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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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국군/인물

https://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09/0814/IE001093748_STD.jpg (이승만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수여받는 김창룡)

金昌龍 1920년 ~ 1956년

[목차]

소개

관동군대한민국 국군의 정보 군인. 일본 관헌 소속이었다가 광복 이후 출세해 강력한 권한을 휘둘렀다는 점에서 노덕술의 군인 버전으로 비교 취급되기도 한다. ~~물론 중국항일세력을 때려잡은 김창룡보다 독립운동세력을 때려잡은 노덕술이 훨씬 더 악질이지만~~

일생

일제강점기

함경남도 영흥군 출신으로 1940년부터 만주에서 관동군 헌병보조원과 헌병 이등병으로 근무했다(그전에는 제기 공장 노동자를 했다고 한다). 1941년 소련 국경 부근에서 첩보 부대원으로 이력을 시작하여 이후 평생 동안 정보 공작,고문의 전문가로 살아가게 되었다.[* 옛부터 정보활동과 고문은 불순분자를 색출한다는 측면에서 인연이 깊었다. 영화 계엄령에서도 CIA관계자가 우루과이 정보기관요원들에게 고문을 가르쳐 준다.]

1943년 상하이에서 파견되어 활동 중이던 중국공산당의 왕근례를 체포하였고, 이로 인해 왕근례가 이끌던 비밀 조직이 일망타진되는 성과를 올렸다. 김창룡은 공로를 인정 받아 오장(伍長, 일본군의 하사계급)으로 진급하였으며 이후로도 많은 비밀 조직을 적발, 소탕하는데 공을 세웠다.

미군정

8.15 광복 후 고향인 영흥으로 돌아왔다가, 친일 전력으로 인해 보안대와 소련군에 의해 두 번이나 죽을 뻔 하고 1946년 5월 자유대한(?)으로 월남하게 된다. 도시전설에 의하면 이때 하도 엊어터져서 폐인이 된 모습으로 넘어와 미군 경비병들이 놀랐다고 한다.

대한민국

이후 김창룡은 사병으로 입대하여, 1948년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숙군작업에서 그의 헌병 경험을 십분 발휘하게 된다. 그러나 군 내부에서 진행된 숙군에는 많은 무리가 따랐다. 당시 헌병사령관이었던 신상철은 숙군 과정이 무리했음을 다음과 같이 인정하고 있다.

당시 가장 중용한 것은 시급히 숙군을 끝마쳐야 한다는 점이었다. 결국 명백한 물증이 없었던 만큼 자백이 증거의 대부분이었다. 반대로 "누가 누가 보장하면 빼준다"는 것이 하나의 원칙처럼 돼 있었다. 내가 "책임질 수 있다"고 보증해 풀려난 사람들도 몇 명 있었다. 군대좌익 조직의 비밀 명단이 입수된 뒤에 암호를 풀어 해당자를 잡아오는 식으로 진행됐는데, 동명이인으로 엉뚱한 사람이 걸려 들어오는 예도 있었다. 또 한 명을 잡으면 "아는 놈 이름을 대라"고 때려가며 조사를 했는데 급한 김에 마구 불다보니 엉뚱한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다.

한편 국방부 발행의 《한국전쟁사》1에서도 "조사 방법이 증거주의가 아니고, 신문하여 자백하지 않으면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고문의 결과 동기생이나 또는 술친구들의 자백에 말려 끌려 들어간 무고한 장병들이 고생을 해야 하는 실례가 있었다" "사형을 당한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는 마당에서도 애국가를 부르는가 하면, 대한민국 만세, 이승만 대통령 만세를 부르고 총살을 당했다"고 언급함으로써 숙군 과정에 무리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렇듯 문제가 있었던 숙군 과정에서 김창룡이 보인 병적인 행동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건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예컨대 김창룡은 당시 창설 준비중인 공군요원을 40명이나 체포했는데, 이는 당시 공군의 간부 거의 전원이나 다름없었다. 박원석 중위(1965년 공군 참모총장 역임)의 경우, 박 중위를 잘 알던 김정렬(金貞烈) 대령이 나서서 그 검거 경위를 묻게 되었다. 김정렬 대령의 회고에 따르면, 김창룡은 박 중위에 대해 아무런 증거도 없으나 앞으로 접촉할 가능성이 있는 것 같아서 우선 잡아둔 것이라고 대답했다 한다. 백선엽 회고록 《실록 지리산》에 쓰여진 또 하나의 사건 또한 당시 김창룡의 독선적인 행태를 잘 보여 주고 있다.

