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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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元朝}}} (Yuan Dynasty)

목차

개요

1271년부터 1368년까지 몽골이 중국을 지배하던 시기에 존재한 몽골계 정복왕조. 몽골 제국의 제5대 칸 쿠빌라이가 국명을 대원(大元)으로 선포하면서 건국되었다. 황성은 보르지긴(孛兒只斤). [명나라]에 의해 중원에서 추방된 이후 [북원]으로 이어진다.

중세 몽골어로 다이온 예케 몽골 울루스라고 불렀으며, 이는 대원대몽골국(大元大蒙古國)이라는 뜻이다. 남송 등을 정복해 중국을 통일했고, 고려를 침공해 부마국으로 만들었다. 그 여세를 몰아 일본으로 쳐들어갔다가 카미카제 크리를 맞고 후퇴하기도 했다. 또한 베트남을 정복하려다가 쩐흥다오의 전략에 말려들어 물러나게됐다.

이름만 중국식으로 바꾼 게 아니라 중국의 제도 등을 도입하고, 후대로 갈수록 중국색이 강해지게 되지만 다른 이민족 국가들에 비하면 그 강도는 약하다. 중국 특색을 지양하며, 몽골의 정체성을 강하게 유지하였기 때문. 그런데 몽골인의 숫자가 너무 적다보니 유지하기가 매우 까다로웠고 그 성격도 매우 이질적이라 오래가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었다. 결국 그들의 문화는 그 시대를 지탱하는데에만 유효했다.

물론 원나라가 남긴 문화적 영향도 있긴 하다. 대표적으로 매우 인기있는 중국인들의 간식인 북경 양꼬치가 바로 원나라와 명나라때 북경에 잔류한 몽골인들에게서 유래한 것. 그리고 명나라 초중기의 복식도 한동안 몽골식 복장의 영향을 받은 형태였고 베이징의 지역색에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줬으며 베이징의 여러 지명도 몽골인들이 지었다고 한다. 작곡가 가오샤오숭(高晓松)이 방송에서 베이징의 명칭이 촌스럽다는 말에 몽골인이 글을 몰라서 그랬다는 무개념발언을 했다가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사회

원나라의 통치는 영주분봉제로 기본적으로 봉건적 신분제 사회였다. 원나라는 '몽골인 → 색목인 → 화북인 → 남송인' 이렇게 계급순으로 구성된 신분 제도를 실시했는데, 이때 한족들은 3~4 등급의 피지배층으로 분류되어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원은 호적상 이들의 신분층을 계관호와 투하호로 나누었는데, 투하호는 귀족에 사적으로 배속된 백성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양민층이며 노예층은 '구구'라 따로 불리었다. 원은 세수를 늘리기 위해 이런 노예들을 해방시켜 양민층으로 흡수시키려 하였다. 이 이외는 대략 다음과 같다.

* 원나라의 법률은 "노예는 물건과 같다"라고 규정했는데, 주인은 임의로 매매하거나 증여할 수 있었다.
* 20가구를 1갑(甲)으로 편성하였다. 각 갑마다 한 명의 갑주(甲主)를 두었다. 갑주는 몽골인이다.[* 이 갑주가 반란이 일어났을때 최우선적으로 죽었다.]
* 20가구가 1명의 몽골인을 먹여살려야 했다. 또 몽골인 갑주는 새로 결혼하는 한족 여성의 초야권[* 여자 노예가 결혼할 경우 영주가 먼저 여자와 동침하는 권리]은 몽골 병사의 몫이었는데, 중국 한인은 혈통의 순수성 유지를 위해 첫번째 태어난 아기를 죽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때 90여년에 걸친 지배 동안 한족 여성이 몽골 병사에게 처녀성을 바쳤기 때문에, 한족의 유전자가 몽골족으로 상당히 대체되었다고도 한다. 몽골에서는 라마승에게 처녀성을 바친 다음에라야 다른 남자와 혼인을 할 수 있는 습속이 있었는데, 몽골에게 직접 지배당한 중국 대륙에 거주했던 사람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고 보인다. 
* 반란을 방지하기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 여러 사람이 모여서 집회를 열지 못하게 했다.
 * 한족은 무기류를 일체 가질 수 없었다. 10가구에 하나의 부엌칼을 가질 수 있게 하였다. 무술을 배우거나 사냥을 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것은 몽골족의 동의를 받은 후에 가능했다.
* 노예는 사유물로 재산은 언제든지 뺏을 수 있다.
* 노예인 한족은 전통적인 한족 성명을 가질 수 없었다. 출생일자를 가지고 이름을 삼은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 몽골인들과 색목인들은 관직이나 공직등 중요한 자리에 등용될 수 있었다.

