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

From The Hidden Wiki
(Redirected from 대만)
Jump to navigationJump to search

‘쯔위의 나라’ 대만을 이해하기 위한 8가지 핵심 키워드

2016-01-22

대만 총통 후보인 차이잉원 민진당 후보가 14일 수도 타이베이에서 열린 유세에서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왼쪽) 주리룬 국민당 후보도 15일 타이베이에서 유세 차량에 탄 채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오른쪽) 타이베이/AP EPA 연합뉴스 대만 총통 후보인 차이잉원 민진당 후보가 14일 수도 타이베이에서 열린 유세에서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왼쪽) 주리룬 국민당 후보도 15일 타이베이에서 유세 차량에 탄 채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오른쪽) 타이베이/AP EPA 연합뉴스 [더 친절한 기자들] ‘쯔위 사건’은 한국 사회가 중국과 대만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세계는 한류 등 여러 나라 문화 콘텐츠 소비와 여행 등을 통해 점점 문화권의 벽을 허물고 있다. 특히 동아시아 시민들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지고 있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지배적인 경제적 거래 상대인 중국과 일본에 눈길을 줄 뿐, 대만은 상대적으로 주된 시야 밖에 두고 있다. ‘쯔위 사건’을 계기로 ‘쯔위의 나라’ 대만에 대해 알아야 할 사안들을 8가지 열쇳말을 통해 풀어봤다. 대만은 한국 사회와 꽤 많은 공통점을 가진 나라였다.

일본 식민지

대만은 50년 동안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하면서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대만은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 일본 지배를 거부하는 움직임과 함께 20년 동안 게릴라식 무력 저항을 했지만, 결국 진압됐다. 일본은 총독부를 설치하고 분리통치(divide and rule) 전략을 썼다. 대만 원주민들은 탄압하고, 명나라청나라 출신들을 우대했다. 하지만 조선에 대한 통치보단 유화적이었다는 평가가 있다. 일본은 대만을 무역 중계 거점으로 삼기 위해 사회기반시설 인프라를 조성했다.

대만인들은 식민 지배를 한 일본에 대해 반감보다 호감이 강하다. 식민 지배 당시엔 대만이라는 국가 정체성이 약했고, 대만이 중국의 일부라는 인식이 강했다. 게다가 식민 지배가 종식된 뒤 대만 사회를 통치한 국민당 정부의 폭력 지배와 정치적 억압이 강력한 저항을 낳았다. 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한 기억은 나쁘지 않은 편이다. 일본 문화는 여전히 대만 사회에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본성인’과 ‘외성인’

2015년 7월 현재 대만 인구의 98%는 한족(漢族)이다. 대륙에서 이주해온 이들이 대다수인 셈이다. 애초부터 타이완에 살고 있던 원주민 비율은 2% 정도에 불과하다.

한족은 ‘본성인’과 ‘외성인’으로 나뉜다. ‘본성인(本省人)’은 초기 이주자들이다. 명나라나 청나라 시절 대만에 건너와 터전을 잡았다. 이들의 비율은 전체 인구의 84%를 차지한다.

‘외성인(外省人)’은 장제스의 중국국민당 정부가 중국공산당에 패하면서 대만으로 밀려온 1949년 전후에 대만으로 함께 건너온 사람들을 일컫는다. 이들은 전체 인구의 14% 정도를 차지한다. 상대적으로 교육과 소득 수준이 높은 외성인들은 인구가 적음에도 중국국민당 정부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고급 관리직 대부분을 차지하는 등 기득권층을 이뤘다. 게다가 1947년 발생한 2.28 사건을 계기로 본성인과 외성인 간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대만판 ‘광주민주화항쟁’ 2.28사건

대만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다. 일본의 식민지배 이후 공산당에 쫓겨와 대만 통치를 시작한 국민당 정부는 정부의 허가없는 담배 판매를 금지했다. 하지만 1947년 2월27일 타이베이에서 밀수 담배를 판매하던 린쟝마이(林江邁)라는 여성이 공무원에게 단속되면서 소총 개머리판으로 심하게 가격당해 중상을 입었다. 주변 시민들이 항의하자 공무원은 발포했고, 본성인 학생 한 명이 사망했다. 2월28일 분노한 군중들이 봉기했고, 경찰서를 공격했다. 군과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기관총을 발사했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시위가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국민당 정부는 사태를 진정시키길 원했고, ‘2.28 사건 처리위원회’를 구성했다. 처리위원회는 공정하게 사건을 조사하면서 시민들의 지지를 얻었고, 대만의 자치와 인권보장을 요구하는 ‘32개조 요구’를 내밀었다. 하지만 3월8일 대륙의 국민당 군대가 대만에 도착했고, 대대적인 유혈 진압이 시작됐다. 처리위원회 인사들이 상당수 처형됐고, 본성인들도 대대적으로 학살당했다. 학살은 5월까지 진행됐다. 이 사건은 이후 40년 가까이 언급되지 못하다, 1992년에 이르러서야 <2.28 사건 연구 보고>라는 정부 보고서를 통해 공식화했다. 희생자가 3만명에 달한다고 추산됐다. 허우 샤오시엔 감독 연출과 양조위 주연의 1989년작 영화 <비정성시(悲情城市)>는 2·28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양안 관계

양안(兩岸) 관계는 분단국가인 대만과 중국의 관계를 말한다. 타이완 해협을 사이에 두고 중국 대륙(서안)과 대만(동안)으로 마주보는 관계임을 일컫는 용어다. 대만이 국제 사회에서 공식적인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양안 관계라는 말로 두 나라 사이를 표현한다. 1971년 유엔총회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을 대표하는 유일한 국가로 인정됐고, 대만은 유엔에서 탈퇴했다. 대만은 올림픽에 출전할 때도 국기인 청천백일만지홍기와 대만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없다. 그래서 올림픽용 깃발과 차이니즈 타이베이(Chinese Taipei)란 명칭을 사용한다.

92 컨센서스(九二共識)와 ‘창조적 모호성’

1987년 대만 정부가 중국 대륙에 있는 이산가족들을 만날 수 있도록 가족 방문을 허용하면서 대만과 중국이 대화를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여러 가지 행정적인 협의가 필요하게 됐고, 1992년 10월 홍콩에서 협상을 했다. 하지만 중국 대표단은 이 자리에서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라”고 주장했고, 대만 대표단이 이를 받아들여지지 않자 협상 도중 베이징으로 귀국하면서 협상이 결렬됐다. 하지만 이후 몇 년 동안에 걸쳐 협상을 진행하면서 중국 대표단은 이런 ‘합의’ 사항을 요구했다.

