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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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한국 역사 속의 백정

白丁

역사적으로는 백정이라고 해서 전부 도살자인 것도 아니고 시대마다 그 뜻이 다르다.

본래 어원은 중국 수(隨)나라에서 온 말로 당시 뜻은 그냥 일반 백성을 말하였을 뿐이다. 국가에서 군인이나 향리 등의 직역을 부여한 집을 정호(丁戶)라 불렀고,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집을 백정호(白丁戶)라고 불렀다. 여기서 백은 하얗다는 의미가 아니라, '00이 아니다'라는 의미이다.

한국에서도 고려시대때에는 백정은 소작민(땅을 빌려 경작하는 농민)이 아닌 농민을 뜻하는 말이었다. 이 때에는 우리가 흔히 아는 백정은 양수척(楊水尺)이라 불렀다. 이 외에 수척(水尺), 화척(禾尺), 무자리 라고도 불렀다. 조선시대나 일제시대에는 도부, 또는 도한이라고도 불렀다. 이들 양수척은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사냥, 축산, 도축/고기판매업, 무두질/가죽제품 제작(전문 양수척이 조선시대엔 갖바치로 불림), 고리(버드나무 가지나 지푸라기를 엮어 갖가지 물건을 만드는 것. 나중에는 유기 제작도 이들에게 넘어간다), 예악/배우(지금으로 치면 연예인), 망나니(직업적 사형 집행인으로 회자수로 불리움) 활동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개중에 사회적으로 고려와 반체제적 문제가 있는 자들도 있었다. 고려사에 보면 후백제 정벌시 굴복하지 않아 압록강 밖으로 쫒아보낸 자들이 시초라고 나온다. 이 외에 국가의 부역과 호적에도 제외된 방랑인이라는 기록도 있으며, 기녀들의 시초라는 기록도 나온다. 그리고 북방 민족 출신으로 포로로 잡힌 거란인의 후손이나 동북면에서 흘러들어온 여진인 등, 귀화했으나 정착 생활에 적응하지 않고 방랑생활을 하던 사람들도 있었다.~~집시?~~ 유목민인 거란인이나 수렵민인 여진인들이 자기들의 생활방식을 지킨 것. 버드나무 고리를 잘 만든 것도 가재도구가 이동에 편해야 하기 때문에 자연히 익숙해진 것이다. 사냥과 축산, 도축 및 고기판매업도 유목민 출신인 이들이 이것을 농경민들보다 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네들끼리 마을을 만들어 살던 사람들이 많았다. 고려 시기까지만 해도 한국은 불교의 영향력이 강했던지라 도축업을 살생으로 여겨 안 좋게 바라보는 경향이 있었고, 집단의 특성상 문화차이도 존재했기에 사회문제도 자주 일으켜 일반인들이 많이 꺼렸다. 왜구를 가장해 노략질을 하거나 거란의 침입시에는 길잡이를 했다는 기록도 있으니... 물론 흑사병 유대인 유포설처럼 상관이 없는데 억울하게 뒤집어씌웠을 가능성도 있지만, 백정이 조선시대에 천민으로 취급받게 된 근본적인 원인도 여기에 있는 셈이다. 물론 다른 국가에도 백정에 대한 편견은 있었으나 한국만큼은 아니었다. 정복국가인 금, 원, 청은 백정을 우대하는 유목민족 특성상 백정을 기술자로 존중해주었으며 서양에서도 일부 계층이 안 좋게 볼 뿐이지 사회 전체 분위기는 백정도 하나의 직업으로 인정되었고 유태인의 경우에는 종교적으로 깨끗한 고기를 먹어야 한다는 종교 가르침 때문에 종교 지도자인 랍비가 백정을 하는 일도 있었다. 한국에 유난히 백정에 대한 차별이 있었던 것은 백정 대다수가 이민족 후예였고 한국 문화에 융합되지 않았던 점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조정에서는 이들을 양민화할려고 공을 들였고 ~~애초에 이성계와 의형제 맺었던 사람부터가 여진족이었으니(...)~~ 세종대왕이 이들 양수척들을 양민화시키면서 신백정(新白丁)이라 이름지었으나, 사회적인 인식이 달라지지않아 기존 양인들은 양수척의 양민화에 거부감을 느끼면서, 이들과 어울려 살기를 꺼려했고, 덕택에 법적으로는 양민이나 실질적으로는 천민인 상태가 지속되고 말았다. 여하튼간에 이때부터 우리가 흔히 아는 백정의 개념이 생겨났다. 세조 시절에 왕 앞에서 논쟁을 벌인 안효례와 최효원 사이에서 욕설로 [자손' 패드립]이 시전된다. 여기서 시전자는 상민이고, 역으로 반박한 이는 양반으로 전신분에 걸쳐서 백정이 욕으로 통용되었던 것이다. 앞서 세종이 양민화를 시도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벌어진 일화이다. 이건 게이하고도 좀 비슷한 게, 게이들도 "호모라고 하지 말고 '즐거운 사람(gay: 원래는 즐겁다는 뜻. 그래서 Gay means happiness라는 티도 있다. 해피니스 아니다(...).)'이라고 불러다오" 했는데 이제는 게이가 동성애자를 지칭하게 되어버린 것처럼. 상인(常人), 혹은 상민(常民)이라는 개념은 여기서 등장한 것이다. 세종 전만 하더라도 백정이라는 말은 고려시대처럼 일반 백성들을 말하는 것이나, 세종 때는 양수척도 백정으로 편입하려고 하자 일반 농공상인부터 양반들까지 다 반대한 탓에 생겨난 현상.

