 163.6 ㎢로 충청남도 태안군 안면도(113.5 ㎢)보다 약간 큰 정도이며 인구는 2012년 통계에 따르면 약 5,700명. 신비의 거석상 "모아이"로 유명하다. 유럽인들이 부활절에 발견하였으므로 영어 이스터(Easter)로 더 알려졌으며, 현재는 칠레 영토이므로 역시 부활절을 의미하는 스페인어 파스쿠아(Pascua)라고도 표기된다.
특산물도 없고, 숲도 없는 황무지에 가까운 섬이지만, 한 가지 특이한 것들이 있다. 섬들 곳곳에 몇미터가 넘는 석상, 모아이가 있다는 것이다. 당시 이 섬의 풍부한 식생을 바탕으로 하여 채석장에서 통나무를 굴려 석상을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또한 그 기원은 폴리네시아로 추정된다.
노르웨이의 탐험가 토르 헤이에르달은 이스터섬의 문명이 남아메리카에서 전해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학계에서는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참고로 이 양반은 이 학설의 가능성을 실증하기 위해 발사 뗏목 콘 티키호를 제작하여 직접 남미에서부터 남태평양을 횡단하는 탐험을 성공시켰다. 비록 그의 주장은 헛점이 많았지만, 대단한 열정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그의 탐험은 남아메리카에서 이스터 섬으로 가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인 훔볼트 해류를 예인선으로 배를 끌어서(...)통과했다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으며, 예인선 없이 이루어진 비슷한 시도는 모두 실패했다. 따라서 고대 남미인도 예인선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입증하기 전까지는 그의 탐험은 사실 학술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 이스터 섬의 문화나 주민들의 DNA 분석결과, 동식물의 분포 등 모든 점에서 이스터 섬은 남아메리카가 아니라 폴리네시아와 강한 연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역사
남태평양 한 가운데 있는 이 섬은 오랫동안 변변히 큰 포유류도 없고, 지나가던 새와 나무 밖에 없었다. 이 섬에 인간이 도착한 것은 폴리네시아 사람들이 태평양의 여러 섬으로 진출한 대항해시대의 결과였다.
구전 전승과 고고학적 연구 결과, 얼마 안되는 서양인들의 탐험 기록에 의하면 이 섬의 역사는 고립된 곳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찬란한 문명의 성취, 그리고 수백년에 걸친 몰락과 붕괴 역사였다.
이스터 섬은 자연을 고려하지 않은 발전이 어떻게 한 사회를 붕괴시키는가[* 문명학자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명저 '문명의 붕괴(Collapse)'에 이스터 섬의 사회 붕괴에 대한 상세한 고찰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어있다.]를 잘 보여주는 무시무시한 예이다.
인류의 도착과 발전
원주민들의 정착 초기에는 풍부한 식생 숲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고래잡이, 새 잡이, 열매, 그리고 제한적 농업까지 이루어지는 섬이었고, 엄청나게 발전했다. 대략적인 계산으로는 정착 전만 해도 1억 그루의 야자나무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스터 섬 문명의 그림자
{{{#!html <object width="560" height="315"><param name="movie" value="//www.youtube.com/v/YkTRSfGhkn0?hl=ko_KR&version=3&rel=0"></param><param name="allowFullScreen" value="true"></param><param name="allowscriptaccess" value="always"></param><embed src="//www.youtube.com/v/YkTRSfGhkn0?hl=ko_KR&version=3&rel=0"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width="560" height="315" allowscriptaccess="always" allowfullscreen="true"></embed></object> }}} ~~원주민 문화가 안 남아서인지 원주민 분위기 낸다고 넣은 음악이 엘더스크롤 4: 오블리비언의 비전투 상황 도시/건물내부 테마곡이다~~
하지만 이후 가속화된 경쟁적 석상 쌓기, 즉 모아이 건설로 인하여 파멸이 시작된다. 섬의 부족들은 종교적/주술적 의미로 이 모아이 상을 세웠으며, 처음에는 작게 만들어졌지만 점점 더 커다란 모아이가 만들어졌다. 큰 모아이를 만드는 것으로, 섬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힘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요즘으로 보자면 모아이는 이렇게 큰 모아이를 만든 것이 자랑.moai 같은 용도로 쓰였던 것이다. 마치 현대 국가들이 거대한 랜드마크를 만드는것 처럼.
