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하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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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과 사건 내용

1896년 황해도 안악에 있는 해변가 지역인 치하포에 있는 주막에서 당시 20세 청년이었던 백범 김구(당시 이름 : 김창수)가 일본인 민간인 쓰치다 조스케(또는 쓰치다 조료, 土田譲亮)를 살해한 사건.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이듬해인 1896년 고종아관파천을 하게 되면서 조선왕조가 격랑의 시기를 보내고 있던 시절 발생하였다.

논란

치하포 사건의 특징은 백범일지와 후에 그를 체포하여 신문, 기록한 대한제국의 조서, 신문보도 등이 상당한 내용의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이하의 내용은 "올바르게 풀어쓴 백범일지" (배경식 역, 너머북스) 참조]

쓰치다의 신분과 살인의 동기

백범일지

'단발을 하고 한복을 입은 한명이 같이 앉은 나그네와 인사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성은 정이고 사는 곳은 장연이라 했다. 말투가 장연 말씨가 아닌 경성 말씨였는데도 시골 노인들은 그를 조선 사람으로 알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분명 왜놈이었다.'

'만약에 저자가 보통 장사치라면 조선인 행세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미우라 고로(명성황후 시해범)가 아닐까? 공범일 수도 있다. 공범이 아니라도 칼을 차고 다니는 왜놈은 우리 민족의 독버섯이다.'[* 미우라는 당시 벌써 일본으로 가 재판 받고 투옥되었다 석방되었다. 즉, 김구가 당시 중앙정세를 잘 몰랐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왜놈의 소지품을 뒤지게 하였다. 소지품을 조사해보니 왜놈의 이름은 쓰치다 조로이고, 직위는 육군 중위이고, 엽전이 800냥 있었다'

조서

'이튿날 밝은 새벽에 조반을 마치고 길을 떠나려 하였는데, 점막(店幕)의 법도가 나그네에게 밥상을 줄 때 노소(老少)를 분별하여 그 차례를 마땅히 지켜야 하는데도 손님 중에 단발을 하고 칼을 찬 수상한 사람이 밥상을 먼저 요구하자 여점원이 그 사람에게 먼저 밥상을 주므로 마음으로 심히 분개하였다. 그래서 그 사람의 근본을 알아본즉 일본인이므로 불공대천지수(不共戴天之讎)라고 생각이 되자 가슴의 피가 뛰었다. 그러한 때 그 일본인이 한눈을 팔고 있는 틈을 타서 발길로 차 거꾸러뜨리고 손으로 때려 죽여서 얼음이 언 강에 버렸다.'

백범일지 외에 쓰치다가 육군 중위라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그는 일본 기록에 약장수로 등록이 되어 있었다. 또 사건 10년 후 쓰치다의 유족은 대한제국으로부터 배상을 받았다.

사건과 그 이후

백범일지

'내 발에 밟혔던 왜놈이 새벽 달빛에 검광을 번쩍이면서 달려들었다. 나는 면상에 떨어지는 칼을 잽싸게 피하면서 발길로 왜놈의 옆구리를 걷어차서 거꾸러뜨리고는 칼을 잡은 손목을 힘껏 밟았다. 칼이 저만치 떨어져나갔다. 나는 그 칼을 집어들고, 왜놈을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마구 난도질을 쳤다. 피가 샘처럼 용솟음쳐 마당에 흘렀다. 나는 손으로 피를 움켜 마시고, 얼굴에다 처발랐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들고 '아까 이 왜놈을 위해 달려들려던 놈이 누구냐'라고 엄포를 놓자 결국 여러 사람들이 나를 장군님이라고 부르며 용서를 빌었다. 800냥은 사람들에게 나눠 주라고 했다.'

조서

3번의 공판에서 김구의 진술에 차이점이 있다. 1차 신문에서는 발로 차고 돌로 때렸다고, 2차에서는 처음은 돌로 때리고, 다시 나무로 때리자 그가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 도망가기에 강변까지 쫓아 따라가서 몽둥이로 거듭 구타하여 죽였다. 3차에서는 자신이 돌을 던져 쓰러뜨린 후 모든 투숙객이 분격하여 함께 찔러죽였다고 하였다.