“좋다, 하나의 중국이다. 우리는 중화인민공화국, 너희는 중화민국. 중화민국을 인정할 순 없다. 다만 하나의 중국은 합의하고, 그 중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각자 알아서 정의하도록 하자.”

합의를 한 건지 아닌 건지도 모호한 이런 상황에 대해 학계에선 ‘창조적 모호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모호하지만, 어쨌든 서로 돌파구가 생긴 셈이다.

‘92 컨센서스’라는 용어가 공식화한 건 2000년 들어서다. 50년 넘게 대만을 통치해 온 국민당 정부가 2000년 초반 야당인 민주진보당(민진당)의 천수이볜에게 정권을 내줬다. 대만 사상 첫 번째 정권교체였다. 민진당은 ‘대만독립’을 내세우는 정당이기 때문에, 중국과의 관계를 우선시하는 국민당 정부의 마지막 대륙위원회(한국의 통일부 격) 수치(蘇起) 주임위원(장관급)이 이를 막기 위해 ‘92 컨센서스’ 개념을 공식화한 것이다. ‘92 컨센서스’는 한자로 ‘92공식(九二共識)’이라고 쓴다. 양안 관계의 공동인식이라는 뜻이다.

해바라기 운동과 입법원 점거

차이잉원을 압도적인 총통 당선자로 등극시킨 이번 대만 총통 선거는 직선제로 치러진 선거 가운데 가장 낮은 투표율(68%)을 기록했다. 하지만 젊은층의 열기는 뜨거웠다. 18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대만 양안정책협회의 온라인 조사 결과를 인용해 134만명의 청년층이 ‘쯔위 사건’ 영향으로 투표 참여를 결정했거나 투표 의향을 바꿨다고 보도했다. 차이잉원 당선자가 얻은 689만표 가운데 19.5%가 ‘쯔위 사건’에 격분한 젊은층의 몰표일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쯔위 사건’ 이전부터 대만은 이미 국민당 마잉주 정부에 분노하고 있었다. 시발점은 따로 있었다. 2014년 대만의 경제성장률은 1%에 그쳤고, 실업률은 4%에 육박했다. 이런 와중에 2014년 3월 집권당인 국민당이 의회에서 중국과의 무역협정인 ‘양안서비스무역협정(CSSTA)’ 비준안을 날치기 통과시키면서 대학생들이 분노해 봉기했다. 대학생 등 300여명이 한국의 국회 격인 입법원을 3주 동안 점거하고 저항했다. 대만인들은 중국과의 경제협력 경험을 통해 교류 협력이 늘어나도 결국 이익을 보는 이들은 이미 권력이 있고 부를 축적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잠정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운동은 입법부 접수에서 멈추지 않았다. 3주에 걸친 입법원 점거가 끝난 뒤 운동에 참여했던 청년들은 운동을 이어가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지속적인 시민운동과 정당 정치활동, 농·어민 조직과의 협력 노력 등이 그것이다. 청년들은 지방에 마을 단위 농회(한국의 농협)를 돌아다니며 중국의 정책이 대만에 재앙이 되는 데 있어, 농·어민들과 자신들의 처지가 다르지 않음을 설득했다. 이런 요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영향력을 행사해 대만을 움직였다.

증가하는 대만인 정체성

앞서 말했듯 대만인들의 다수는 대륙에서 건너온 본성인 혹은 외성인이다. 이 때문에 이들은 대만인이면서도 중국인이라고도 생각하는 경향이 컸다.

대만은 1992년부터 정부 차원에서 국립정치대학교에 위탁해 매년 1만명을 샘플로 뽑아 정체성 조사를 한다. 1996년 조사에서 자신이 ‘대만인이기도 하고 중국인이기도 하다’고 답한 사람은 49.3%로 다수였다. ‘대만인일 뿐 중국인이 아니다’라고 답한 사람은 24.1%였고, ‘중국인일 뿐 대만인이 아니다’라고 답한 사람은 17.6%였다.

19년이 지난 2015년 조사 결과, 이제는 ‘대만인일 뿐 중국인이 아니다’라고 답한 사람이 59.0%로 다수가 됐다. ‘대만인이기도 하고 중국인이기도 하다’고 답한 사람은 33.7로 줄었고, ‘중국인일 뿐 대만인이 아니다’라고 답한 사람은 3.3%로 대폭 줄었다.

차이잉원과 노무현

민진당의 차이잉원 대만 총통 당선자는 할머니가 대만 산악지역에 살아온 원주민 파이완 족이고, 부친 쪽 조상은 청나라 시절 중국 푸젠성에서 대만으로 이주해온 객가(客家) 출신 본성인이다. 차이잉원은 선거 과정에서 외성인들과 구분 짓기 위해 “객가의 딸이 총통이 되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차이잉원은 교수 출신 관료다. 대만국립정치대 법대 교수로 리덩후이 전 총통의 법률 고문을 지냈다. 2000년 중국 관계를 다루는 행정원 대륙위원회 주임위원으로 공직에 입문했다. 4년 동안 중국과 협상 테이블을 열면서 외교 관계를 직접 경험했다. 민진당 출신 최초의 총통인 천수이볜이 부패 혐의로 위기에 몰린 2008년 당의 주석이 됐다.

차이잉원의 민진당은 최초로 정권 재창출과 함께 입법원 다수당도 차지했다. 민진당은 입법원 정원 113석 가운데 반이 넘는 68석(종전 40석)을 차지했다. 청년층의 지지를 받은 ‘시대역량(時代力量)’의 의석 5석 등을 합치면 의석 3분의 2 지배까지 넘볼 수 있다. 천수이볜 시절엔 정권은 잡았지만, 입법원에선 소수당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참여정부도 정권 재창출과 함께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국회 다수당 획득을 함께 경험했다.

차이잉원 총통 당선자는 19일 새 정부 출범 이후 국민당의 자산을 나라에 귀속시키는 작업을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차이잉원 당선자의 측근들은 국민당의 자산이 대만을 식민 지배했던 일본으로부터 받은 것이거나 국민당이 독재하면서 축적한 것이어서 몰수하는 게 맞다고 보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임기 초반 과거사 진상규명을 추진했고, 열린우리당이 과거사 진상규명법을 4대 쟁점법안 중 하나로 꼽은 바 있다.