그래도 세종의 이러한 양인화 정책을 거치면서 고려시대에는 유럽의 집시처럼 유랑민의 성격이 존재했던 백정들은 이때부터 정착생활이 완전하게 뿌리내리게 된다. 다만 결국 양민화는 실패했는데 세조 대에는 백정들이 도둑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를 묻는 내용이 과거 시험 문제인 책문으로 출제될 정도였다. 하지만 이것도 초기나 그렇고 나중에는 깔끔하게 포기해버린 것.(...) 거기다 차별 등도 더해져서 완전히 폭도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별도 거주지에서 위부로 나가기 위해서는 지방관의 특별한 허락까지 필요한 말 그대로 요주의 대상으로 굳어버린다.

그 유명한 임꺽정이 백정 출신으로, 유기를 만드는 고리백정. 이들은 어느 일정한 곳에 모여 살았으며, 이런 마을엔 양민이나 포졸들조차 가까이 하길 꺼려했다. 심지어 양반과는 같은 길에서 이야기조차 할 수 없었던 듯하다. 이야기를 하려면 길 밑으로 내려가서 이야기를 한다던지.

하지만 성균관에 소속된 특수집단인 반인(泮人)들은 성균관에 제사용 및 식용으로 육류를 납품해야 하기 때문에 자연히 도축 일을 함께 해야 했는데 이들은 공자님이 드실 고기를 바치는 몸이라고 오히려 세력과시를 했다고 한다. 양반집 자제들, 궁에서 일하는 별감들과 함께 한양의 유흥가를 주름잡던 물주들 중 하나. 이들이 살던 반촌(泮村)은 이러한 세력+성균관 출신 고위층의 비호로 인해 사실상 치외법권 유흥가 지역이었다. 재미있는 점은, 이 반촌이 있던 지역은 지금도 상업이 크게 번화한 서울 대학로 근처이다. 성균관대 안에 그 성균관 터가 있는 것을 생각하면 놀랄 일은 아니다.