또한 직종에 따라서 10등급으로 나누었다. 관리, 아전, 도사, 승려, 의사, 기술자, 목공, 창녀, 유생, 거지가 그 순서다. 왜냐하면 원 중기서부터 과거가 시행되었고 과거도 유학적 지식을 묻는 문과보다 행정적 실무를 묻는 이과가 중시되었기 때문이다. 유교경전에만 빠삭한 유학자들이 원에서 출세하기란 힘들 수 밖에 없었다. 참고로 이과의 중시는 원뿐만 아니라 금과 신법이후의 송에서도 그랬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이과는 요즘 말하는 이과가 아니라 당대에는 잡과라고 부르던, 실용학문 일체를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항이 실시된 건 일부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고, 특히 강남지역에서는 송대부터 터잡고 살아온 한족 지주들의 자치가 실시되는 지역이 태반이었다. 애시당초 몽골은 이 차별정책을 중국 전토에 시행할만한 행정역량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를 잘 알고 있는 원나라 측에서 나중에 강남지역을 갈아엎으려 했으나 그 전에 역관광 당했다.

행정

한 마디로 역대 중국 통일 왕조들 중 가장 취약한 행정력을 자랑했다(...)

원나라의 지방행정제도는 중서성이 행정부 역할을 맡아 전 지역을 총괄하고, 그 아래에 11개 행성을 하남, 강남, 섬서, 사천, 요양, 감숙, 운남, 영북, 정동을 두어 지방을 통치했다. 그 지역의 3분의 1이 정복활동 도중에 분봉된 왕공제후들 및 정복전쟁 당시 원에 붙은 군벌들의 영지로 곳곳에 왕부가 설치되었다. 이들 지역에 대해 원 황실은 간섭은 할 수 있어도 통치는 불가능했다. 징세 불가. 징병 불가. 행정력 행사 불가.(…) 이건 현대의 기준에서 봐도 외국이나 마찬가지다. 거기다 중서성 관할 지역에 대해서도 왕공제후들 및 귀족들 영지가 빼곡히 가득차 있었다.

거기다 정규군으로 화북에는 4개 몽골도만호부[* 만호들을 총괄하는 군단급. '몽골' 이란 이름이 붙어있는 데서 알 수 있듯 이들은 몽골인이였다. 병력 정수 6~7만], 강남에는 22익, 후광 및 쓰촨지역에 각각 6익의 한군만호부[* 1익 = 만호. 단, 사이사이에 '상만호' 라는 도만호부의 절반 수준의 크기의 부대도 있었다. '한군' 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 계급상 3번째인 한인으로 구성. 원나라는 남인들을 경계하여 군대에서 철저히 배제했다.] 들을 배치했는데, 영지까지 분봉시켜놓고 지휘관은 세습이였다(…) 거기다 이들은 지방행정체계인 행성 밖에서 존재했다. 따라서 얼마 못가서 죄다 군벌화.(…) 황실 직할군은 시위군단과 케식 합쳐서 1개 도만호부 수준이다.

다만, 근대 이전의 제국들에서는 중앙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넓은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반독립적인 영주들을 분봉하는 경우가 오히려 보통이었음을 생각할 필요는 있다. 당장 중앙집권의 끝판왕격인 중국조차 중앙정부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는 임명제 지방관을 통해 모든 영토를 지배하게 된 것은 나라 시대가 되어서야 가능했을 정도. 즉, 이전 왕조=중앙집권적 관료제/원나라=봉건제라고 단순하게 도식화 할 수는 없다. 다만, 원나라의 경우 유목민 특유의 문화와 관료제의 미비 등으로 인하여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특별히 더 낮았고, 이 때문에 다른 왕조들처럼 지방세력의 발호를 억제하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었던 것.