하지만 차이잉원 당선자는 경제적 의존도가 큰 중국과의 관계를 ‘현상유지’하면서 침체된 대만 경제를 살리고, 청년과 저소득층의 복지 문제까지 챙겨야 하는 복잡한 과제를 안게 됐다. 문제는 민진당이 경제 복지 정책 측면에서 국민당과 별반 차별점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민진당이 경제적으로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할 수 있을지가 정치 격변기 대만의 미래를 점칠 수 있는 키워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설명을 들으려면 :[디스팩트 시즌2] ‘쯔위의 나라 대만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도움 말씀 및 참고 자료

장영희 한국외대 대만연구센터 연구원(국립대만대학교 국가발전연구소 박사과정)

서울신문 : [차이잉원 시대의 대만] <상> 양안관계 어떻게 되나

프레시안 : 차이잉원 시대의 양안 관계, 걱정된다

경향신문 : 홍콩 ‘우산’·대만 ‘해바라기’ 연대할까

연합뉴스 : “차이잉원도 쯔위처럼 ‘나는 중국인’ 발언한 적 있다”

한겨레 : 외유내강 차이잉원은 대만의 메르켈

한겨레 : “경제회복과 세대갈등 해소가 숙제”

내외뉴스통신 : [허영섭] 타이베이에 엄습한 대륙 먼지바람

헤럴드경제 : 대만 민주당 새 총통 “친일과 독재로 모은 국민당 자산 몰수“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727415.html

개요

Template:중화민국 표 중화민국(Template:Zh, 주음부호: ㄓㄨㄥㄏㄨㄚˊㄇㄧㄣˊㄍㄨㄛˊ)은 동아시아에 위치한 공화국이다.

1912년 신해혁명 이후 중국 대륙에 세워진 공화국이다. 건국 초기에는 내분과 외침 등으로 인해 불안하였고, 1949년 국공 내전으로 영토의 상당 부분을 중화인민공화국에게 잃어 타이완 등 몇가지 도서 지역만을 통치하는 상태로 현재에 이른다.


중화민국은 1912년 쑨원신해혁명으로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세워진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이며, 중화민국 헌법은 정치적인 진통을 겪다가 1947년에서야 공포되었다. 국공 내전1949년 10월 1일마오쩌둥을 위시한 중국 공산당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한 이후에 기존의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는 타이베이 시로 이전했으며(국부천대), 중화민국의 실질적인 영토도 타이완(타이완 성 포함) 및 푸젠 성 일부로 축소되었지만 현재까지 안정적으로 국가를 유지해오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중화민국의 영토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타이완17세기청나라푸젠 성에 속했던 지역으로, 1885년에는 푸젠 성으로부터 분리된 타이완 성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94년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였고, 이로 인해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만주, 펑후 제도와 함께 일본 제국에 할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1945년만주타이완, 펑후 제도를 중화민국의 영토로 수복하게 되었고, 1947년 공포된 중화민국 헌법에 따라 타이완 성이 다시 설치되었다.

1949년 중국 공산당과의 국공 내전의 영향으로 중국 국민당난징 시에 있던 중화민국 정부를 타이베이 시로 이전하였고, 1955년을 기해 중국 본토에 대한 통치권을 완전히 중화인민공화국에 빼앗김에 따라 중화민국 정부 소재지인 타이완은 더 이상 중국의 변두리 지역이 아닌 중화민국의 중심 무대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이 나라는 통상 타이완(臺灣, Taiwan; 대만)으로 불리기도 한다.

1949년 이래 국공 내전을 계기로 중국은 이념을 달리한 두 정부로 분단되었고, 따라서 이 나라와 중국 대륙에 있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를 흔히 양안이라고 일컫는다. 중화인민공화국은 1949년에 중화민국이 멸망하였으므로 중화민국이 가진 모든 권리의 승계를 주장하고 있으며, 반대로 중화민국은 중화인민공화국중국 공산당의 반란으로 세운 불법 정권으로 간주하여 본토 수복을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재통일에 관한 문제는 타이완 독립 세력까지 존재하고 있어 더욱 복잡한 양상이다.

명칭

[[파일:Flag of Chinese Taipei for Olympic games.svg|thumb|200px|left|중화 타이베이 올림픽위원회기]] 정식 국호는 중화민국(中華民國{{#if:| {{#if:Template:Lang/도움말 고리|[[[Template:Lang/도움말 고리|*]]]}}|}}Template:일반 기타)이며, 자국 내에서는 타이완(台湾)이라고 부른다. 중국(中國{{#if:| {{#if:Template:Lang/도움말 고리|[[[Template:Lang/도움말 고리|*]]]}}|}}Template:일반 기타)이라는 명칭은 사용하지 않는다. 또 영어로는 Republic of China, 약칭은 ROC이다. 그러나 1971년 중화민국이 유엔 회원국 지위를 잃은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중국으로 부르는 빈도가 훨씬 많아지면서, 통상적으로는 중화민국의 현재 남아있는 영토 중에서 가장 중심적인 지명을 따서 타이완(대만, {{#invoke:Langname|link|code=en}}{{#if:|·{{#invoke:Langname|link|code={{{l2}}}}}}}{{#if:|·{{#invoke:Langname|link|code={{{l3}}}}}}}{{#if:|·{{#invoke:Langname|link|code={{{l4}}}}}}}: Taiwan{{#if:| {{#if:Template:Lang/도움말 고리|[[[Template:Lang/도움말 고리|*]]]}}|}}Template:일반 기타, {{#invoke:Langname|link|code=zh-TW}}{{#if:|·{{#invoke:Langname|link|code={{{l2}}}}}}}{{#if:|·{{#invoke:Langname|link|code={{{l3}}}}}}}{{#if:|·{{#invoke:Langname|link|code={{{l4}}}}}}}: 臺灣{{#if:| {{#if:Template:Lang/도움말 고리|[[[Template:Lang/도움말 고리|*]]]}}|}}Template:일반 기타)이라고 부르는 일이 더 흔해졌다. 과거 냉전시절 미국이나 대한민국 등 친서방 국가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중공(中共, Communist China)과 구분하기 위하여 자유중국(自由中國, Free China) 또는 중국(中國, China)이라고도 불렀으나 탈냉전 이후부터는 빈도가 감소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하나의 중국 원칙을 주장하며 타이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으며 중화민국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1983년 6월 26일, 덩샤오핑 이론에 따라 중화인민공화국 타이완 특별행정구(中华人民共和国台湾特别行政区)<ref>台湾特别行政区</ref>라는 이름을 제시하였고, 타이완 지구홍콩, 마카오와 같은 자국의 특별행정구처럼 간주하고 있다. 이런 중국의 압력에 의하여, 중화민국은 중화 타이베이(Chinese Taipei, 中華臺北{{#if:| {{#if:Template:Lang/도움말 고리|[[[Template:Lang/도움말 고리|*]]]}}|}}Template:일반 기타 또는 中華台北{{#if:| {{#if:Template:Lang/도움말 고리|[[[Template:Lang/도움말 고리|*]]]}}|}}Template:일반 기타)라는 별칭을 1980년대부터 올림픽 등의 국제 대회나 국제기구 등에서 사용하고 있다. 단, 세계 무역 기구(WTO)에서 중화민국의 가맹 명칭은 타이완·펑후·진먼·마쭈 개별관세영역(臺灣·澎湖·金門·馬祖 個別關稅領域; Separate Customs Territory of Taiwan, Penghu, Kinmen and Matsu{{#if:| {{#if:Template:Lang/도움말 고리|[[[Template:Lang/도움말 고리|*]]]}}|}}Template:일반 기타; 台澎金馬個別關稅領域{{#if:| {{#if:Template:Lang/도움말 고리|[[[Template:Lang/도움말 고리|*]]]}}|}}Template:일반 기타)이다.

