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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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개요

페르시아어: سیّد روح‌الله مصطفوی موسوی خمینی (사이이드 루홀라 모스타파비 무사비 호메이니) 영어: Ruhollah Mostafavi Musavi Khomeini

1902년 9월 23일 ~ 1989년 6월 3일[* 공교롭게도 이날은 중국에서 천안문 사태가 격화되던 와중이었다.]

[이란]의 정치인이자 성직자. 이란의 민주화를 이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여성 인권의 적이라는 전혀 상반된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며, 거기에다가 각종문제에 대한 주장을 보면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인물 같이 느껴진다. 이란 사람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로 1979년 타임지에서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기도 했다. 이란에서는 그를 호칭할 때에 아야톨라[* 고위 성직자에게 수여하는 호칭. 참고로 호메이니의 뒤를 이어 현재까지 이란의 최고 종교지도자인 사이이드 알리 하메네이(1939년생, 1981년부터 호메이니 사망 때까지 대통령 역임.)와 헷갈리기 쉽다. 호메이니는 이 칭호를 1950년대 후반에 받았다.]가 아니라 이맘[* 지도자, 설교자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예컨데 하메네이는 현직 이맘.][* 참고로, 테헤란 국제공항(신공항) 이름이 "이맘 호메이니 국제공항"이다. 그가 이란에서 얼마나 존경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예.]이라고 한다.

여담으로 [대한민국]에서는 현재 이름만 불리고 있으나, 그가 사망할 당시에는 호메이니[* 참고로 "호메이니"는 호메이니가 태어난 지역인 호메인(Khomeyn) 출신이라는 뜻이라고 한다.]이라고 불렸었다. --옹 한 글자만 붙였을뿐인데 왠지 동네 할아버지가 떠오른다.--

https://xdisciple.files.wordpress.com/2012/07/image961_ayatolla_connery2.jpg 숀 코너리가 호메이니 옹과 은근히 닮았다.

사상

그의 사상은 간단하게 말해서 왕조 꺼져! 이슬람 사회의 모든 법은 이슬람법에 기원해야 하고[* 간단히 말해서 꾸란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근본주의.] 지도자는 이슬람 성직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파키'라고 불리는 이 성직자는 다른 성직자들이 뽑아야만 하며 또 그들만이 쫓을 수 있다. 그리고 민중은 이 파키를 선출하는 성직자들을 8년에 한 번 선거로 뽑을 수 있다. --대통령 간선제의 이슬람 버전--

생애

망명생활

1965년 이란에서 터키로 => 1965년 터키에서 이라크로 => 1978년 이라크에서 프랑스로 망명을 반복했다.

그는 1960년에 이미 시아파의 최고 종교지도자였는데, 이때 팔레비 왕조에게 몇 번이나 덤볐다. 토지 개혁과 여성 해방을 비난한 것이다.[* 아마 진짜 문제는 토지 개혁일 것이다. 토지 개혁의 내용이 사원의 토지를 축소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혹은 정말로 이슬람 원칙주의를 위한 것이었을지도] 거기에 나중에는 친미 성향이었던 팔레비 왕조에게 거슬릴 정도로 미국을 비난하여 결국 터키로 추방당했다. 거기서 이라크로 옮겨가게 해 달라고 요청해 이라크로 건너가 시아파 성지 나자프에서 1978년에 떠날 때까지 머물렀다. 이라크의 압박에 의해 프랑스 파리 교외 노플로샤토로 건너갔다. 그런데 여기서도 안전한 것이 아니었는데, 프랑스 정부는 그를 암살할 생각까지 했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막은 사람이 호메이니의 철천지 원수라고 할 수 있는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였는데 그 이유는 그가 암살당하면 그를 순교자로 만들어주게 되기 때문이었다.[* 명망 높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손을 대서 망한 독재자는 한둘이 아니다.] --그렇지만 역관광--

~~왕의~~ 귀환

1979년 이란에서 혁명이 일어나 왕조가 물러나자 귀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만 16세 이상의 모든 이란 국민들에게 공화정 찬반투표를 실시해 98% 이상이 이슬람 공화정을 찬성하였다. 이러써 이란 공화국 탄생한다. 매 4년마다 대통령을 선출하고 자기는 [wiki:"독재자"종신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좀 더 젊었다면 장기독재가 되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에 이미 70대의 노령. 의외로 독재기간은 짧았다.] 하지만 이 이슬람 공화국의 선포는 문제가 많았은데 우선 아나키스트, 공산주의자, 좌파들은 종교인들은 모스크에 있어야지 정치를 해선 안된다고 공화국엔 찬성을 했지만 이슬람 공화국에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거의 100%에 육박하는 찬성률은 당연하지만 부정선거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호메이니의 추종자들이 왕정의 협력자들 뿐만 아니라 신정 체제를 반대하는 공산주의자들과 세속주의자들을 대대적으로 살해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암살되거나 암살 위협에 시달리다가 망명해야 했다. 그리고 급속도로 근본주의로 흘러가는 분위기에 반대하여 진보주의자들이 대대적으로 시위를 벌였으나 호메이니의 추종자들은 시위대를 '창녀','제국주의 추종자'로 몰아세우고 그야말로 시위대를 칼부림했다. 반 근본주의 움직임은 순식간에 사그라들고 말았다.

이때부터 미국과의 계속되는 갈등이 벌어진다. 이란 미 대사관 인질 사건으로 지미 카터 행정부에 큰 타격을 입혀 재선을 실패시키지를 않나, 뒤에는 사담 후세인의 침공을 받아 (역관광하긴 했지만) 이란-이라크 전쟁에 당하질 않나... 하지만 이란 콘트라 사건 같은 흑역사를 보면 또 실용적으로 살 무기는 산 모양이다.