한번은 김창룡이 잡아들인 수백 명의 영등포 특별부대 장병들이 재판에 회부됐다 . 사건을 담당한 이운기(李雲起) 법무관은 이들의 진술서가 판에 박은 듯이 똑같아 이상하다고 내게 문의해 왔다. 알아보니 김창룡이 부평을 순찰하는데 술집에서 인민군 노래가 울려 퍼져 즉각 술집을 포위해 잡아들이고 보니 특별부대 장병들이었다. 중대장인지가 무조건 한 곡씩 노래를 하라고 시켰는데 한 병사가 노래를 못한다고 극구 사양하면서 "아는 노래는 월남하기 전 이북에서 배운 노래밖에 없다"고 했더니 "그거라도 하라"고 해 생긴 소란이었다. 김창룡은 이들을 잡아들여 "친한 놈 이름을 대라"고 족쳤는데 그래서 수백 명이 검거됐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책임질 테니 무조건 무죄로 상신하라"고 했는데 이 일로 이운기 법무관은 김창룡으로부터 "너도 빨갱이다. 꼭 잡아넣겠다"는 위협을 받았고 나(백선엽)와도 몇 달간 신경전을 폈다.

그는 제1공화국 시절 각종 정치적 음모의 중심에 있었으며, 특히 김구의 암살을 지시했다는 설 또한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김구가 안두희에게 암살될 때 김창룡은 육군본부 정보국의 방첩대장을 맡고 있었는데, 체포된 안두희에게 여러 편의를 보아준 사실이 있다. 심지어 김창룡이 김구 암살의 배후일 뿐 아니라 역시 김구 암살과 관련이 있던 채병덕, 장은산, 신성모의 입을 막기 위하여 이들의 죽음에도 개입했다는 소문도 있었다.(김창룡은 56년에 사망했는데, 귀신이 되어서 1960년에 신성모의 죽음에 개입한 모양) 이러한 소문들은 아직까지 확인된 바 없다. 하지만 과거 김구 암살범인 안두희가 김구 암살은 김창룡이 지시했다고 증언을 한 바 있다. 그런데 이건 권중희안두희에게 엉덩이에 대침놓는 고문으로 강요한 허위자백 강요다. 왜냐하면 증언에는 김창룡과 장택상이 암살하라고 지시했는데, 김창룡은 당시에 [[1]](더욱이 CIC,특무대는 아닌)이고 결정적으로 장택상은 48년에 외무부 장관에서 짤려서 영국대사로 갈려다가 거절했다. 그리고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가, 테러를 당해서 요양중이었다. 1961년 당시 검사에게 불려갔는데[계열의 테러를 우려해 자신을 감옥에 넣어달라고 했다.] 안두희 자신의 말에 의하면, 김지웅과 장은산과는 알고있지만 김구 암살과는 관계가 없다고. [[2]][[3]]

그런데 장흥헌병 사령관(육군대령)은 자신의 저서에서 신성모를 배후로 지목했다. 안두희가 1992년 고백(?)했을때, 김구의 아들인 김신(1960년 공군참모총장 역임)은 [소령에 불과한 김창룡이 어떻게 단독으로 암살을 지휘하냐]며 따졌다.

민간인 학살에서도 김창룡은 항상 거론된다. 그는 CIC 특무대장으로 보도연맹 학살사건을 일으킨 원흉으로 수십만명의 양민들을 학살하는데 주동적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 작전권이 미국에게 예속된 육군과는 달리 CIC는 독자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미군의 군에 예속되어 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독립적이었다. CIC는 한국전쟁때 대부분 양민학살 사건에 주도적으로 움직였다. 따라서, 보도연맹 학살사건을 비롯한 각종 양민학살 사건에 김창룡이 개입했다는건 너무도 당연하다.]

대통령 이승만의 커다란 신임하에 1951년 육군 특무부대장이 되었고, 1953년에 준장, 1955년에는 소장으로 승진하였다. 종전 뒤에도 대통령 이승만의 각별한 신임 속에 제1공화국의 각종 공안 사건들을 맡아 처리했다. 그러나 그가 처리한 대부분의 용공 사건, 간첩 사건들은 후에 조작이라는 진술이 나왔다.

예를 들어 1949년 제14연대장 오동기 등이 연루된 인민해방군 사건이나, 소총을 관 속에 숨겨 대구로 이동하던 불순 분자들을 적발한 사건, 부산 정치 파동(발췌개헌)의 빌미가 된 부산 금정산 공비 사건 등이 있다. (이전 버전에 쓴 김수임 체포사건은 김창룡과 무관하다. 그것은 오제도 검사의 특별수사본부에서 벌인 일)

단, 금정산 공비 사건은 남도부(하준수)의 조병창 방화사건과 연계해서 진짜 빨치산의 소행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정확하게는 부산 조병창 방화와 동래에 놀러간 미군 고위 장교가 피살된 사건은 진짜로 있었으니까. 금정산 사건을 100% 조작이라고 하는 사람은 당시 이승만의 체포에서 벗어나 일본 밀항을 한 선우 종원 검사, 실제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이범석이다.