석상이 만들어진 곳은 섬의 중심부에 있는 채석장이며, 나무를 이용해서 해안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만드는 것은 둘째 치고라도, 이 석상들을 해안까지 옮기려면 대량의 나무가 필요하다. 당연히 섬의 나무는 빠른 속도로 소모되기 시작했다. 물론 모아이만 만드느라 이렇게 된 것은 아니다. 늘어나는 인구를 부양하려면 식량을 생산할 밭을 만들어야 했고, 밭을 만들려면 나무를 베어내고 개간을 해야 했다. 또 해산물을 얻으려면 카누를 만들여야 했는데 카누를 만들려면 또 나무를 베어내야 했다. 하지만 실용적인 목적이 없는 모아이 만들기에도 엄청나게 많은 나무가 쓰였던 것은 확실하다.
나무가 사라지면서 섬 전체가 사막화되기 시작하여 들여왔던 가축도 닭만 남기고 다 사라졌으며, 농사마저도 짓기 힘들게 되었다. 그래서 돌뿌리 농법이라는 대체수단을 쓰기시작하는데, 석상을 만들다가 나온 돌멩이나 바위를 깨서 만든 돌멩이를 그나마 상태가 나은 땅 위에 올려놓고 그늘을 만들어 거기에서 토란 비슷한 뿌리식물을 키운 다음 어느 정도 자라면 그 돌멩이들이 뿌리식물을 지탱해서 척박한 땅 위에 서 있게 해주는 농법이다. 하나하나 식물에 맞춰서 돌멩이를 움직여 줘야 했으므로 엄청난 노가다가 필요했던 농법. 모아이 하나 만드는 데 필요한 바위로 수만 평의 농지에 필요한 돌을 만들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나무와 돌 등의 자원이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주민들은 더욱 큰 석상을 지으려 했다. 그것도 자원이 인구를 지탱하기에도 벅찰 정도로 떨어진 그 순간에 급속도로 큰 공사가 많이 단행되었다. 자멸에 박차를 가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일부 학계에서는 이 사실은 근거로 모아이가 이스터 섬 주민들이 그들의 신의 모습을 본따 만든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원이 떨어져갈수록 신의 모습을 본딴 석상을 만들고 자원이 생기길 기도했을 것이라고. 하지만 결과는...] 다만 종교적인 목적만으로 모아이를 세운 건 아니었다. 자원이 한정되다 보니 서로 세력을 만들고 전쟁에 이겨 자원을 차지하려는 쟁탈전이 치열해지게 되는데, 쟁탈전에서 이기려면 머릿수가 많아야 하고, 사람을 모으려면 힘을 과시해야 하므로 더 큰 석상을 만들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더 큰 석상을 만드는 일은 자원의 고갈 속도를 더욱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이런 악순환 끝에 섬의 나무는 모두 베어졌다.[* 이를 다룬 다큐멘터리에서는 "섬에서 마지막 나무를 벤 사람은 자신이 섬의 마지막 나무를 벤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라고 말한다. 흠좀무.] 마지막 나무가 베어지는 순간까지 섬의 중심에서는 모아이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완성되지 못한 모아이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섬에서 나무가 모두 사라지자 카누를 만들 수도 없었다. 카누도 없으니 이스터 섬은 배 한 척 없는, 문자 그대로 '섬'이 되어 버렸고 당연히 수상 자원을 구할 수도 없게 되었다. 중요한 자원인 나무가 없어지자 섬의 생활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매우 짧은 기간 동안은 위태로운 평화기가 지속된 듯 보이나, 자신들이 중요하다고 믿어온, 모아이를 만드는 행위가 사실은 섬의 자원을 무의미하게 소모시키는 행위였다는 것을 깨달은 주민들 사이에서는 큰 전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 과정에서 모아이의 눈이 파괴되고 모아이를 쓰러뜨리는 행위가 벌어졌다. 대부분의 모아이는 이 때 쓰러지고 파괴되었는데, 지금 섬에 세워져 있는 모아이는 대부분 다시 세운 것이다.
정리하자면, 이스터 섬에 인간 상륙 → 섬의 자원을 이용하며 인구 증가 → 인구 포화상태, 자원이 고갈되기 시작 → 남은 자원을 사이에 둔 분쟁이 커짐 → 분쟁에서 이기기 위해선 사람을 끌어모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힘을 과시할 필요성이 증가 → 모아이가 더욱 대형화 됨. 그로 인해 자원의 고갈 속도 가속화 → 식생의 황폐화 → 황무지화 → 바다새의 멸종, 선박용 목재의 부족으로 인하여 주요 식량자원인 고래사냥이 불가능 → 토지의 척박화로 인한 대규모 식량부족 → 정치체제 붕괴, 식인 풍습 시작으로 이어지는 다이나믹 막장 롤러코스터를 보여준다. 인구 증가가 정점에 다다른 시점부터 사회시스템의 완전 붕괴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200년.