2008년 6월 4일 어우훙롄(毆鴻煉) 중화민국 외교부장은 국제기구 등에서의 '중화 타이베이(Chinese Taipei, 中華臺北)'를 적극적으로 사용할 방침이라고 밝혔다.<ref>대만, '대만, '차이니스 타이베이'로 명칭 변경</ref> 반면 중화민국 감찰원에서는 중화민국 행정원의 정부 문서에서 ‘대만’의 사용 빈도가 높아진 것을 지적하였으며 ‘중화민국’이라고 명시해야 한다고 밝혔다.<ref>Control Yuan chastises use of ‘Taiwan’</ref>

역사

Template:참조 Template:중국사

베이징 정부기

Template:본문 1911년 우창 봉기를 계기로 신해혁명이 일어났다. 혁명에 참여한 단체들은 쑨원을 임시대총통으로 삼았으나, 위안스카이에게 대총통 자리를 양보하였다. 그러나 권력욕에 가득 찬 위안스카이중화제국을 선포한다. 일본 제국이 요구한 21개조 요구를 계기로 5·4 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위안스카이는 제정을 폐지하였으며, 대총통 자리에서도 물러났다. 쑨원장제스를 중심으로 한 중국 국민당중국 공산당과 손을 잡고 광저우 시에 새로운 중화민국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후 북벌 과정에서 장제스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원을 축출했다.

난징 정부기

Template:본문 북벌을 완료한 장제스중국 국민당은 중화민국의 수도를 난징 시로 천도한다. 점차 정부의 권력이 중국 국민당에 집중되면서 국민당의 일당 독재가 시작된다. 이에 대항해 중국 공산당장시 성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세웠으나, 3년만에 제압된다. 그 후 일본 제국만주 사변을 일으키고, 중일 전쟁이 시작된다. 이 때문에 중국 본토 전체가 전장이 되었다. 1937년 수도 난징일본 제국에 점령당했다. 국민정부는 난징을 탈출, 충칭 시로 도피했다. 일제는 난징 대학살을 일으킨다. 1940년에는 친일 성향의 신정부가 왕징웨이에 의해 수립된다. 그러나 분전 끝에, 결국 일본 제국중국 본토에서 몰아내고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 된다. 중화민국은 유엔에 가입하여,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이 된다.

국공 내전

중국 국민당중국 공산당중일 전쟁에서 국공 합작을 맺고 일본 제국에 맞서 함께 싸웠다. 일본 제국의 패망 후 양 당은 공동의 적을 잃었기 때문에 양 당 사이의 내전 가능성이 계속 제기되었다. 하지만 양 당은 미국, 소비에트 연방의 중재로 쌍십협정(雙十協定)을 맺음으로써 화해하는 듯 했다. 하지만 미국중국의 내정에 중립을 표방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중화민국 정부와 중국 국민당을 지원했으며 소비에트 연방 또한 국민당을 지원하고 공산당을 지원하지 않는다는 협정을 국민 정부와 체결하면서도 비밀리에 중국 공산당을 지원하였다. 결국 국민당은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난징 시에서 공산당을 배제한 채 1947년 정부를 재수립했으며 공산당이 이에 반발하면서 중국 곳곳에서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국민당은 결국 공산당에 대한 총공격을 감행하였지만 공산당의 끈질긴 노력과 국민당에 등을 돌린 중국 인민의 민심, 전략의 실패, 그리고 경제 정책의 실패 등 여러가지 악재로 인해 중국 본토를 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에게 내주고 타이베이로 정부를 이전한다.

국부천대 이후

1949년 국공 내전으로 인하여 난징에 있던 중화민국 정부를 타이베이로 이전한 장제스 총통은 중국 공산당과의 대립을 이유로 국가적인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사 독재를 펼친다. 중국 대륙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후 타이완으로 거점을 옮긴 중화민국은 미국과의 협정을 통해 약 30년 간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이룩하여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1971년 유엔 총회 결의 제2758호에 따라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지위뿐만 아니라 국제 연합 내에서의 '중국' 대표권을 모두 중화인민공화국에게 빼앗겼고, 연이어 전세계의 냉전 체제가 해빙기를 맞으면서 미국을 위시한 제1세계 국가들이 점차 중화민국 단교를 전제로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함으로써 중화민국은 외교적으로 고립되기 시작했다.

세계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향력이 급속히 확대되면서, 중화민국의 실지 수복은 사실상 요원해졌다. 이에 타이완 토착세력인 본성인을 중심으로 '탈중국화'를 주장하는 세력이 태동하였고, 현재 중화민국의 내정은 중국 통일을 추구하는 보수적인 범람연맹과 타이완의 새로운 주권 국가를 추구하는 진보적인 범록연맹으로 양분되었다. 이런 갈등은 본성인외성인 간의 갈등으로 비화되어 심각한 사회적 문제까지 야기하고 있는 상황이다. 1992년부터 중화민국 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92컨센서스'(92共識)에 따라, 통일이나 독립을 추구하지 않으며 무력을 사용하지도 않는다는 원칙인 이른바 3불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타이완 공화국을 염원하는 세력의 거두인 민주진보당천수이볜이 집권하여 정책적으로 추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중화인민공화국2005년 반분열국가법을 제정하여 하나의 중국을 벗어나 독립을 선언하면 무력 침공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견지하였다. 리덩후이천수이볜총통으로 재임하던 시기에는 양안 관계가 냉각되는 경향이 있었지만, 홍콩 출신인 중국 국민당 마잉주(馬英九: 마영구)가 총통으로 재임하는 시기에는 양안 관계가 조금씩 개선되는 편이었다.