이슬람 원칙주의자

인기는 정말로 좋았지만 지독하게 이슬람 원칙을 주장했다. 게다가 자신에 반대하는 자는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고문이나 사형도 빈번했다. 당시 이란에선 팔레비가 천단위의 사람을 잡아넣고 사람들을 고문했다면 호메이니는 십만단위로 잡아넣고 그냥 죽였다고들 한다. 이슬람 공화국으로 돌아간 이란에선 처녀들을 죽이는 일은 금지되어 있었지만 수많은 처녀들이 총살되었다. 어떻게 된것인가 하면 처형 전날 혁명수비대원과 억지로 결혼을 시킨 다음에 강간을 하여 처녀성을 빼앗아 처녀 아니다! 처형할수 있다!라고 꼼수를 부린 것이다. 그리고 아주 적은 양의 지참금이 처형된 처녀의 집에 보내졌다. 해외 기업의 진출도 대부분 무산되어서... '팔레비 왕조보다야' 하는 사람도 있지만 반대파 억압은 이쪽도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당연히 세계인권단체에서 호메이니는 지금도 까이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묘하게 개방적인 점을 보이기도 했는데 팔레비 왕조의 [유태인] 우대정책에 불만을 품고 자신을 지지한 [아르메니아]계들에게 유태인들이 가지고 있던 상업적 특권을 준 것이야 그렇다쳐도, 종교와는 별도로 동성애적으로 번민한 끝에 성전환을 할까 고민하던 남성 군인에 관한 얘기를 전해듣고는 "자신의 성 정체성 때문에 고통을 느끼는 자를 구제해줘야 한다"라며 __기꺼이 성전환 수술을 허락하고 아예 국비로 수술비 부담까지 해줬다!__

이를 두고 이란에서도 보수적인 신학자들이 알라가 주신 몸을 수술로 강제로 바꾸는 짓은 용납할 수 없다고 결사반대했음에도--신체발부는 수지알라라~ 함부로 할 수 없거늘 그 거시기를 함부로 제거하다니-- 법적으로 허용하여 지금도 이란에선 동성애는 금하지만 아예 그냥 여성이나 남성이 되고 싶다면야 국비로 부담해주며 허용하게 된 것도 그의 뜻이 절대적이었다.

다만 이것은 남성을 좋아하는 것은 오로지 여성이어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사랑을 못 버리겠으면 성을 버리면 되지!~~ 즉 [동성애]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소리. 호메이니 치하의 [이란]에선 나 동성애자요 하고 농담 한 마디라도 했다간 그대로 경찰들에게 몰매를 맞던 시절이었다. 지금이라고 나아지진 않아 남성 동성애자들은 [사형], 여성 동성애자들은 채찍형을 받기 때문에 동성애자들은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성전환 수술을 받거나 해외로 망명가는 경우가 빈번하다고...

또한 이탈리아의 유명한 wiki:"기자(언론)"여기자 올리아나 팔라치와의 일화도 꽤 흥미롭다. 호메이니와 팔라치는 영어로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계속 호메이니가 여성의 진출을 억압하고 여성들의 아바야(차도르) 착용을 거듭 강조하자 팔라치가 기어이 "이딴 차도르 써야합니까?" 라고 물었고 이에 호메이니가 "마음에 안 들면 안 써도 되오. 차도르는 아름답고 정숙한 처녀를 위해 알맞은 옷이니까."(즉, "넌 못생기고 막되먹은 이교도 아줌마니까 안써도 그만임")라고 받았다.

결국 팔라치는 빡쳐서 쓰고 있던 아바야를 벗어 구겨 버린 다음에 바닥에 던져 발로 밟아 뭉갰다. 그것도 호메이니 눈 앞에서! 그리고는 "이제 어떠세요?"라고 물어보기까지 하자 결국 호메이니도 빡쳐서 자리를 떠버렸지만 팔라치도 이에 지지 않고 호메이니와 다시 인터뷰할 때까지 떠나지 않겠다며 자리를 지켰다. 결국 [* 혹은 2시간이란 말도 있다. # ] 다음날의 인터뷰 약속을 받은 다음에야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만만찮은 누님의 패기...~~

두번째 인터뷰 전에, 호메이니 아들이 그녀에게 귀뜸해 주었다. 아버지가 아직도 차도르 건으로 화가 나 있으니 차도르에 대해서는 말도 꺼내지 말라고. 하지만 그럴 그녀였으면 애초에 차도르를 팽개치지도 않았겠지. 그녀는 충고에 아랑곳없이 인터뷰 시작하자마자 차도르 얘기부터 다시 시작했다. 난리가 나나 싶었는데... 웬걸, 호메이니는 씨익 웃더니 껄껄 웃어버렸다고 한다.~~어허허, 이년봐라, 어허허~~ 그녀에게 제발 두번째 인터뷰는 산통깨지 말라며 신신당부하던 아들 아흐메드조차도 아버지를 웃게 만든건 기자가 처음이오라고 말했다고. # --날 웃게한건 니가 처음이야-- 물론 팔라치와 호메이니가 서로를 이해하거나 생각을 바꾼 것은 아니었지만, 이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호메이니가 의외로 인간적인 면 내지는 소탈한 면이 있었다는 의외의 사실이다. [* 사실 어느 독재자나 개인적으로는 소탈하거나 인간적으로는 괜찮은 사람이거나 하는 경우는 수없이 많기 때문에 딱히 의외의 사실인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