이스터 섬이 동남아시아처럼 열대우림이 우거지는 곳이 아니며, 의외로 나무가 빨리 자라지 않는 기후인데다가 토양이 침식에 취약하다는 점도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파멸
결국 섬의 주민들은 전쟁과 식량자원의 부족으로 인한 굶주림으로 대다수가 사망했다. 섬은 문명 수준이 최전성기의 300~400년 이전으로 떨어지고 나서야 유럽인들에 의하여 발견된다. 당시의 인구는 전성기의 20분의 1밖에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모아이 석상과 이스터 섬을 연구한 학자는 이 섬의 역사를 연구하면 할수록 모아이 석상을 증오하게 된다라는 말까지 했다. 이 때를 기점으로 식량이 떨어져 식인 문화까지 생겼으니, 가루를 내 버리고 싶을 정도로 증오할 만도 할 것이다. 이스터 섬의 언어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이스터 섬의 언어에는 인육에 관련된 관용어구[* 아침에 먹은 네 엄마의 살이 이빨에 끼어있다라는 식의 표현.]가 많이 남아있을 정도로 인육이 일반적이었으며 그만큼 이 섬은 피폐해져 있었다.
지구의 미래 모델형으로 여겨진다. 즉 자원낭비를 한 'wiki: "지구" 닫힌 계'가 어떻게 무너지는가에 대한 중요한 증거.
하지만 새로운 연구결과에 의하면 이것이 이스터 섬의 멸망의 원인은 될 수 없었다고 하며 1722년에 네덜란드 사람이 이스터 섬에 도착했을 때 이미 이스터 섬의 인구가 3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재안정화
그러나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후기는 막장이라고 볼 수 없다.
후기에 자원이 떨어져서 절망적인 상황이었던 것은 맞으나 섬에 살던 세 부족이 그렇게 멍청한 인간들은 아니었다. 모아이 건설의 중지로 더 이상의 황폐화는 막았지만 기근, 식인, 전쟁의 반복으로 섬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초토화가 되어있었다.[* 야자수가 전멸해 버려서 토양 침식이 심해짐은 물론이거니와 식수를 구하기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1640년경에 사회시스템이 완전히 붕괴되어 복구될 가능성도 없어졌다.
모아이 숭배와 신앙은 사라졌고, 후기의 이스터 섬에서 나타난 새로운 신앙은 조인(鳥人) 마케마케였다. 부족들은 당장 먹을 게 없는데도 쌈박질이나 하는 멍청한 행각은 그만두고 버드맨 의식[* 거창한 의식은 아니고, 험한 바다를 헤엄쳐 건넌 뒤 바위섬에 있는 새 둥지에서 알을 가져오는 것. 가장 먼저 가져온 사람이 속한 부족이 주도 부족이 된다.]이란 평화로운 방식으로 섬을 주도하는 부족을 1년마다 뽑고 자원을 분배했다. 물론 자원이 극단적으로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이들도 자신들의 미래를 점치기는 힘들었다. 이들은 식량부족으로 사탕수수 즙을 먹었는데, 그것 때문에 20세가 될 때까지 치아가 남아 있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지만 최소 어느 정도의 희망은 있었다. 이 조그만 희망마저 철저히 깨부숴버린 건 바로 남아메리카에서 찾아온 페루인의 도래다.
외지인의 도래와 대멸망
당시 페루인들은 그나마 삶을 영위하고 있던 이들을 학살하고 노예로 데려갔으며 당연하게도 노예로 끌려간 사람 중 살아돌아온 사람은 얼마 없었다. 게다가 유럽인이 정기적으로 상륙하면서 섬에 없던 전염병이 들어섰다. 남아메리카 노예상들의 침공과 전염병의 유행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대부분이 유럽인들을 따라 섬을 탈출했고 이 결과 19세기 말 인구수는 100명 정도로 줄었다.
칠레령이 된 이후
1888년 칠레가 이스터 섬을 차지했다. 1953년까지 이스터 섬은 항가로아 마을을 제외한 모든 지역이 칠레 회사의 목장이었고, 1966년까지는 칠레군이 이스터 섬을 관리했다. 1966년 이스터 섬 주민에게 칠레 시민권이 주어졌으며 2007년 이스터 섬은 "특별 지역"이 되었다.