이러한 일은 쿠빌라이 칸이 남송원정군을 장악하기 위해 이것저것 이권을 막 퍼줘서 가능했던 일. 쿠빌라이 칸은 왕공제후들의 자제들로 구성된 케식을 인질삼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시궁창](…) 원 황실은 이걸 통제하기 위해서 열심히 연회를 열어 달랬지만 임시방편에 불과했고, 심심하면 반란과 쿠데타가 일어났다.

정복활동 초기 몽골은 한때 진정으로 중국인들을 모두 죽이고 그 땅을 뺏고 논밭을 목장으로 바꿀 계획도 했었다. 근데 야율초재가 "근데 얘들 죽이면 세금은 어디서 걷어요?" 요 한마디에 그만둔 것. 참고로 몽골제국은 서하를 멸망시키고 철저히 살육하여 민족을 완전히 멸족시킨 적 있다. 중국 CCTV 보도에 의하면 오늘날까지 서하족 DNA를 가진 후손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 서역의 호라즘 왕국도 정복후 국민의 거의 전부를 학살하기도 했다. 이를 도성(屠城)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원나라가 멸망하면서 미처 몽골 초원으로 도망가지 못한 몽골인들이 한족들에게 남김없이 끔살되고 만다. 이 때 아이들 역시도 예외는 없었다 한다.]

문제는 원말기 중국인들을 몰살시킬 움직임이 더 있었다는 것. 물론 국가의 전면적 교체로 저지되었지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빈민구제를 가장 많이 열심히 한 것도 원나라. 이유는, 반란이 일어나면 진압하려고 군대를 움직여야 하는데, 군대가 군벌화돼서 말도 잘 안듣고 자칫 잘못하면 쿠데타가 일어나 버리기 때문에. 뭔가 안습하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빈민구제하랴, 왕공들을 연회 열어서 달래주랴 하다보니 재정부족으로 이런 군벌들 및 제후들을 억누를 중앙군을 제대로 키우질 못했다는 아이러니가 존재. 참고로 원말기 원나라는 몽골군벌뿐만아니라 한족반란군에게 어이없게 성이나 중요 요충지를 쉽게 빼겼는데 그 이유가 아이러니하게도 금나라와 남송을 정복할때 무너뜨렸던 성이나 요새를 다시 보수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면서 반란군이 무너진 성벽만 공략해도 쉽게 함락시켰기 때문이다. 이렇게 곳곳에 산재해 있던 군벌들은 북원이 성립한 후에 이합집산을 벌이며 원나라를 괴롭히기도 했지만 지속적으로 밀어붙이는 명나라에 의해 하나 둘 투항하게 된다.

아래의 역대 황제란을 보면 알겠지만, 국가가 존속했던 99년(1271-1368) 중 첫째 쿠빌라이(25년)과 마지막 토곤 테무르(36년)을 빼고 나면 39년(1294-1333)에 황제가 9명이 있었던, 여러가지 의미로 대단했던 나라다. 평균 약 4년. 그마저도 13년 동안 재위한 2대 테무르를 제외하면 1대 3년.(...)

미디어에서의 원나라

미디어에서 원나라가 나오면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데, 하나는 칭기스 칸이 나올때 후일담으로 잠깐 언급되는 거랑 나머지 하나는 개판오분전이 되어 국가 막장 테크를 타는 말기의 원나라가 바로 그것이다.

신의(드라마)에서는 [공민왕] 때까지의 고려왕들이 전부 줄줄이 무능했었다는 이유로 원나라가 고려를 합병하려고 했다.

기황후(드라마)에서는 [기황후],고려의 가상왕 [왕유],[토곤 테무르](혜종)의 관계를 초반에 가상적으로 설정한 스토리로 시작하여 이후 [원나라]에서의 스토리를 다룬다.