전 사회적으로 천대를 받는 대신 병역의 의무나 납세의 의무가 없었으므로 생활이 곤란해지면 양민조차도 일부러 백정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실제로 능력만 있으면 돈도 많이 모을 수 있었다. 원래 도살업은 이익이 많이 남았다. 특히 소는 법률적으로 잡을 수 없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불법이라서 더욱 이익이 많았고, 이들을 주로 양반이나 잔치 등의 대형 행사에 주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고급화로 더욱 수익이 많았다. 이처럼 수익이 많은 반면에 뒤에 언급되겠지만 차별로 옷차림에서 사는 집까지 규제를 받았기 때문에 돈이 나갈 구멍이 없었다. 때문에 곳곳에서 백정 부자들이 등장했고 이후 신분제 폐지 등으로 백정들이 마음껏 돈을 쓸 수 있게 되면서 이들과 이들의 자손들이 형평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예전에 KBS에서 저연령층 대상으로 방영하던 모 역사프로에서 나온 역사적 일화 중에는 조선시대 한 늙은 백정의 장례에 백정들이 관에서 꽃상여를 빌려 쓰려 할 때 양민들의 반대로 수포로 돌아가자, 백정들이 남아도는 돈으로 더 좋은 꽃상여를 만들어 양민들을 기죽이는 일화도 있었다. 물론 양인들이 들이닥쳐 꽃상여가 바닥에 떨어지고 다툼이 일어나는 등 난장판이 일어나는 내용이 후술된다. 당시의 백정에 대한 차별을 생각하면 있을 법한 행동이었다지만 이렇게 백정을 노골적으로 차별하는 신분이 양반들에게 차별대우를 받았던 평민과 노비라는것이 아이러니다. 당시 백정은 따로 떨어져 살아야했고, 옷차림만으로도 구별이 되어야 했기 때문에 창옷(氅衣)이라 불리던 중치막이나 비단옷은 입지도 못했고, 머리에는 도 못쓰고 패랭이를 써야 했다. 동학농민운동 당시에 백정들이 많이 가담했는데 7종 천인에 대한 차별 대우를 없애라는 말과 함께 백정들이 쓰는 패랭이, 또는 평량갓를 벗겨달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여기에 결혼할 때도 말이나 가마를 못타고, 죽은 뒤에도 상여를 못 쓰는 것이 당시 법도로 취급받았다. 당연히 천민 취급이므로 평민의 아이들에게 조차 존대해야 하고, 서당은 당연히 못 간다. 신분은 양인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천민인 신량역천(身良役賤)이라는 점에서는 고려시대와 하등의 차이가 없다.

구한말~일제시대에는 형평운동이라는 것을 벌여 그들의 권리를 더 받으려 했었다. 이때 일제는 주민등록부에 도부라 적고 붉은 점을 찍어 여전히 차별했다. 그래서 이에 반발해 1920년대 무렵에 일어난게 형평사 운동이었다. 사실 일본에서는 우리나라의 천민에 해당하는 부라쿠민들이 지금도 여전히 사회적으론 차별받는 것이 사회 문제가 되는 일이 있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 항목 참조.

일제시대에 형평운동을 벌인 인물중 장지필(張志弼)은 백정 부호인 장덕찬의 아들로 백정의 아들이기 때문에 (양민들과 같은 학교에 다닐 수 없어서 가정교사를 들여 공부해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인물이었다. 그런데 귀국해서 보니 도부라고 찍혀 나오는 것을 보고 경악해서~~내가 백정이라니!~~ 형평운동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편견이라는 게 한순간에 없어지는 것은 아닌지라 이후에도 실질적인 대우는 계속 그대로 이어졌다.[* 드라마 "제중원" 실존인물이 황정도 백정출신으로, 많은 차별을 당했는데, 1920년대 서울에서 의료강의를 하다가 일부학생들이 그가 백정출신인것을 문제삼아 수업을 거부한 사태로 있었다.] 일본의 민족분열정책에 따라 많은 사회적 차별을 받았고 어느 정도였냐면 백정들은 농민에게 자신이 이야기할 때도 그집 마당에서 무릎을 꿂고 농민이 말할 기회를 줄 때까지 기다려야 했으며 학교진학이나 직업도 도축분야로만 제한되어 있었다.