'금액량은 잘 모르게, 동행인의 노자로 얼만가를 주고, 당나귀 한 마리를 엽전 일흔 다섯냥에 사서 타고 왔으므로 대략 전액은 엽전 백냥 가량으로 안다.'(김구) '그대가 이 사건을 일으킨 것은 재물을 탐하여 한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왜 재물을 탈취하였는가?'(신문) '동행한 세 사람이 고향으로 돌아갈 노자를 달라고 애걸하므로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돈을 줘서 보내고 난 뒤 나머지 돈 8백 냥은 점주에게 맡겼다.'(김구) '그래서 몹시 놀라 달려가 본즉 김창수가 일본인을 붙들고 마구 때리고 있기에 만류하려 하였으나 벌써 일본인을 죽여서 끌어다 강변에 버리고 환도 한 자루를 탈취하여서는 자기가 차고 당나귀 한 마리를 사서 타고 떠났읍니다'(주막 주인)

즉, 1000냥 가운데 200냥 정도를 쓰고 나머지를 점주에게 맡기고 떠났는데 일지에는 없는 부분이다.

그 외의 의문, 오류 등

* 백범일지에서 이 일화는 젊은 날의 이야기 치고는 상당한 분량을 차지한다.
* 그는 일관되게 국모의 복수를 주장하고 있다.
* 체포 후 수감시 동료 수감자에 대한 기억은 상당히 정확하다.
* 주막 주인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한밤중이어서 캄캄했는데도 일지에는 장황한 묘사가 가득하다.
* 통역을 데리고 다녔다는 쓰치다가 일지에서는 경성 말투를 쓰며 유창한 조선말을 한다.
* 주막 주인과 쓰치다에 대해 대화를 나눈 적도 없는 김구가 살인 후 갑자기 그에게 '너는 어떻게 저 자가 왜인인걸 알았느냐?'라고 묻는 뜬금없는 장면이 나온다.
* 일지에 따르면 주막집 주인은 김구가 풀어주라고 해서 풀어줬다고하지만 1896년 10월 2일 법부에서 인천감리서로 보낸 전보에 이화보는 무죄로 방면하라고 내려와서 풀어준 것이다.
* 일지에서는 사형 직전에 고종이 전화로 사면하여 살렸다고 나오나[* 이는 EBS 역사채널에서도 나온 바 있다.] 당시 인천-서울은 전화 개통이 안 되었다. 전집을 발간했던 손충무는 전보라고 정정했다.
* 신문 때 배석한 조선인 경무관의 이름도 잘못되어 있다.

종합적 검토

일제의 기록이 침략국의 기록이라는 점을 보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사료 검토는 교차검증이 기본인데, 백범일지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뒷받침하는 다른 증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또한 백범일지 내에서도 여러 오류가 발견된다.

배치되는 기록의 어느 한쪽의 신뢰성을 증거없이 단적으로 의심하는 단계에서 객관적인 판단은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관련 기록만을 종합해볼 때 쓰치다가 육군 중위였다는 김구의 주장은 신뢰성이 낮다.

김완섭은 2003년 '김구 선생은 민비의 원수를 갚기 위해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한 뒤 중국으로 도피한 조선 왕조의 충견(忠犬)”이라는 내용의 문건과 '김구가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했다'는 내용의 인쇄물을 배부하였다가 사자 명예훼손으로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이를 근거로 쓰치다가 일본군이었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는데, 김완섭의 주장 중 '허위사실'로 드러나 유죄를 인정 받은 부분은 김구가 중국으로 가게 되는 과정 부분이다.

재판부의 [[1]]에서 쓰치다의 신분에 대하여는 '쓰치다가 명성황후 시해에 연관 된 일본 군인인지, 무고한 상인인지에 대해 판단할 아무런 증거도 현출되지 않았기에 허위사실 판단이 무리이다'라고 쓰고 있다.

"김구 선생이 1896년 2월 황해도 치하포항에서 살해한 ‘쓰치다’는 당시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군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김구 선생이 쓰치다를 처단한 뒤 체포돼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가 1919년 중국으로 망명했는데도 도주한 것처럼 허위 사실을 적시했다” 라는 부분은 김완섭을 고소한 '검찰'의 주장이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재판부에서는 이에 대하여 '위장한 일본군' 부분은 허위사실 판단 무리[* 특히 검찰이 주장만 해놓고 재판에서는 아무 증거도 제시하지 않았다는 것을 판결문에서 알 수 있다.], '망명을 도주로 표현한 부분'은 허위사실을 인정한 셈이다.

사건 이후

상황이야 어쨌건 살인을 했으니 11월 법부에서는 김구에게 강도살인죄로 사형(교수형) 판결을 내렸으나, 집행을 보류하였다. 이는 우연히 승정원승지가 특이한 죄목명인 '국모보수'(國母報讐) 라는 단어를 우연히 발견했기 때문이라 한다.(승정원 기록에는 나오지않는다) 명성황후 시해로 인한 당시의 반일감정 때문인지 조선 법부는 고종 황제전화로 인천감옥장에게 내린 형집행 보류지시를 근거로 사형 집행 예정일 하루전날 형 집행을 보류시켰다고 [[2]]에서는 밝히고 있다.