아래는 1949년 국부천대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주요 사건을 정리한 것이다.

정통성 논쟁

Template:본문 내전으로 분단된 이래 이념을 달리한 양 정부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고수하며, 각자 중국을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주장하고 있다.

1945년 10월 25일에 창설된 유엔에서 중화민국은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지위를 가진 주요 회원국이었다. 그러나 국공 내전으로 인해 중국 공산당이 건국한 중화인민공화국을 지지하던 당시의 공산주의 국가들은 “유엔 헌장 서명국이자 제2차 세계 대전 승전국인” 중국의 법통은 중화인민공화국에게 승계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유엔1971년 10월 25일 개최된 총회에서 표결하여 2758호 결의가 채택되었고, 중화인민공화국은 중화민국이 가지고 있던 유엔 내 중국 대표의 모든 권리와 지위를 취득하였다. 유엔을 탈퇴한 중화민국은, 이 결의 채택으로 말미암아 유엔 내부뿐만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중화민국에게 불리한 조건에 놓이는 상황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반면 타이완 지역의 본성인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점차 확대됨에 따라, 기존의 중화민국이 아닌 타이완 공화국을 건국하려는 움직임이 등장하였다. 특히 이러한 움직임은 민주진보당천수이볜이 야당 출신 후보 중 최초로 총통에 집권했을 때 급진하였으나, 중국 국민당마잉주로 정권이 교체되고 전임 총통인 천수이볜이 부정비리에 휩싸여 구속되는 등의 사건을 거치면서 이러한 탈중국화 운동은 지지도가 다소 감소하였다.

정치

정부

중화민국의 정부는 입법원, 행정원, 사법원, 감찰원, 고시원으로 나뉘는 오권분립체제를 취하고 있다.

타이완 지구의 행정 구역

Template:본문 1949년 이후로 중화민국 정부는 자국의 영토를 크게 실효 지배 지역인 타이완 지구와 ‘미수복 지역’인 대륙 지구로 구분하고 있다. 또한 1991년 5월 1일 헌법을 개정해 정부 실효 통치 국토를 "자유 지구"라고 이름 붙이고, 헌법의 적용 지역을 "자유 지구"로 한정하고 있다. 타이완 지구에는 중화민국 정부의 실효 통치 지역인 타이완 섬펑후, 행정구역상 푸젠 성에 속하는 진먼, 마쭈 등의 섬들이 포함된다. 중화민국은 국내를 성(省)과 직할시(直轄市)로 구분하여 각각 지방 정부를 두고 있다. 다만 1949년 이후 중앙정부의 통치 구역과 타이완 성 정부의 통치 구역이 거의 겹치게 되었기 때문에 성 정부의 기능은 사실상 폐지되었다. 현재도 성 정부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중앙 정부가 직접 현(縣)을 관할한다.

강역

Template:본문 중화민국은 1912년 기준 청나라의 공식적인 영토를 자국의 국토로 규정하고 있으며, 총 면적은 11,418,174㎢이다. 그에 반해,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영토의 면적은 9,596,960㎢, 타이완 섬만의 면적은 35,195 km²이다. 중화민국은 공식적으로는 실지(失地)인 중국 대륙을 포함한 국토 전역에 대한 통치권을 계속 주장해오고 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이 외국과 체결한 모든 국경획정조약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대륙에는 중화민국 정부의 실효 통치 지역이 아니지만 중화민국의 영토로 간주되는 중국 본토, 몽골, 투바 공화국 등이 포함된다.

대외 관계

Template:본문

외교 관계를 맺고 있는 국가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공식적인 외교 관계 수립에 있어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 중 하나를 택일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중인 미국일본 등은 중화인민공화국을 견제할 목적으로 중화민국과의 교류 관계를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다.

현재 중화민국은 아프리카 3개국, 유럽 1개국, 오세아니아 6개국, 중남미 12개국의 총 22개국과 공식 외교관계를 맺고 있다.
(나라 이름 우측상단의 별표는 타이완 현지에 대사관이 설립된 국가를 나타낸다.)


아프리카 (3개국)


유럽 (1개국)


오세아니아 (6개국)

중앙아메리카 (6개국)


카리브 제도 (5개국)


남아메리카 (1개국)

외교 문제

  • 영토 문제: 중화인민공화국과 마찬가지로 센카쿠 열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중화민국은 센카쿠 열도가 타이완 성 이란 현에 속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남중국해에 위치한 스프래틀리 군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 타이완 문제 (대만문제) : 현재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은 타이완 문제에 처해 있다. 이 문제의 원인은 국공내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9년 전쟁에서 패배한 중화민국 정부는 타이완으로 후퇴하여 타이베이로 이전하였고, 무력을 통한 대륙 재탈환을 위한 준비를 계속하였다(이 정책은 1980년대까지 계속된다). 그 후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은 제7함대를 타이완에 파견하고 1954년에는 국민정부와 공동 방어 조약을 체결하였다.(이 조약은 1979년에 파기되었고 그 이후에는 타이완 관계법이 대신하고 있다.) 서로 다른 체제로 인해 상호 간에는 어느 정도 불신이 존재하며, 중화민국은 자신들이 대륙을 재탈환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중국 국민당은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제3차 국공합작을 통한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반면, 민주진보당은 실지수복을 포기하고 타이완만의 독자적인 국가로 전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타이완 독립 운동은 타국의 지배에서 독립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본토에서 건너 온 중화민국 정부의 국명, 국기, 국가 등을 변경하여 중국에서 완전히 탈피하는 성격이다.) 2000년대 이후 민주진보당의 집권에 따라 타이완의 독립을 위한 여러가지 정책들이 행해졌으나, 2008년에 중국 국민당의 마잉주(馬英九)가 총통으로 취임하면서 사실상 중단되었다.


대만의 반한성향 및 친일성향

한국이 반일성향이 강한데 비해 대만의 친일적 성향이 강한 이유는 일제시대의 통치스타일의 차이에 기인하는 부분이 크다.