역대 황제

원나라 건국(1270년) 후의 군주들만 다뤘다. 그 이전과 이후의 칸들은 몽골 제국이나 북원 항목을 참고. 국성은 보르지긴(孛兒只斤)이다.

|| 대수 || 묘호 || 시호 || 칸호 || 휘 || 연호 || 재위기간 || || 초대 || 세조 || 성덕신공문무황제 || 쿠빌라이 칸 || 쿠빌라이 || 중통(中統, 1260~1264)br지원(至元, 1264~1294) || 1260~1294 || || 2대 || 성종 || 흠명광효황제 || 테무르 울제이 칸 || 테무르 || 원정(元貞, 1295~1297)br대덕(大德, 1297~1307) || 1294~1307 || || 3대 || 무종 || 인혜선효황제 || 카이산 퀼리그 칸 || 카이산 || 지대(至大, 1308~1311) || 1308~1311 || || 4대 || 인종 || 성문흠효황제 || 아유르바르와다 칸 || 아유르바르와다 || 황경(皇慶, 1312~1313)br연우(延祐, 1314~1320) || 1311~1320 || || 5대 || 영종br(英宗) || 예성문효황제 || 시디발라 게게엔 칸 || 시디발라 || 지치(至治, 1321~1323) || 1320~1323 || || 6대 || 진종 || 흠인대효황제 || 예순 테무르 칸 || 예순 테무르 || 태정(泰定, 1321~1328)br치화(致和, 1328) || 1323~1328 || || 7대 || - || 폐제 || [wiki:"천순제" 라기바흐 칸] || 라기바흐br(阿速吉八) || 천순(天順, 1328) || 1328 || || 8대 || 문종 || 성명원효황제 || 자야야투 투그 테무르 칸 || 투그 테무르 || 천력(天曆, 1328~1329) || 1328~1329 || || 9대 || 명종 || 익헌경효황제 || 쿠살라 후트그투 칸 || 쿠살라 || - || 1329 || || 복위 || 문종 || 성명원효황제 || 투그 테무르 칸 || 투그 테무르 || 지순(至順, 1330~1332) || 1329~1332 || || 10대 || 영종br(寧宗) || 충성사효황제 || 린칠반 칸 || 린칠반 || - || 1332~1333 || || 11대 || 순제[* 역대 중국왕조의 마지막 황제의 시호는 그 왕조를 없앤 다음 왕조가 내린 것을 삼는 것이 원칙이다. 북원은 고작 2대로 끝나고 멸망하였으며 원을 중원에서 몰아낸 명제국이 중국 통일왕조로 인정받는 만큼 태조 주원장이 붙인 순제가 옳다.]br(順帝) || 선인보효황제 || 토곤 테무르 칸 || 토곤 테무르 || 원통(元統, 1333~1335)br지원(至元, 1335~1340,br1368~1370)br지정(至正, 1341~1368) || 1332~1368 ||

추존 황제

|| 묘호 || 시호 || 성명 || 재위기간 || 비고 || || 희조(熙祖) || 의현황제(毅玄皇帝) || 보단차르(孛瑞察兒) || 태조 추숭, 칭기즈 칸의 10대조 || || 선조(宣祖) || 공철황제(功哲皇帝) || 카부러(合不勒) || 태조 추숭, 칭기즈 칸의 증조부 || || 열조(烈祖) || 신원황제(神皇帝) || 예수게이(也速該) || 태조 추숭, 칭기즈 칸의 생부 || || 목종(穆宗) || 도녕황제(道寧皇帝) || 주치(朮赤) || 세조 추숭, 태조의 장남 || || 성종(聖宗) || 충무황제(忠武皇帝) || 차가타이(察合台) || 세조 추숭, 태조의 차남 || || 유종(裕宗) || 문혜명효황제(文惠明孝皇帝) || 친킴(眞金) || 성종 추숭, 세조의 차남 || || 순종(順宗) || 소성연효황제(昭聖衍孝皇帝) || 다루마바라(答剌麻八剌) || 무종 추숭, 무종의 부친 || || 현종(顯宗) || 광성인효황제(光聖仁孝皇帝) || 카말라(甘麻剌) || 진종 추숭, 진종의 부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