이런 차별은 남성들보다 여성 백정들에게 더욱 가혹하였다. 여자들은 여전히 "'백정각시타기"'라는 사회적 악습에 시달려 자살하는 경우도 많았다. 백정 여자는 저고리 끝에 검은 표시를 해야 했고 사람들은 그걸로 누가 백정인지 구분했다. 백정의 아내나 딸이 마을 행사등에 구경나와 있는게 보이면 끌어내어 재갈을 물리고 치마를 벗긴 뒤 개처럼 바닥에 엎드리게 하고 그 위에 양민 남자들이 올라타고 끌고다니며 성희롱이나 겁간을 일삼았으며 고기를 내어줘야 풀어주곤 했는데 이걸 백정각시놀음이라 했다. 이것을 당한 여성은 임신까지 당하는 경우가 많았고 당연히 심각한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이런 악습은 기존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악습이었으나 일제 초까지 실제로 이어졌다. 일제초의 실화로 딸의 소학교 운동회를 보러갔던 어머니가 딸앞에서 백정각시놀음을 당한다. 딸이 보는 앞에서 입에 재갈이 물려지고 남자들이 올라타 온갖 능욕을 줬던거다. 결국 어머니는 집에 돌아와 자살을 하고 만다.

드라마 "백정의 딸",소설"토지"에서도 백정각시타기를 일종의 놀이로 여기며 일부 주인공들은 백정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 면이 나오기도 한다.[* 실제로 항일의병이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도 백정출신들에 대한 차별이 있었다.]

>ㄱ : 구경꾼 속에서 백정이 딸 하나를 잡아낸 기라요. 한사 결단 달아날라는 거를, 아 그러씨 장정 몇이 덤비는 데야,치마가 찢기 달아나고 속곳이 벗겨지고, 지금도 생각이 나는데 고놈의 가시나 몸매도 좋고 얼굴도 이삐게 잘 생깄더마. >ㄴ : 볼 만했겄네 >ㄱ: 그 이삔 가시나를 엎어뜨리놓고 장정들이 번갈아서 올라타고 이랴! 이놈의 소가 와 안가노!함시로 엉덩이를 철벅철벅 때리는 기라요.뿐이겄소?목에다 새끼줄을 걸고 네 발로 기게 하고 구경꾼 앞을 돌아댕기는데,그 에미가 소개기를 가져와서 겨우 풀리났지마는 좀 안된 생각도 들고. >ㄴ : 안되기는 머가 안됐단 말이오?백정은 사람이 아닌께,그 놈들을 오냐오냐 하고 내버려두었다가는 칼 들고 소만 잡겄소? 사람도 잡을라 들 긴데 옴작달삭 못하게 콱 기를 지이놔야지. >박경리, 토지

다만 이 '악습'이 전지역에서 벌어졌는가, 조선의 일반적 풍습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에 대해서 창작물을 제외하고, 다루고 있는 글은 이규태의 글과 이상천의 '조선팔천'인데, 여기서 다루고 있는 내용들은 모두 신분제가 동요되고 있는 일제시대를 다루고 있으며, 이상천의 경우는 노골적으로 경북 예천을 꼽고 있다. 바로 아래의 형평사 문제로 크게 대립이 있었던 그곳이다. 사실 조선시대의 경우는 백정과 일반 상민들은 거주지부터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특히 여인이 마을행사라고 해서 저런 식으로 참여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을 가능성이 더 높다.

이런 백정에 대한 천대는 형평 운동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기도 했는데 예천 형평사 사건이 대표적이다. 1925년 8월 9일 예천형평분사의 창립 2주년 기념식에서 참석자인 예천청년회장 김석희가 한 말[* '지금 새삼스럽게 형평사를 내세워 행동하는 것은 오히려 시대적으로 뒤떨어진 것이니 그보다 백정의 실질적 향상에 힘쓰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라는 요지의 말을 했다.]때문에 형평사 임원과 김석희간 논쟁이 있었는데 그때 장외에서 관람하던 일반인이 그것을 백정들이 버릇이 없어졌다로 인식하고 그들을 박멸하자고 주장하여 며칠동안 형평사를 공격하거나 형평사 임원의 집을 파괴하고 가족을 구타하는 일을 벌였다. 이에 평소 조선의 사회운동을 아니꼽게 보던 일본 경찰이 소극적으로 대응하면서 한동안 예천이 무정부상태가 되기도 했었다.[* 김희곤 외 4인,'경북독립운동사 5',청솔,2014,p238~240]