사실 동아시아에서 선진화된 지역으로 여겨질만한 곳이 일본, 한국, 대만 정도인데, 공교롭게도 이 세 나라는 구일본제국 시절 영토 및 준영토 로 여겨지던 제국 핵심부 국가들이다. 이들이 선진국화 된 이유는, 애초에 영미 해양패권의 일부이던 일본이 2차대전후 자멸한 후, 다시 대륙계 국가들과 분리되어 전전처럼 미국의 우산 밑으로 들어가면서 함께 끌려 들어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세 국가는 상당히 밀접하게 얽히고 섥혀 있는데, 두 국가의 대일관이 상당히 차이가 난다.

우선 대만을 보면, 일본에게 있어 대만이란 영토는 사실 청제국에게서 약탈해낸 첫번째 전리품이라는 상징성 외에는 별다른 효용가치가 없었다. 단지 섬나라 일본에게 섬 하나가 더 추가되었을 뿐 이란 개념이 강했다. 그래서 일본정부는 제국 국책사업에서 대만이 얽히는 경우가 적었기에, 정치가 행정가 출신의 관료들을 총독으로 보내 자율통치를 맞기는 실험장 처럼 대우했던 것이다.(심지어 만주국의 경우보다 더 유연했다.)

반면 조선의 경우는 대만의 경우와 달리 상당히 다른 정책들을 고수하였다. 고산족 원주민과 다수의 한족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대만섬에 비해 조선반도는 단일민족으로 수천년을 지속되어 온 별개의 민족국가로, 언어 문화 모든것이 중국과 크고작은 차이가 있었고, 그 차이의 일부는 일본과 교집합 관계에 있는 부분도 많았다. 일본의 국책사업인 대륙으로의 팽창은 제국이 사활을 걸고 매진하던 사업이었고, 만주국 건국 이후에 조선의 군사적 필요성이 눈에띄게 저하 되었음에도 거의 일본 본토와 비슷한 인력착취와 수탈이 조선반도에서도 이루어졌던 이유는 내선일체라는 당시 슬로건들로 비추어볼 수 있듯 조선을 일본과 한 몸으로 여겨 똑같이 전시동원의 도구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즉 일본제국의 필사의 국책사업인 대륙 팽창정책에 있어 당시 일본 인구의 70%에 달하는 인구대국 조선의 잘 훈련된 인력이 일본에 있어 본토의 노동력과 거의 비슷하게 동원대상으로 낙점됐다는 의미이며, 대륙침략의 첨병 역할을 조선인들에게 담당케 하려는 의도가 강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일본의 모든 전쟁 프로퍼겐더, 일본제국주의적 황도사상 등이 조선인에게 본토인들 못지 않게 강하게 노출되었고, 전쟁 말쯤 되면 조선인은 거의 일본인과 비슷한 수준으로 변모되어 버리고 말았다.

일본이 그토록 조선인에게 강요하던 전체주의, 극단적 민족주의적 사고는 그대로 한국인의 사고에 잔존하게 되었고, 이것이 친일 군사독재기간을 거쳐 경제재건시 순기능적으로 작용한 부분도 많았지만, 일제시대간 일본인의 조선인에 대한 무분별한 동원과 학대행위의 역사가 학습된 민족주의에 부채질을 하여 상대적으로 일본의 전시동원 및 정치선전의 영향으로 부터 자유로웠던 대만에 비해 훨씬 강경한 한국의 반일심리를 낳게 되었다.

군사

[[파일: Template:본문

중화민국 헌법 제 20조의 규정에 의해 중화민국에서는 징병제를 실시하고 있으므로, 만 19세 이상의 남자에게는 12개월간의 병역 의무가 주어져왔으나, 2010년부터 모병제 전환을 시작하였다. 국군인 중화민국 국군은 정규군 약 30만 명, 예비역으로 약 350만 명의 병력을 포함하며, 정규군은 육군 20만 명, 해군 4만 5,000명, 공군 4만 5,000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기로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침공을 대비해 수는 적으나 CM11 전차나 F-16 파이팅팰콘, UH-60 블랙 호크, 패트리어트 요격시미사일 등 최신 무기로 무장해있다. 그 외에 종교적 또는 개인의 비폭력주의 신념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는 양심적 병역 거부는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 심사를 거쳐서 허용하고 있으며, 현재 중화민국 정부에서는 신념에 의한 병역거부자들에 대해 양로원 등의 사회 복지 시설에서의 사회 봉사로 군복무를 대체하도록 하되, 합숙 생활을 하도록 하고 있다.

정부를 타이완으로 이전한 이래,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군사적 대립으로 인하여 중화민국 국군은 최신예 개인 화기, 군용기, 군용선 등을 운용하고 있으며, 2008년도의 국방 예산은 GDP의 약 2.5%에 상당하는 105억 미국 달러에 이른다. 다만 최근에는 국방 관계 예산의 삭감이 이루어져서 정부는 특별 예산을 짜는 등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중화민국 국군의 가장 중요한 군사기지는 중국 연안의 진먼 현이다.

미국과의 단교 이후 미국과의 상호방위조약이 폐기되고 타이완 주둔 미군이 철수했지만, 미국은 대만관계법(Taiwan Relations Act)을 제정하여 첨단 무기를 판매하고 군사훈련에 미군을 참관시키는 등 군사협력관계를 간접적으로 계속 유지하고 있다.

지리

Template:본문 thumb|right|인공위성에서 찍은 타이완 국공 내전 이후부터는 사실상 중화민국 영토 중에서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게 된 타이완 섬의 대부분은 산지 지형이며, 서해안의 평지에 인구가 밀집되어 있다. 가장 높은 산은 타이완 섬 중앙부에 위치한 위 산(玉山)으로, 높이는 3,952 m이다.

한편, 진먼 현마쭈 열도중화인민공화국이 통치하는 중국 대륙의 해안에 근접하고 있어 군사적으로 긴장감이 높은 편이고, 고도로 요새화된 지역이다.

둥사 군도와 난사 군도의 타이핑 섬남중국해에 위치하며, 모두 무인도이다.

경제

Template:본문 [[파일:Forbys Taipei 101.jpg|thumb|left|타이베이 101 ]] 타이완 지역은 비옥한 토지와 온난한 기후의 혜택을 받아서 농업에 적절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중국 본토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토지로 인해 이주해 왔다. 청조 시기와 일제 시대에 걸쳐서, 타이완(대만)은 그 높은 농업 생산성을 기반으로 하여 경제적 지위를 서서히 계속 확립했다.

