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자 합의

From The Hidden Wiki
Jump to navigationJump to search
* 상위 항목: 경제 관련 정보, 경제학, 환율, 일본/경제,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

목차

개관

1985년 프랑스, 독일, 영국, 미국, 일본 재무장관들이 뉴욕 플라자 호텔[* 여담으로 그 호텔은 영화 [나홀로 집에] 2의 실제 무대가 된다.]에서 진행한 합의. [wiki:"엔(화폐)" 엔화]는 이때부터 비싸지기 시작했다. 이후 일본의 거품경제를 만들어낸 한가지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배경

1980년대 초반 그야말로 wiki: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 일본 경제가 엄청나게 '''고속 성장'''[* 고속 성장에 큰 의미를 두어야 한다. 1950년대 이후로 일본은 꾸준히 성장 추세였으니.] 했으며, 이로 인한 영향을 전세계적으로 일으키게 된다. 특히 소니, 히타치를 비롯한 다양한 기업들이 해외 수출로 막대한 부를 쌓아가고 있었으며, 이를 통해 막대한 [wiki:"미국 달러" 달러]를 벌어들인 일본은 국력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당시 미국은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당시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이었던 폴 볼커(Paul Volcker, 지미 카터 시절 취임)가 살인적으로 금리를 끌어올려서 달러 가치가 엄청나게 올라간 상태였다. 이로인해 미국의 제조업에 대한 투자가 위축되어 이 시기에 미국의 제조업은 시망의 길을 걷고 말았다. 이 당시의 금리인상과 직후의 레이거노믹스는 이후 미국의 경제구조를 뿌리채로 바꾸어 놓아서, 금융분야가 비정상적으로 커지고 제조업이 초토화되는 결과를 가져와 현재의 미국 경제에도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단적으로 무역수지만 봐도 역대급 호황을 누렸다던 클린턴 시기를 포함해서(!) 1980년 이후 미국은 무역적자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아무튼 이로인해 미국은 공산품에 대한 수입을 늘릴 수밖에 없었고 일본이 이 시기에 서독(!)을 넘어서는 제조업의 최강국의 위치로 올라서게 된다. 이 때문에 크게 늘어난 미국의 대일/대독일 적자는 1982년 들어 금리가 이미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줄어들지 않았다.

J 커브 효과

https://tutor2u.net/economics/revision-notes/a2-macro-balance-of-payments-deficits_clip_image008.gif

이때 이론적으로 미국의 환율 약세를 뒷받침하는 이론이 대두되었다. 텍사스 대학의 스테플 메기 교수가 주장했던 J커브 효과(J-curve Effects)였다. 즉, 환율이 변해 한 나라의 통화 가치가 오를 경우 수출/수입의 수량변동이 변하는 속도가 실제적으로는 느리기 때문에 결국 시간이 지나서야 변동이 온다는 이론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알파벳 J 모양과 유사하여 J커브 이론이라고 한 것이었다. 환율 수지가 수출입량 변화로 나타나는 이 시간은 대략 6~18개월(0.5~1.5년, 평균 1년(12개월)) 정도로 추정되었다.

반면 이 이론에 대한 비판적 견해도 많았다. 실제로 이 변화가 무역수지와는 별개로 엔화마르크 화의 공세적인 형태로 나타났기 때문. 또 대한민국원화가 좋은 예로, 1980년대 초반 "원저"는 한국 수출에 큰 득이 되지 않았다. 1977년~1978년 이미 한차례 "원고"가 이루어졌으나 일본 경제가 받은 손실이 크지 않았다(물론 있긴 있었다)라는 점도 이 반박을 뒷받침햇다.

합의

미국 국내 여론은 이런 악화된 무역 수지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자동차를 필두로 한 미국 기업들과 농민들은 강한 보호주의 정책을 펴든지 다른 대책을 내놓든지 하라고 정부를 강하게 압박했고, 이를 버틸 수 없던 당시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1985년 9월 22일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열린 G5(프랑스, 독일, 영국, 미국, 일본) 재무 장관 회의에서 이 달러 강세 문제를 해결하자고 주문하였다.

이 재무 장관 회의에서 도출된 결과는 환율의 현실화, 펀더멘탈 현상 해결 등등으로 이루어졌고 해결은 원만하게 이루어졌다. 도리어 미국이 쩔쩔매는 모습을 보며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의 앙갚음을 했다는 생각까지 했다. 대표적인게 당시 대장상이자 후임 수상이 되는 타케시타 노보루. --지금 좋아할 만한 상황이 아닐텐데--

물론 일본에서도 플라자 합의가 달가울 리 없었고 실제 분위기는 미국의 협박에 가까웠다는 의견도 많다.

합의의 영향

이후 플라자 합의가 채택되자 독일 [wiki:"독일 마르크" 마르크]화는 채택 1주만에 약 7%, 엔화는 8.3% 가 각각 상승했고, 이후 2년동안 달러는 30% 이상 급락하게 된다. 이 달러 약세로 인해 미국의 제조업체들은 가격 경쟁력을 회복하였고, 미국의 대유럽 무역적자도 줄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엔화 대비 달러의 가치가 50%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대일적자는 크게 해소되지 않았다. 무역수지가 개선되기 시작한 것은 J 커브 이론의 시한인 1.5년 반을 훌쩍 넘은 2년 뒤인 1987년 말이었다.

한편 엔화 가치가 상승하면서 일본에서는 미국에 있는 별장을 사거나 각종 미술품을 사재기하는 등 [wiki:"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s-3" 부를 과시하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의 대미 수출은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일본은 수출 위주의 경제를 지탱하기 위해 무리한 저금리 정책을 운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는 [wiki:"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일본 경제에 거대한 거품]을 가져왔고, 1990년 새해 첫날의 주식시장 하락부터 시작하여 부동산을 필두로 한 각종 거품이 한꺼번에 꺼지자 일본은 [wiki:"잃어버린 10년/일본" 잃어버린 10년]이라 불리는 장기 불황을 겪게 된다. --그리고 그 불황은 20년을 넘어 30년을 내다보는 상황이 되었다.--

여담으로 플라자 합의로 1980년대 후반 대한민국이 반사이익을 보았는데, 일본과 수출 경쟁품목이 많은 상황에서 엔화의 가치가 상승하여 상대적으로 원화 가격이 싸졌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은 이 엄청난 경제 문제로 인하여 1995년 4월에 G7 경제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에서 엔저 유도를 위한 합의를 하지만, 문제는 그 후에.... (이하 1997년 외환 위기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