중앙일보의 [[3]]에 따르면 고종은 전화가 아니라 전보로 인천감옥에 있는 김구의 사형 유보를 지시했다고 한다. 1894년 12월 1일부터 인천우편국에서 전보를 취급했고 전화는 1898년에 개통되었으며 인천까지 확장된 것은 1902년부터이기 때문이다. 판결에 대한 언질도 없이 옥중 생활을 하다가 11월 7일자 독립신문을 통해 자신이 교수형 판결을 받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사형에 대한 중압감으로 경황이 없던 김구가 잘못 들었거나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하였다.

킬구

||이 문단은 킬구로 검색해도 들어올 수 있다.|| https://i.imgur.com/MHgoGmx.png 이후 역사 갤러리에서 이 사건을 재조명하고 만화로까지 패러디하면서 김구를 '킬구'라 부르기 시작했다.다만 이 만화는 일부러 김구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 초점을 맞춰 쓰치다의 입장에서 기술한 약간의 감성팔이가 섞여있다. 이 만화는 역갤러에서 어그로를 잘 끌기로 유명했던 '황룡'[* 삼국지 갤러리에서는 악질 촉빠로 악명이 높은 인물이다.] 이라는 갤러가 원작자이니 일부러 일뽕 시늉을 낸 것으로 보인다. 김구에 대한 관심이 없던 역갤에 돌연 황룡의 만화가 업로드되면서 킬구의 전설이 시작됬다. 지금도 여러 역갤러가 패러디하고 올리고 있으며 역갤 이외의 커뮤니티에도 조금씩 퍼지고 있다.

이거랑 대조적으로 많은 한국 측 미디어에서는 쓰치다를 부정적으로 본다. 중견만화가 오세영의 김구 위인만화(월간 보물섬 연재)에서는 조선인으로 위장하던 걸 이상하게 여겨 덮치는데 쓰치다가 숨겨둔 칼을 꺼내 공격하는 걸 빼앗아 벤다. 이렇게 보통 쓰치다를 간첩으로 많이 보고 있다. 솔직히 조선인 흉내를 내고 있는 만큼, 간첩이라고 볼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왜 쓰치다가 조선인으로 위장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을미사변 직후 당시 기모노 입고 조선 한복판에서 주막에 들렀다는 것부터가 말도 안된다... 당시 일본인에 대한 조선인들의 일반적인 감정을 안다면 이런 짓한다는 건 자살행위에 가깝다. 그리고 백범일지에도 단발령에 대한 반발로 서울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인의 집을 부수고 일본 사람들을 때려죽였다는 기술이 되어있고 이런 사실들을 고려했을 때, 조선 복장을 했던 것은 조선에서 상업활동을 하기 위해 굳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밝혀 불이익을 당하기 원치 않았기 때문이라 추론해볼 수 있다.


밤섬해적단은 "백범살인일지"라는 노래로 이 사건을 까는 듯 안 까는 듯 굉장히 묘하게 다룬다. ~~일단 가사 후렴구(?)가 "김구 짱 김구 짱 김구 짱 이승만 병신"이니까 최소한 이승만 빠는 노래는 아니다~~

연구자의 문제

백범일지의 치하포 사건을 연구해서 세상에 알린 손충무씨의 문제도 있다.[* 물론 이 사건을 연구한 사람이 한 사람은 아니지만, 이 분의 자료와 연구도 흔히 백범 연구에 쓰이고 있으며, 1970년대 내내 가장 강력한 백범 연구가 중 하나였다.] 이 분은 백범 김구의 암살 사건을 다루던 기자였는데, 오랜 특파원 생활을 하면서 김구에 관한 자료를 수집했다고 한다. 이 분은 쓰치다 사건에 관한 자료를 신문사에 기증하기도 했다.[[4]] 그러나 이 분이 제시한 자료에도 쓰치다가 일본군 중위라는 기록은 없었다(...). 게다가 이 분은 1970년 당시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여 미국으로 망명을 했다거나,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여 미국으로 망명했다고 하지만 당시 취재차 일본과 미국, 대만 등지로 출국한 것일 뿐 실제로 망명을 한 기록은 없다(...). 이후 발간한 책들이나 기사들을 볼 때에도, 상당히 신빙성에 의심이 가는 인물로 평가된다. [[5]]

[각주] 분류:사건사고분류:조선(19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