1945년 중화민국으로 반환된 이후, 타이완은 농업 사회에서 공업 사회로 옮겨가기 시작하였고, 특히 1960년 이후의 급속한 공업화로 인해 신흥공업경제지역(NIES)의 일원이 되었다. 중국 본토로부터 타이완으로 이전한 중화민국 정부는 정치적 안정을 도모함과 동시에, 강력하게 경제 개발 정책을 추진했다. 수출 지향 산업을 중심으로 하는 공업화 정책이 추진되어, 1973년에는 "십대건설(十大建設)"이라는 중공업의 계획적 개발이 실시되었다. 특히 인프라스트럭쳐의 정비, 철강, 조선, 석유화학 산업의 육성이 중요 과제로 실시되어, 결과적으로 오늘날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 발전이 이루어졌다. 국내의 노동자 임금이 상승하면서 많은 기업들이 공장을 중국 본토동남 아시아 등 저렴한 노동력이 풍부한 지역으로 이전하였으며 동시에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국내로 유입되었다.

2002년 1월에 중화민국은 타이완·펑후·진먼·마쭈 개별 관세 영역(Separate Custom Territories of Taiwan, Penghu, Kinmen, and Matsu)라는 이름으로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여, 세계의 자유 무역 체제와 일체화되었다. 그 결과 도상국 및 도상 지역 특례를 이용할 수 없게 되어, 무역 관련 제도의 개선, 관세의 인하, 서비스, 무역의 자유화 등 더 많은 노력이 요구되고 있다. 2014년의 국내총생산(GDP)는 약 5,295억 미국 달러, GDP 성장률은 3.5%였다. 2014년 중화민국의 1인당 구매력평가(PPP) 환산 국내총생산(GDP)은 45,854 미국 달러에 달한다. 이 수치는 스웨덴, 독일과 비슷하며, 아시아에서는 카타르, 싱가포르, 브루나이,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 홍콩, 사우디아라비아, 바레인에 이어 9번째로 높다. 반면에 1인당 명목 GDP는 아시아에서 11번째로 높은 22,598 미국 달러(2014년) 정도에 불과하다.

현재 중화민국의 통화 단위는 신 타이완 달러이며 (TWD, New Taiwan dollar), 통화의 발행은 중화민국 중앙은행이 맡고 있다.

제1차 산업

농업타이완 섬 서해안의 비옥한 평야 지역에서 주로 발달했다. 전체 토지의 24%가 곡물 재배에 적합하다. 사탕수수의 수확량이 많으며, 그 밖에 옥수수, 고구마, 아스파라거스, 버섯류, 대두, 땅콩, , 바나나, 파인애플, 감귤류 등 많은 농산물이 생산되고 있다. 최근 일본 등의 국가로의 농산물 수출이 증가하고 있다. 가축으로는 돼지, 물소(이전에는 농경용), , 산양, , 오리 등이 상업용으로 사육되고 있다. 국토의 약 60%가 삼림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목재는 그리 풍부하지 않다. 주로 오크, 개잎갈나무, 대나무, 코늄(Conium), , Rattan) 등이 산출(産出)되지만, 수요의 대부분은 수입재에 의존하고 있다. 한편, 어업근해어업원양어업이 전체 어획고의 80%를 차지하며, 나머지는 연안어업양식업이다. 고등어다랑어의 어획량이 많다.

제2차 산업

지룽 부근의 탄광에서 석탄을 생산하고 있다. 대리석, 유황, 원유, 천연가스, 암염 등도 소량이지만 산출된다. 주요 공업 생산품은 시멘트, 석유, 라디오, 텔레비전, VTR, 전자 계산기(전산기), 컴퓨터 시스템 기기 등이다. 특히 타이완에서 제조되는 전자 제품이나 전기 부품은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화학공업, 석유화학공업, 섬유 산업, 플라스틱 제조업, 식품공업, 조선업 등도 번성하고 있다. 2002년 기준 연간 발전량은 1585억 3700만 kWh로, 그 약 4분의 1을 원자력발전소가 조달하고 있다.

제3차 산업

국민당 정부의 경공업 위주 경제 정책에 따라 경공업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있으나, 중공업은 상대적으로 미약하다. 타이완은 세계 유수의 컴퓨터 부품 생산 기지로 세계 시장에서 유통되는 메인보드그래픽 카드의 절대 다수가 생산된다. 그 외에 반도체액정 디스플레이(LCD) 등의 세계 시장 점유율도 높은 편이다. 하지만 자체 상표가 아닌 주문자의 상표를 부착하는 주문자 생산(OEM)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업을 갖지는 못하고 있다. 또한 금융업이 활발하여 많은 외국 은행이 지점을 설치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생긴 주식의 자유화와 상승을 배경으로 주식시장도 활발해졌다. 그러나 2001년 이후의 불황으로 주가는 침체하고 있다. 타이완 지구의 경제에서 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은 높다. 2003년수출은 1,506억 12만 미국 달러, 수입은 1,272억 4,257만 미국 달러였다. 주요 수출품은 전기전자 제품, 섬유 제품, 플라스틱 제품, 장난감류, 가공 식품 등이며, 주요 수입품은 원유, 목재, 철강, 기계류, 전기 및 전자 부품, 식료품이다. 주요 무역 대상국 및 지역은 미국, 일본, 독일, 홍콩, 중화인민공화국, 대한민국, 싱가포르 등이다.

교통 및 통신

교통

thumb|240px|타이완 고속철도(2006년 6월 24일 촬영) 타이완의 교통 행정은 중화민국 교통부가 담당하고 있다. 타이완의 지리적 요인으로 인해 동서는 중앙산맥으로, 남북은 하천에 의하여 방해받고 있다. 육상 운송 수단으로는 도로망이 특히 발달하였다. 동해안의 쑤화공로(蘇花公路), 서해안의 중산고속공로(中山高速公路), 섬을 횡단하는 동서횡관공로(東西橫貫公路)나 남부횡관공로(南部橫貫公路) 등 간선도로가 잘 정비되어, 간선도로의 총연장 거리는 41,475㎞ (2009년)에 이른다. 그 중 국가간선도로가 901㎞, 지방간선도로가 4,680㎞이다. 간선도로는 20,947㎞(고속도로 872㎞ 포함)이며, 도심도로는 16,395 km이다. 자동차 보유율도 높아 평균 3명당 1대 정도이다. 또한 잘 정비된 버스운행체계를 가지고 있다.<ref>《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타이완의 교통·도시〉</ref> 수십년간 일본의 식민지였지만 자동차는 일본과 반대로 우측통행을 한다.