칠레 정부와의 갈등
이스터 섬의 원주민들이 국제사회에 독립을 요구하고있다. 주된 이유는 이민온 칠레 이주민들과 이스터 섬 원주민들의 경제적 격차. 칠레정부는 공식적으로 10년동안 이스터섬으로 이민온 사람들이 2300명 (칠레 사람이 아닌 외국인 노동자)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원주민들은 그 2배인 4000명에 이른다고 주장하고있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섬의 자연환경이 캐막장인지라 주로 관광업과 어업, 농업(그나마도 관광온 관광객들한테 판다.)로 먹고사는데 이스터섬의 모아이가 유명해지면서 그 유명세로 관광업이 크게 흥하자 칠레사람들이 이스터 섬으로 와서 사업을 벌였다. 칠레 사람들은 자본을 이용해 큰 가게를 차리고 자릿세 1만 페소(한화 26만원 가량)를 정부에 내고 장사를 하는데 아이러니한점은 칠레 사람들이 세운 가게에서 파는 농산물은 이스터 섬에서 기른것이 아닌 수입한것이며 이곳의 그 유명한 모아이 상도 칠레 사람들이 만들어서 판다.
원주민들은 정부에 자릿세를 내지 못해 칠레사람들의 가게옆에서 노점상으로 자기가 키운 농산물을 팔고, 자신들이 직접 만든 모아이 석상과 전통 장식품을 팔지만 칠레사람들의 가게에 밀려서 잘 팔리지도 않고 모아이상도 안팔려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법대 나온 원주민도 이스터섬에 남으면 허드렛일을 하는 등 취업 상황이 좋지 못하다. 고학력을 요구하는 일자리는 칠레 사람들이 차지하기 때문이다. 칠레 사람들이 운영하는 운송회사나 가게의 경우엔 관광객들을 상대로 지난 몇년간 몇배에 달하는 성장률을 기록한것에 비해 원주민들은 더 가난해져 가는 것.
이렇게 되자 원주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2009년과 2010년에는 원주민들이 칠레 정부에게서 독립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칠레 경찰이 이스터섬에 파견되어 공기총을 이용한 무력진압을 했지만, 공기총에 맞은 원주민들이 피를 흘리고 부상을 입는 경우까지 발생해 오히려 원주민들의 불만은 늘어났다.
현재 원주민들은 국제사회에 칠레정부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활동중이며 칠레정부는 이들을 달래기 위해서 원주민 보호구역을 늘리고 배수시설을 점검하는 등 불만을 잠재우려고 칠레 원주민들에게 온갖 약속을 해주고 있으나 원주민들은 항상 정부는 말만 그랬다면서 이젠 더이상 안믿는 눈치다.
2010년 히토랑이 씨족이 피노체트 정권 때 빼앗긴 땅에 지어진 호텔을 점거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칠레 경찰은 공기총을 사용하면서까지 이들을 진압했고, 25명이 부상당했다. 6개월간의 점거 끝에 칠레 경찰은 점거자들을 끌어내 체포했다.
참고로 칠레 항목에는 칠레 정부가 천하의 개쌍놈이라고 써 있는데 그 근거가 바로 이 '칠레 정부와의 갈등'항목이다.
그 외
쥐 때문에 멸망했다는 새로운 학설이 나왔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기사에는 잘못된 원문링크가 걸려있다. #]
참고로 "원래 섬에는 지배층인 장이족(남아메리카에서 왔다고 함)과 피지배층인 단이족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단이족이 반란을 일으켜서 장이족을 모두 죽였다. 모아이는 장이족이 세운 것이다. 장이족 멸망 후 이스터섬의 문명 수준은 급격히 떨어졌다."라는 이야기가 상당히 퍼져있지만, 이것 역시 헤이에르달 등이 퍼뜨린 근거 없는 이야기다. 고고학적으로 봐도 섬에 남아메리카에서 기원한 집단이 따로 있었다고 볼 근거가 없으며, 대학살이 벌어진 흔적도 없고, 원주민들의 DNA에서도 남아메리카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이스터섬의 주민들이 모두 모아이와 관계없는 피지배층이었다고 볼 이유가 전혀 없다. 다만 이 설을 바탕으로 한 창작물은 나와있다. 영화 '라파누이(1994)'에서는 이러한 설을 바탕으로 하여 장이족 청년과 단이족 처녀의 사랑과 도피, 전쟁을 다루고 있다. 구하기 어렵지만 한번 보는 것도 괜찮을 듯. ~~영풍문고에서 3천원에 dvd도 팔고 있던데 구하기 어려운가?~~
롱고롱고 문자
https://1.bp.blogspot.com/-aplYaVuJAIU/TyXrsfDF9GI/AAAAAAAADqI/qVaTbAmzHoE/s1600/rongorongo1.jpg?width=400 이스터 섬에서 발견된 것 중 '롱고롱고(Rongorongo) 목판'이라는 것이 있다. 원주민들의 말로 '말하는 나무'라는 뜻의 롱고롱고 목판에는 지금까지 다른 지역에서는 한번도 발견되지 않은 특이한 문자가 씌여져 있었으며, 목판의 이름을 따서 이 문자를 롱고롱고 문자라고 부른다. 롱고롱고 문자는 이 세상 어떤 문자와도 상관관계가 없는 문자이며, 아직까지 해독되지 않았다. 일설에 따르면 인더스 문명의 문자과 유사하다고 하지만 연관이 있을 가능성은 매우 낮으며, 대부분의 학자들은 유럽인들과의 접촉 이후 유럽인이 문자를 쓰는 것을 보고 이를 모방했을 것이라고 본다.