백정에 대한 차별은 1950년 6월까지 이어졌으나 [* 1950년 6.25전쟁 전 당시 국군에 필요한 장교를 양성하기 위한 육군사관학교에서도 우수한 성적으로 장교 임명을 앞둔 학생이 부모가 백정 출신으로 밝혀져 장교임명은 취소되고 강제퇴학당했다는 야사도 있다고 전하니(...)] 한국전쟁으로 나라가 완전히 초토화되고 사람들이 수도 없이 죽어나가는 와중에 족보가 소실되거나 백정마을이고 뭐고 다 해체되고 사라졌으며 더욱이 사회 분위기가 능력만 있으면 모든 게 용납되는 사회로 바뀌면서 백정이나 노비 출신을 천대하지 않게 됨에 따라 상당 부분 희석되게 된다. 물론 한국전쟁으로 기존의 사회체계가 박살나고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인 것도 있고, 완전히 소멸했다고 보기에는 오히려 은연중에 우리네 의식 저변에 잔존하는 경우도 있지만 국내에서 끊임없는 자유민주주의의 열망과 시민 의식이 성숙해 감에 따라 앞으로 나아질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영향이었을까. 이제는 현대에 이르러 도축업자 등을 직접적으로 백정이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뿐더러 그렇게 부르는 것 자체가 실례가 되는 표현이다. 직업에 귀천은 없다. 무엇보다 이거 하나만 기억하자. 이 사람들이 안 계시면 우리가 고기를 못 먹는다. 농담이 아니라 사실이다.

기나긴 역사 속에서 천대받고 차별당하던 세월의 후유증인지 비칭이 되다시피한 '백정' 대신 '육가공 기술자' 등 제법 근대화된(?) 이름으로 불리며 활동하는 지금에 와서도 아직까진 본인의 직업이나 직장 등에 대한 공개를 꺼린다고 한다. 외부인에 의한 작업장의 오염 문제도 있겠지만 그 점 역시 무시할 수는 없을 듯. 이 부분이 집중적으로 묘사된 작품 중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허영만 화백의 만화 식객 3권 소고기 전쟁 편의 13화 대분할 정형 에피소드와 15권의 돼지고기 열전 편.[* 3권의 해당 에피소드를 일례로 들자면, "네 아비의 직업을 옛날에는 뭐라고 했는 줄 아니? 백정!!! 아무리 시대가 개명했다지만 고생고생해서 사법고시에 합격한 우리 기범이의 색시가 될 수 없어!"라고 예비 사돈댁이 일갈~~지랄~~하며 혼삿길을 파토낸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이름난 육가공 기술자였던 '무사' 조경기는 칼을 놓고 대형 음식점에서 화부 업무에만 전념하게 된다. 안습][* 다행히 조경기의 딸은 훗날 도축업자인 것을 알고도 좋은 고기를 많이 먹겠다며 전혀 거부감없이 대하는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특히 이 부분에 대한 안타까움이 해당 편의 취재일기, 후일담에서 작가의 탄식으로 극명히 드러난다.] 마장동 축산물시장 항목에 소개된 일화들을 참고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그래도 2010년대 들어서 EBS 극한직업편에서 육가공공장에서 정형사와 발골사들이 실명과 얼굴을 보이며 떳떳하게 그들이 작업을 하는 모습이 방송되는 모습을 보면 그 인식은 상당히 개선된 편이다. 물론 3D직종으로서의 차별이 존재하기는 한다. 육가공사가 왜 극한직업으로 다뤄지는 건지 한번 생각해보자. 축산물단지 육가공사 초임 월급이나 임금 수준은 바닥을 기는수준이고 일이 힘든건 덤이다. 3D라는 인식이 만연하기 때문에 근로조건이나 환경등의 개선이 매우 더디고, 초과나 연장근로, 휴일근로에 대한 체계적인 연장수당에 대한 것이나 철저한 근로시간 준수따위도 잘 안지켜진다. 사회의 인식조차도 "그렇게 일하기 싫으면 공부해서 공무원되거나 회사들어가"라는 미개한 수준이기 때문이다.그러나 과거처럼 이들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보지는 않는다는 점에서는 확실한 개선이라 할 수 있다.

