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필용 사건
* 사건/사고 관련 정보, 흑역사가 된 것들/정치와 행정
개요
대한민국의 제4공화국 시절 발생한 사건이다. 1973년 4월 쿠데타 모의 혐의로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었던 윤필용과 wiki:"대한민국 육군" 육군 장교 13명이 연루된 사건이다.
전개
1973년 4월,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이 이전인 1972년 가을의 술자리에서 wiki:"중앙정보부"중앙정보부장 이후락에게 "박정희 대통령께서 노쇠했으므로[* 그런데 당시 박정희 나이는 50대 중반이었다. 정치판 기준으로는 노쇠는 고사하고 한창 나이, 아니 막 전성기가 시작될 연령대다.] 형님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라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윤필용과 그를 따르던 군간부들이 쿠데타 모의 혐의로 구속되어 처벌받았다. ~~[wiki:장성택 독재자는 2인자 따위 안 키운다]~~
윤필용이 해당 발언을 할 당시 배석했던 신범식[* 박정희 정권 때 청와대 대변인과 문화공보부 장관 등을 지냈다.] 서울신문 사장이 얼마 뒤 골프장에서 박 대통령과 식사를 하다 박 대통령이 "항간에 내 후계자 소문이 돈다던데 자넨 누군지 아나?"라면서 추궁하자 처음엔 대답하지 않았으나 박종규 대통령경호실장[* 이후락이 5.16 군사정변에 가담하지도 않았으면서 실세로 거들먹거리는 점을 평상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고 한다.]이 신 사장 머리에 총까지 겨누면서 이름을 대라고 협박(...)하자 결국 내용을 털어놓는다. 이에 대노한 박 대통령이 강창성 육군보안사령관에게 철저한 수사를 지시하였고, 결국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에서 재판이 열렸다.
결과
wiki:"국군기무사령부"육군보안사령부에서 윤필용과 관련자들을 철저히 조사하였으나 쿠데타 모의 혐의를 입증하지 못하자 업무상 횡령, 수뢰,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 군무이탈 등 8개의 죄목을 적용, 윤필용을 비롯하여 wiki:"수도방위사령부"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 손영길 준장, 육군본부 진급인사실 보좌관 김성배 준장 등 장성 3명과 육군본부 진급인사실 신재기 대령,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지성한(심은하의 시아버지이다) 대령 등 장교 10명에게 1~15년의 징역형을 선고하였다. 이때 윤필용은 징역 15년형에 벌금 및 추징금 약 2,600만 원을 선고받았다. 이뿐만 아니라 윤필용과 가까운 장교 30여 명이 군복을 벗었으며, 중앙정보부에서도 이후락과 가까운 울산 사단 30여 명이 구속되거나 쫓겨났다.
후임 수도경비사령관에는 정보사령관이었던 진종채 소장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후임 참모장에는 장태완 준장이 임명되었다.
민간인 중에서도 김연준 한양대학교 총장과 이원조 제일은행 차장도 연루되었다. 대우그룹의 전신 대우실업 김우중 사장도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또한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보안처 조사과장 백동림 중령의 보고에 의해 윤필용이 후원자 역할을 한 하나회의 실체가 밝혀지기도 하였다. 육군보안사령관 강창성은 군부에 사조직이 있다는 것에 분개하여 하나회를 뿌리뽑으려 하다가 오히려 박종규 대통령경호실장, 신임 수도경비사령관 진종채 소장, 서종철 안보특별보좌관 등의 견제를 받고 1973년 8월 3관구사령관으로 좌천되었다.
평가
당시 박정희 정권에서는 이후락(중앙정보부장), 박종규(경호실장), 윤필용(수도경비사령관), 강창성(보안사령관)이 서로 권력을 견제하는 양상을 보였는데, 이후락과 윤필용이 가까워지자 권력의 균형이 깨질 것을 우려한 박정희가 윤필용과 그 추종세력을 제거한 사건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 과정에서 박종규는 중앙정보부장으로 옮겨가고 싶어서 사건을 크게 키웠다는 설이 있다.
한홍구 교수는 한겨레 연재 칼럼에서, 이 사건이 10.26 사건과도 인과적 고리 안에 있으며, 또한 이 사건은 박정희 시대를 이해하는 데에서, 나아가 그 뒤를 이은 전두환 시대를 이해하는 데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