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아파트

From The Hidden Wiki
Jump to navigationJump to search

목차

개요

1960년대 서울특별시의 무허가 건물을 정비하기 위해 시에서 지은 아파트. 그러나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로 인하여 흑역사가 되었다.

건립 계획

19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까지 서울의 인구수가 급증하면서, 무허가 건축물도 급증하게 된다. 이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이 당시 서울특별시장이었던 김현옥에게 무허가 건물의 정리를 지시한 것이 시민아파트 계획의 시작이었다.

1960년대 중반 정리를 위해 서울시에서는 각 구청에 지시해 무허가 건물을 전수조사 하도록 했다. 그 결과 136,650동의 무허가 건물이 집계되었다. 아무리 군사정권 시대라고 해도 몇십만에 달하는 시민들을 건물 정리한다고 길바닥에 내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때문에 대책을 마련했는데, 일단 46,650동은 현지 개량을 통해 양성화 시키도록 했고, 나머지는 철거하기로 했다.

이 철거민들이 이주할 장소로 만든 두 곳중 하나가 시민아파트. 나머지 하나는 경기도 광주(현 성남시)에 위치한 대단지였다. 참고로 이쪽도 광주대단지사건이라는 초대형 병크를 터뜨렸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처음에는 구체적인 계획이 없이, 서대문구 천연동에 아파트 19개동을 지어 철거민들을 그쪽으로 이주시킨다는 계획 하나만 있었다. 이 계획에 따라 1968년 6월 18일, 최초의 시민아파트 단지인 금화아파트를 짓기 시작했다.[* 현재는 4개동중 2개동이 남아있고 철거계획중이다.--1차분 시민아파트치고 운 진짜 좋은셈-- 사실 이런 경우는 일종의 프로토타입 취급을 받기 때문에 이후의 양산형처럼 날림 공사를 하지 못한다. 아마 그 영향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건 일본군 전통인데~~] 이 과정에서 서울시는 구체적인 계획을 발표하게 되었다.

1968년 12월 3일 시민아파트 건립계획이 발표되었는데, 1969년부터 1971년까지 240억원의 예산을 들여 무려 2천 동의 시민아파트를 건립한다는 대계획이었다. 첫 해인 1969년에는 48억원을 들여 400동을 짓고, 1970년에는 800동, 1971년에는 800동을 지어 2천 동을 채운다는 이야기였다. 각 세대당 전용 면적은 11평. 입주 방식은 최초 계약금만 납부하고 입주 후 최장 15년까지 입주금을 분할 납부하는 방식이었다.

이에 따라 1969년에 400여동의 아파트를 짓게 되었는데, 전반기에 284개동, 후반기에 116개동을 지을 계획이었다. 이 때 지어진 아파트는 32개 지구 406동으로 약간 더 많이 건설되었다. 1970년에도 계획은 계속 진행되어 시민아파트 건립계획이 중단되기 직전까지 시민아파트의 개수는 총 447동이었다[* 일시에 중지된 것은 아니고, 와우아파트 붕괴사고 이후에도 몇십개 동은 계속 지어졌다. 대부분 이미 짓고 있던 것들로, 이들 아파트는 사고 이후에 준공 된 것들이라 골조가 튼튼했다.].

아파트 구조

아파트의 구조 자체가 요즘의 아파트와는 상당히 달랐다. 보통 벽체식 구조로 되어 내력벽이 하중을 지탱하는 요즘의 아파트와 달리, 기둥과 보, 슬라브로 이루어진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요즘 아파트와 달리 내부 구조 변경이 상당히 자유로운 편이었다. 시민아파트 사진을 보면 각 세대의 내외부 구조가 제각각인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구조 때문이었다.

난방은 대부분 개별 연탄 난방이었고, 세면장과 화장실은 각 층당 공동으로 쓰게 되어 있는 구조였다. 지금의 아파트와 비교해 보면 상상도 못할 구조다.

전용면적은 11평으로 상당히 작은 편이다. 설계도에 따라 A,B,C형의 3가지 형태가 존재했다. 방의 구성이나 형태가 약간씩 다른 정도의 설계도였다.

문제점

그러나 이 시민아파트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는데, 아파트당 주어진 예산이 너무 적었고 시공 기간도 6개월 정도로 짧았다. 거기다 대형 업체가 아닌 자금력과 기술력이 떨어지는 33개 중소업체가 맡아 건설하고 있었다. 거기다 건설업계의 고질적인 문제인 하도급 구조까지 겹치면서 예산은 더욱 적어졌다. 이 때문에 거의 모든 아파트가 부실한 상태로 지어졌다. 여기서 골조공사 이외의 내부공사는 모두 입주자에게 떠넘겼다. 이 때문에 계단 난간 등을 만들지 않아 추락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났다고 한다.