1953년 국제간첩 정국을 적발한 사건도 이범석의 족청계 숙청을 위해 조작 또는 과장된 사건이라는 설이 있었다. 동해안 1군단이 연루된 동해안 반란사건, 1955년 한국전쟁 때 북으로 간 조소앙한국독립당 간부들에게 이승만 암살 지령을 내렸다는 개천절 이승만 암살 음모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암살시도는 사실맞다. .4.19혁명 이후 나재하,민영수등은 이정권(이승만 정권)의 악정을 개선하고자,그런것일뿐 [이승만을 죽이려 했던게 아니]니 특사를 신청했다고... 그리고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죽었을때,나재하는 [내죄가 부끄럽다]고 말했다.(초상이 났을때는 고인에 대해 긍정적인 말밖에 할수없다)

권력을 이용한 축재에도 능했으며 실제로 방첩대 등을 이용해 각종 이권에 개입한 걸로도 부족해 직접 밀주를 만들어 팔았으며 그 와중에 헌병들에게 검거된 방첩대원들을 빼내려 하다가 군부와 마찰을 만들기도 했다.

이렇게 권력을 남용하고 군의 지휘계통을 무시하는 일을 자행하자 결국 이에 불만을 품은 육군대령 허태영의 하수인 송용고 ·신초식 등에 의하여 1956년 암살당하였다. 그 후 허태영의 부인 황운하의 탄원으로 사건의 최고 배후자는 육군중장 강문봉이었음이 밝혀졌다. 사건 직후 이승만은 김창룡에게 1계급 특진을 추서하였다. [녹음]

재판정에서 허태영,강문봉등 피고인들은 2차 대전 당시의 군벌등의 예를 들어 김창룡이야 말로 국군의 단결을 저해하는 존재라고 주장했다. 놀랍게도[허태영은 의외로 살아온 길이 비슷했다]고 한다.

평가

여순반란에서 알 수 있듯이 숙군은 꼭 필요한 일이었으며 당시 정황상 어느정도 부작용을 감수하고 빨리 끝낼수 밖에 없었다는 점은 다들 인정한다. 문제는 이 과정에 김창룡 개인의 권력욕이 개입해 정황을 감안해도 안나올수 있었던 억울한 피해자를 무수히 양산했다는 점. 이점때문에 국군 원로들은 김창룡을 매우 싫어한다. 권력을 남용하고 군의 지휘계통을 무시한데다 숙군 과정에서는 지나친 무리수로 억울한 희생자를 많이 만들어낸 탓에 평가가 아주 좋지 않다. 축구계 원로들중에도 이 사람에 대하여 부정적인 이들이 많다.

심지어 훗날 김창룡 아들이 육사에 지원했는데 생긴게 아버지를 쏙 빼닮아 숙군을 경험한 당시 육사 면접관들이 혼비백산한 적도 있다고 한다. 당연히 면접 탈락. 하지만 이승만 빠들은 이 사람도 찬양한다. 그의 무덤에 매해 꽃도 바치고 이승만 사랑모임을 자처하는 이들이 김창룡을 욕하는 건 종북행위라고 병크발언도 한 바 있었다.[* 숙군 자체를 비판할 순 없긴하다.]

죽고 나서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 이에 대해 찬반논란이 있다. [[4]] 그런데, 대전현충원 이장을 반대하는 일부 세력들은 김창룡을 '반공투사'라고 극찬하고 칭송하고 다니고 있다.

어디 모 싸이트 [[5]]에서는 위의 업적을 뭔가 화려하게 포장해서 선전하고 있다.

미디어에서

야인시대에서도 등장한다. 특히나 권총으로 김두한을 협박을 하다 김두한한테 굴욕을 당했다...

드라마 서울 1945에 등장하는 박창주는 이 인물에서 일부 설정을 따와서 만든 가상의 인물이다.

이인화의 ~~불쏘시개~~ 인간의 길에서는 악마사촌 고문 기술자로 나온다.

드라마 제2공화국에서는 백범 역 전문 배우 이영후가 김창룡으로 나왔다. 박정희를 전화기로 전기고문하는 장면이 그대로 묘사된다. 이후 박정희가 중요한 순간마다 그 광경을 떠올리는 장면이 묘사된다.

선우휘의 추적의 피날레에서는 다른 이름으로 등장하는 악역 장군이 김창룡을 모델로 하고 있다. 대북 첩보를 자신의 권력장악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인물인데. 이 인물도 출근하다가 암살당했다.

기타

여담으로 그의 비문은 이병도가 썼다. 비석은 후손들이 폐가 비스무리한 곳에 거의 버린 채로 방치했고 이것을 정지환 기자가 찾아내 특종 보도하였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