실제로 롱고롱고 문자가 적힌 나무판 중에서 유럽인들과의 접촉 이전에 문자가 적힌 것으로 보이는 사례가 전혀 없다. 주의할 점은 그것이 그 이전 시대의 목판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롱고롱고 문자가 기록된 목판의 상당수는 그 이전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문제는 오래된 목판들이 흔히 그렇듯이 가장자리가 파손된 경우가 많은데, 롱고롱고 문자는 그 파손된 선을 따라서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즉 오래된 목판은 많이 있지만, 롱고롱고 문자는 나중에 그 목판이 손상된 이후에 목판을 재활용해서[* 이스터 섬은 나무가 극단적으로 부족해졌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새겨진 사례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다만 이에 대한 반론도 있으므로 확실한 것은 아니다. 참고로 이스터 섬에는 이 섬에 최초로 도래했던 집단의 지도자가 '우리들의 롱고롱고 말은 잊혀지고 아무도 읽을 수 없게 될 것이다.'라는 예언을 남겼다는 구전이 있다. ~~정확도 100%~~
이후 토착어를 하는 이스터 섬 주민이 유럽인에 의해 전염된 천연두로 전멸하여, 19세기 중후반에 이스터 언어와 롱고롱고 문자를 사용하는 법 모두 소실되었다.[* 현재의 이스터 섬에서 쓰이는 라파누이어는 근대 들어 이스터 섬에서 서북쪽으로 2,500km쯤 떨어진 망가레바 섬에 노동자 등으로 건너갔다 돌아와 원래의 이스터 섬 언어에서 변형된 언어를 쓰던 이스터 섬 주민들의 언어에 기반했다는 추정이 있다. 물론 현대 이스터 섬 언어도 동부 폴리네시아어이며 18세기의 기록을 보면 옛 이스터 섬 언어도 같은 계통이라 생각된다.] 그렇다고 이스터 섬 주민이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거나 한 것은 아니었고, 몇몇 학자들은 롱고롱고 문자를 읽을 수 있는 원주민 노인들을 연구할 수 있었고, 그들이 읽은 내용은 주의깊게 기록되어 귀중한 연구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그런데 막상 이들이 롱고롱고 문자를 읽은 결과와 실제 문자를 연결시켜 보면 도무지 연결이 안 된다(...). ~~A라고 쓰고 B라고 읽는다?~~
이스터 섬은 다른 섬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한 차례 '운 좋게' 폴리네시아인들이 도착한 이후로 유럽인이 섬에 도착할 때까지 다른 폴리네시아 사회와의 지속적인 교류가 없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폴리네시아 인들은 카누를 이용한 뛰어난 항해술을 가지고 있어서 태평양의 섬들을 개척하고 서로 교역도 할 수 있었지만, 사방 수천킬로미터 내에 다른 섬이 하나도 없는[* 주변에 있는 자잘한 섬들은 제외] 이스터 섬에 도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타 관련 내용
워낙 신기한 곳이라서 서브컬쳐, 특히 오컬트 관련물에서는 빠짐없이 등장한다. 초고대문명설의 귀중한 떡밥이 되었다. 초고대문명설 떡밥에서는 이곳이 무 제국이나, 레무리아 대륙이 가라앉고 남은 잔해라고 설명한다.
서태지는 이 섬과 모아이에 영향을 받았는지 8집에서 모아이라는 곡을 만들었다.
최근 화구 쪽에 아주 작은 나무묘목이 발견돼서(정말 조그맣지만) 숲을 복원할 거라는 얘기가 들려오지만 섬이 워낙 척박해서 성공 가능성은 매우 낮은 모양.
* 참고항목 : 마케마케
이 섬의 멸망을 모티브로 한 영화로 라파누이가 있다. 사실 라파누이 자체가 이스터섬을 뜻하는 말
마타베리 국제공항
마타베리 국제공항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