거기다 서울시도 예측을 잘못한 것이, 아파트 설계를 당시 저소득층 생활기준에 맞춰서 했는데 실제로 아파트에 들어와 살던 사람들은 중산층이 대부분이었다. 저소득층이 중산층에게 아파트 입주권을 팔아치울 것이라는 예상은 하지 못한 것. 이 때문에 1㎡당 270kg으로 설계되어 있던 아파트의 하중이 900kg 이상으로 3배 이상 초과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거기다 아파트를 지은 곳은 대부분이 산중턱. 왜 저런 곳에 아파트를 지었냐는 질문에 대한 김현옥 시장의 답변은 이미 전설이 되었다. "야 이 새끼들아. 높은 곳에 지어야 wiki:"전시행정"청와대에서 잘 보일 것 아냐!" (...)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요즘 같으면 바로 망했어요--

각종 사고

부실공사로 지어진 시민아파트는 처음부터 많은 문제를 낳았다. 가장 큰 문제는 연탄가스였다. 최초의 시민아파트인 금화아파트를 비롯한 시민아파트 1차분은 1969년 겨울철에 입주가 시작되었고, 입주자들은 난방을 위해 연탄을 땠다. 그러나 부실공사로 인해 바닥이나 벽체에 금이 가면서 그 틈으로 연탄가스가 새어 들어왔고, 1969~70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는 시민아파트 연탄가스 중독 사고가 심심하면 신문에 실렸다.

또한 시민아파트 담벽이 무너져서 사람이 깔려 죽었다는 기사도 나오고, 건물이 뒤틀리면서 배관이 뒤틀려 화장실 오물이 아래층으로 새서 악취가 나고, 건물 일부의 콘크리트가 떨어져 나가는 등의 부실공사로 인한 부작용이 곳곳에서 발생했다.

당시 주민들은 이런 하자에 대한 보수를 해달라고 서울시에 수십차례 건의를 했지만 서울시는 예산이 없다는 이유로 계속 보류하는 처지였다. 그러면서 새로운 시민아파트는 계획대로 계속 짓고 있었다.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

이런 여러가지 문제점을 총체적으로 안고 있던 시민아파트는 결국 최악의 참사를 불러일으켰다. 1970년 4월 8일, 준공된지 4개월밖에 안 된 시민아파트 한 동이 폭삭 무너져내리는 사고가 발생했다. 자세한 것은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 항목 참조.

당연히 난리가 났다. 공무원을 포함해서 관련된 사람이 줄줄히 잡혀들어갔다. 김현옥 시장은 짤렸고[* 사퇴 형식이었지만 여러 정황을 보면 실질적으로 짤린 게 맞다.], 시민아파트 건립은 흑역사가 되었다. 시민아파트의 안전 문제가 크게 부각되고, 아파트 안전도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지어진 447동 중 349동에 달하는 시민아파트가 보수를 해야 한다는 충공깽스러운 결과가 나왔다.

철거

1977년까지 너무 날림으로 지어져서 보수할 수도 없는 시민아파트는 철거되었다. 이때 철거된 시민아파트는 무려 101동. 4분의 1에 달하는 아파트가 지어진 지 10년도 안 되어 철거된 것이었다. 이 철거비용은 시민아파트 건립 비용과 맞먹는 금액이었다.

1980년대를 거쳐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남아 있던 시민아파트도 더 이상 보수할 수 없을 정도로 낡아버리고 붕괴 위험이 제기되었다. 처음부터 날림으로 지어진 건축물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20년 이상 지나자 문제시 된 것. 이 때문에 정부에서는 1997년 9월 재난관리법을 제정하고, 시민아파트 정리 계획을 세워 순차적으로 정리해 나갔다. 그 결과 2005년까지 총 447동 중 444동을 철거했다.

남아 있는 시민아파트와 시범아파트의 개념

attachment:/e0022573_4a28e442b5199.jpg?width=400

2011년 현재 시민아파트는 3개동이 남아 있다. 남산 밑에 있는 회현 제2시범아파트, 금화시범아파트 그리고 남아현시민아파트(리모델링)이며, 금화시민아파트를 제외하면 와우아파트 붕괴 당시에는 아직 시공중인 아파트들 이었다. 공사를 그냥 중지할 수는 없었기에 구조물을 크게 보강하여 완성했고, 시범아파트라는 새로운 명칭을 붙여서 이젠 국가에서 책임지고 만든 견본이기에 안전하다는 식으로 선전했다. 덕분에 시민아파트 치고는 골조가 상당히 튼튼하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 하지만 모두 분류상으로는 시민아파트에 속한다.

