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
대한민국의 김대중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이 김정일을 만나서 평양에서 열린 정상회담. attachment:info03217.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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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
남북정상회담이 제안된 것은 1988년이다. 8월 15일 노태우 대통령의 정상회담 제안에 김일성이 용의가 있다고 회답한 것이다.[[1]]
김일성의 회답으로 정상회담을 연다는 것은 일단 남북 간의 잠정적인 합의사항이 되었으나, 세부 사항 논의와 남북관계의 변동, 국내외의 정치적 문제 때문에 실제 회담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지연이 몇년간 계속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김영삼 대통령은 적극적으로 남북정상회담을 열려고 했으며 구체적인 회담 일정까지 잡아두는 진전을 보았다. 1994년에 합의된 일정은 7월 25일 평양에서 연다는 것이었다.[[2]] 그러나 회담일자가 이미 잡힌 상황에서 7월 8일 김일성이 급사~~돌연사~~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3]] 이 시기 김영삼 정부의 목적은 북한에 돈을 주고, 대신에 북한군을 후진배치시킨다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남북간의 성격을 볼 때, 이것이 성사되었을지는 다소 의문.
일단 북한에서는 김일성 사망으로 인한 정상회담의 연기를 통보해왔다. 그 뒤에 북한이 조문을 둘러 싼 한국 내 갈등을 이용해서 좌우간의 편가르기를 시도하자 결국 정부는 조문은 절대 없다라고 강경하게 나섰고, 북한도 우리도 정상회담 안하겠다고 나서서 완전히 무산되게 된다.~~다행이다.~~
제1차
2000년 6월 13일에서 6월 15일까지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과 평양에서 진행한 회담.
2000년 4월 10일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 박지원이 남북정상회담의 예정을 발표했다..[*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거 4일 전인 4월 10일 발표되었다. 이는 수십년의 기득권 상실로 인해 분노하던 영남권에서 역풍을 초래해 영남권에서 여당이 참패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여당의 과반수 확보미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정상 회담 이후 남북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 관광, 북한의 남한 주최 스포츠 경기 행사 참가 등 민간 교류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남북 당국간 회담이 지속됐으며, 북한은 일본, 미국과도 화해 분위기를 유지하며 국교 정상화 교섭에 나섰다. 김정일의 조기 서울 방문도 예견됐으나 국제정세의 급변 등으로 실현되지 않았다.
1948년 한반도가 분단된 이후로, 두 당국의 대표가 처음으로 만난 회담이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향후 남북관계의 초석이 될 6·15 남북 공동 선언을 발표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이 정상회담과 햇볕정책을 통해 한반도 평화를 증진시킨 공로는 생애 전반에 걸친 한국 민주화 운동으로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것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북한에 불법으로 대가성 송금을 한 것이 훗날 밝혀지게 되었다. 자세한 것은 대북송금 사건항목 참조.
제2차
참여정부 수립 이후 임기 초반의 대북송금 특검 등으로 경색된 채 흘러가던 남북관계는 다시 유화 국면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2007년 8월 8일 오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동시에 제2차 남북 정상 회담이 2007년 8월 28일부터 8월 30일에 걸쳐 개최될 것이라 발표했다. 그러나, 2007년 8월 18일 북한은 수해로 인해 회담 일정을 연기할 것을 요청하였고 구체적인 회담 일자 지정을 남측에 일임했다. 이에 남측은 2007년 10월 2일에서 10월 4일 동안 회담을 개최하기로 제안했다.
1차 회담과는 달리 2차 회담에서는 평양개성고속도로를 통한 육로 방문이 합의되었고, 일정 첫 날인 10월 2일 9시 5분 대한민국의 대통령 노무현은 국가 원수로서는 최초로 도보로 군사분계선을 넘어갔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방위원장 김정일은 4·25 문화회관 앞에서 평양으로 들어온 노무현을 맞이했다.
일정 둘째날인 10월 3일 9시 30분 남북 양측 정상은 소수의 배석자를 대동하고 회담을 가졌고, 일정 마지막 날인 10월 4일 양측은 6·15 남북 공동선언에 기초해 남북의 ‘평화와 번영’을 목표로 한 2007 남북정상선언문을 채택했다.
둘째날의 회담에 앞서 노무현은 김정일에게 나전칠기 병풍과 드라마와 영화 DVD, 팔도특산 차 세트를 선물했고, 김정일은 노무현에게 500상자의 송이를 선물했다. 청와대에서는 이 송이를 정치인, 소록도 주민, 실향민 단체 등 사회 각계각층과 나누겠다고 발표했다. 이 때 김정일의 특사로 내려온 것이 바로 박재경인데, 이 사람이 바로 1.21사태때 살아서 북으로 도망친 그 사람이다.
하지만 이 회담에서 실질적인 성과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오히려 북한이 박왕자 씨 피살사건, 대청해전, 천안함 피격사건, 연평도 포격 사태등 군사적 도발을 감행하면서 남북관계는 다시 햇볕정책 이전으로 돌아가 버렸다.
NLL 대화록 논란
2012년 10월 대선정국에서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이 정상회담 대화록을 본 결과 당시 노무현 대통렁이 김정일에게 NLL 포기하는 발언을 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일, 상세내용은 NLL 대화록 논란을 참조.
3차 시도?
2009년 이명박 대통령은 3차 남북정상회담을 은밀히 추진하기 위해 측근인 임태희 당시 국회의원(후에 대통령 실장)을 싱가포르로 보냈고 싱가포르에서 남한의 통일부장관에 해당하는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과 비밀회동을 가졌다고 한다. 이는 비밀로 묻혀졌으나 위키리크스가 미 국무부 기밀자료를 폭로하는 과정에서 이 사실이 드러났고 후에 임태희 실장이 이를 김양건과의 비밀 회동을 시인했다고 한다. 당초는 임태희 의원이 아니라 이기택 평통 수석의장이 김양건과 회동을 가졌다는 보도가 있었으나 평통측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던 상황이었다.
이후 2011년 5월에 김태효 청와대 대외전략기획관등이 베이징에서 북측 인사와 회동해 3차 남북정상회담 추진을 논의했으나 무산되었다. 북한은 다음달인 6월에 국방위원회 대변인의 인터뷰 형식으로 이 회동을 폭로했고 돈봉투를 주면서 정상회담을 애걸복걸했다라고 주장해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때문인지 박근혜 대통령은 남북대화에 비선라인을 동원하지 않겠다고 천명하기도 했으나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감안한다면 과연 비선라인을 배제할수 있을지는 의문. 2013년 6월 12일에 서울에서 남북 장관급 회담이 개최될 예정인데 3차 남북정상회담이 추진될수 있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러나 일단은 개성공단 재가동, 금강산 관광 재개등의 남북한 현안들이 주 의제가 될 전망이라 남북정상회담이 논의될지는 미지수. 그나마도 남북회담이 무산되고 노무현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발언록 전문까지 공개되면 남북관계는 더욱 경색되어서 남북정상회담의 가능성은 거의 없어질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