그밖에 일부 비하적인 말로 쓰이는데 한 네티즌은 부모가 보신탕집을 한다고 적었더니만 개빠들이 개백정이라고 하여 어이없어하던 일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반론도 많았고 개빠들을 가리켜 개빠답다. 그러는 놈들이 정작 정육점이나 일반 식당에 가서 돼지백정, 소백정,닭백정이라고 이렇게 말하지도 못하지, 지들이 처먹고 그 개에게 먹일테니까라고 신나게 욕하며 비난하는 글도 많았다.

비유적인 표현

흔히 악독한 독재자나 살인마에게 인간백정이라는 표현을 쓰곤 하는데, "인간인 백정"이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을 가축처럼 도살하는 백정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유명한 사람으로는 조지아의 인간백정으로 불렸던 이오시프 스탈린이 있다. 다만 스탈린의 경우에는 그가 죽은 다음에야 재평가를 통해 그런 별명이 붙었다. 왜냐하면 그가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던 시절에 그런 말을 내뱉었다가는 조지아의 인간백정이 사용하는 데스노트에 이름이 적혀 숙청되었을 테니까. ~~돼지 보고 '돼지야' 하면 그 돼지 기분이 어떻겠는가?~~

서구에서도 비슷한 뜻인 듯 하다. 백정과 뜻이 비슷한 영어 단어인 butcher(도살업자, 정육업자 란 뜻)엔 "잔인한 살인자"란 뜻도 있다. "Ah~ Fresh~ Meat!" 그러나, 이 butcher는 사람 성으로도 쓰인다. 이 쪽은 smith(대장장이) 등과 같이 조상의 직업이 성으로 붙은 경우.

라틴어로는 Carnifex. 어원이 참 깔끔하다. Carn(고기) - i(발음을 위해 첨가된 음운) - fex(만드는 자). 아울러 Lanius라는 말 또한 백정이라는 뜻이며, 폴아웃2의 등장 노예상인 메츠거Meztger또한 독일어로 백정이라는 뜻이다.

야구선수 정대현의 별명이기도 하다. ~~돼지~~이대호 전담 투수로 불릴 만큼 이대호를 잘 상대하기 때문.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한편 같은 야구선수인 백정현은 이름 때문에(...) 백정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인터넷 상에서 직업을 비하하는 의미로, 의사를 이렇게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주로 약사한의사들이 사용하는 멸칭인데 보통 의사하면 칼(메스)를 들고 사람의 몸을 갈라 수술하는 이미지때문인 것 같다. ~~애초에 의사의 본분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돌팔이 의사에게나 사용할법한 괴이한 표현이지만 신경쓰면 지는거다~~

정형기술자, 도축업자 들을 백정이라고 멸칭할때도 쓰이는데 본인들에게 "백정"이라고 부르면 절대 좋은 꼴 못본다. 식객에서도 자주 소재로 다룬 부분이다.

그 밖에 인간흉기, 사기 캐릭터들을 지칭할때 이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실제로 바키 시리즈에 등장하는 오로치 돗포가 젊었을 적 별명이 인간백정이었단 언급이 나온다.

--학원도시흑자라는 백정이 있다 카더라--[* 시라이 쿠로코를 한자식으로 읽으면 백정흑자(...) 물론 흰우물의 의미란 시라이 쿠로코(白井黒子)다.~~흰우물 검은아이~~]

스포츠에서의 의미

스포츠에서 백정은 주로 소속선수들을 마구 혹사시켜서 끝내는 부상으로 나가떨어지거나 안좋게 퇴단하도록 만드는 지도자를 주로 꼽는다. 특히 야구의 경우는 노예(야구)에서 알 수 있듯 말 한마디로 손쉽게 선수 한명 커리어를 작살낼수 있는 권한을 가졌기 때문.

네이버 웹툰 의 등장인물

백정(탈) 참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