본격적인 새로운 형식의 고층 시범아파트는 1971년 여의도에 24개동 1584가구로 지어졌으며, 이를 통해 여의도 개발의 안전성을 보장하고, 높고 쾌적한 중산층용의 아파트가 탄생하게 된다. 여의도의 시범아파트로 인해 아파트는 빈민이 아닌 중산층용 주거 양식이 된다. 이 시범아파트는 지금 우리가 사는 일반적인 아파트의 원형으로, 이 "시민/시범아파트"와는 개념부터 완전히 다르다.

아무튼 이 시범아파트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파트와는 그 형태가 많이 다른 편인데, 회현시범아파트의 경우 일단 급경사에 위치했기 때문에 구름다리를 통해서 아파트 중간 층에서 도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남아현시민아파트의 경우 중앙정원이 있다. 또 비교적 작은 평수의 집들이 외부까지 확장된 베란다(물론 나중에 만들어진 것)를 가지고 오밀조밀하게 모여있는 모습은 마치 홍콩의 어떤 건물같은 느낌이 난다. 실제로 이 아파트의 구조는 기존 시민아파트와도 차이가 있는데, 화장실이 모두 개별화장실로 들어갔다는 점이고 난방도 중앙난방식으로 되어 있다는 것. 덕분에 처음 지어질 때는 조금 높으신 분들도 이 아파트들을 선호했다고 한다.

이런 독특한 분위기와 얼마 없는 시민아파트라는 이유로 언론에서 조명을 받고, 여러 영상매체에서 이 곳을 담아갔다. 영화 소름, 친절한 금자씨에도 시민아파트가 나오고, 무한도전도 시민 아파트를 다녀갔다. 아마추어 사진가들도 카메라를 들고 많이 찾아왔었다.

그러나 지금 시민아파트 모두함부로 촬영하지 말라는 경고판이 붙어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도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을 함부로 찍거나 '낡고 음습한 느낌의 공간'[* 다만 남아현시민아파트를 제외한 다른곳은 재건축 소리가 나돈 이후로 제법 많은 수의 세대가 이 곳을 떠난건 사실이다. ]으로 규정한다면 주민 중에 누가 좋아하겠는가? 자기 작품만 신경쓰지 말고 그 곳에 사는 주민들의 감정도 배려를 하자.

회현시범아파트는 아파트를 떠받치는 옹벽이 D급 판정을 받았고, 금화시범아파트는 2동 모두 E급(--사형선고--)를 받았기에 이 때문에 2006년에 재건축 계획이 잡혔다. 이런저런 문제로 계속 재건축이 지연되고 있지만, 계획이 확정되면 두 아파트모두 조만간 사라질 듯하다. 일각에서는 대한민국 아파트 역사의 한 단락이 없어진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표현하고 있지만, 실제 거주하는 주민들은 대체로 환영 일색이나 다수 거부하기도 한다.

남아현시민아파트는 2010년 리모델링을 완료, "예미원주상복합"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리모델링을 거치면서 옛 모습이 거의 남지 않아 처음 보는 사람들은 이것이 원래 시민아파트였는지 알아보기도 힘든 상황이다[* 애초에 시민아파트의 골조는 요즘 아파트처럼 내력벽이 하중을 떠받치는 구조가 아닌, 기둥과 보가 하중을 떠받치는 구조이기 때문에 벽은 거의 대부분 비내력벽이다. 이런 구조는 구조변경이 상당히 자유로운 편이기에 리모델링을 하면 원래 모습이 거의 안 남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공사대금을 다 갚지 못했는지 2014년 4월 현재 1층의 미입주 상가 곳곳에는 유치권 행사중이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다.

일부만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청계천변에 있던 삼일아파트가 그것으로, 청계천 양쪽으로 1,2층은 상가, 3~7층이 주거용 아파트인 주상복합 형식의 아파트였다. 청계천 남쪽에 있던 단지는 모두 철거되어 롯데캐슬로 재건축되었고, 북쪽에 있는 단지는 3~7층만 철거하고 1,2층만 남겨서 상가로 사용하고 있다.

서울시는 최근 미래유산의 일부로 10대 미래유산 아파트 후보를 선정했는데 그중 회현시범아파트가 후보로 선정되었으며 금화시범아파트는 주민들이 이주하는 즉시 철거하여 공원을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2014년 7월 16일 현재 금화시범아파트 내부로 진입이 불가능하다. 철조망과 철장으로 꼼꼼히 통로를 막아뒀다. 이젠 진짜 추억속으로 사라질때가 된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