철도로는 지룽을 기점으로 하는 동부간선(東部幹線)이나 타이베이를 기점으로 하는 서부간선(西部幹線) 등이 타이완의 해안선을 일주한다. 주로 물자 수송에 이용되고 있다. 2007년 타이완 고속철도가 개통되어 또 다른 변화가 기대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공사 시작 후의 대책 없는 궤간 변경 등의 작업, 해외 수주 경험이 전혀 없는 신칸센을 모티브로 한 것 등은 큰 논란 거리가 되었다.Template:출처) 철도의 총 길이는 1,496㎞ (2003년) 이고 철도 밀도는 415㎞/10,000㎢로서, 이웃한 대한민국보다 1.34배 높다.

주요 항구지룽 시, 화롄 시, 가오슝 시, 타이중 시 등이 있으며, 특히 가오슝은 국제 무역항으로서 타이완 지구 최대 규모의 항구인 동시에 동부 아시아에서 가장 분주한 항구 중 하나이다.

국제 공항타이베이 시 근교의 타이완 타오위안 국제공항가오슝 시가오슝 국제공항이 있다. 중화민국의 국적기인 중화항공은 국내선과 국제선에 취항하고 있다. 종래는 국내선 뿐이었던 에바 항공도 최근에는 국제선에 취항하고 있다.

통신

휴대전화의 보급율은 세계적인 수준이다. 또 일간지는 약 30지(紙)가 있으며, 주요 신문으로는 타이베이 시에서 발행되고 있는 "중국시보"(中國時報), "연합보"(聯合報), "자유시보"(自由時報), 가오슝 시에서 발행되고 있는 "타이완신문보"(臺灣新聞報), 타이중 시에서 발행되고 있는 "타이완일보"(臺灣日報) 등이 있다.

주민

인구 구성과 주요 도시

인구는 2335만 9928명(2014년 7월 추계), 인구밀도는 1km²당 636명(2005년 기준)이다. 인구증가율은 0.34%(2007년). 서해안의 평야부에 인구가 집중하여 인구밀도는 지극히 높다. 경제발전에 의한 농촌에서 도시로의 인구 유입으로 인하여, 도시 인구는 70%를 넘는다. 최대의 도시는 타이베이 시로, 2,603,651명이 거주한다. 제2의 도시로는 가오슝 시에 1,528,430명이 거주하며, 타이완 최대의 공업 도시인 동시에 타이완 제일의 항만이 있다. 그 밖의 주요 도시로는 타이완 중부의 경제, 문화의 중심 도시인 타이중 시에 1,077,182명, 타이완 남부의 경제, 문화 중심지인 타이난 시에 771,864명이 있다. 그리고 '타이완의 실리콘벨리'라고 불리는 신주 시에 413,317명, 타이완에서 두 번째로 큰 항구가 있는 지룽 시에 387,207명, 그리고 자이 시에 273,639명이 거주한다.

주민 구성

타이완 주민은 크게 3개의 집단으로 구분할 수 있다. 오스트로네시아어족원주민(약 1.7%), ·시대에 주로 중국 푸젠 성광둥 성으로부터 이주 정착한 한족계 본성인(약 85.3%), 그리고 1945년 일제 패망 이후에 중국 본토 각지로부터 이주한 외성인(外省人, 약 13%)이 있다. 한족계 본성인은 일상에서 주로 쓰는 중국어 방언에 따라 민남어를 사용하는 복노인(약 73.3%)과 객가어를 사용하는 객가인(약 12%)으로 세분하기도 한다. 국공내전에서 패한 국민당정권이 타이완섬으로 피신하면서 정권을 따라 들어온 외성인들이 모든 방면에서 주도권을 쥐고 본성인들을 억압하면서 1947년2·28 사건이 일어나는 등 저항이 있었다.1988년에 타이완 출신인 리덩후이가 총통이 될 때까지 43년간 외성인 중심의 국민당정권이 계속되면서 정치,경제 등의 모든 부분에서 여전히 외성인 출신들과 그 후손들이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타이완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주로 미국인 등 서양인이다. 그밖에 일본인, 말레이 인종(필리핀 출신 주민 등), 베트남인, 몽골인, 티베트인 등이 있다.

주민의 언어

중화민국의 공용어는 베이징 방언을 기초로 한 표준 중국어이다. 일상에서는 민남어(타이완어)나 객가어가 많이 쓰이며, 그 밖에 중국 각지의 방언도 쓰인다. 또한, 원주민은 각각 독자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최근에는 중화민국의 정치 민주화를 반영하여 매스컴 등에서 민남어가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외국어로는 영어일본어가 가장 많이 쓰인다.

문화

종교

종교로는 불교, 도교, 유교의 3대 종교와 기독교, 이슬람교 등이 존재한다. 통계 상 인구의 반 정도가 불교를 신앙하고 있고, 성공회, 메노나이트, 장로교, 로마 가톨릭교회 등의 기독교는 7%, 이슬람교도는 1% 미만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러나 타이완에서는 불교, 도교, 유교의 구분이 극히 애매하고, 서로 강하게 영향을 받고 있다. 타이완 사람들의 종교 생활은 불교, 유교, 도교가 혼합된 것으로, 묘(廟)에서는 이러한 종교의 신들이 합사되고 있다. 특정의 신을 신앙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경우에 따라 참배하는 신들을 바꾸고 있다. 따라서 타이완 사람들은 종파를 넘어 깊게 종교와 접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세계 종교 회의 등 종교 국제 기구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종교의 자유가 보장하는지 확신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 타이완 중화민국을 정통으로 인정하는 경우도 많다.Template:출처

교육

타이완의 교육제도는 1946년 제정된 중화민국 헌법이 정하고 있다. 일본의 식민 지배의 영향으로 일본식 교육 제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의무 교육은 초등학교(국민소학; 國民小學)와 중학교(국민중학; 國民中學)의 9년간으로, 공립학교는 무료이다. 국민중학 졸업자의 대부분이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고급중학(高級中學) 혹은 고급직업학교(高級職業學校)에 진학하고 있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교육열이 높다. 타이완에는 약 150개의 대학교와 전과학교(專科學校) 등의 고등교육 기관이 있다.

주요 대학교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문화

Template:참조 타이완 주민의 대부분이 한족이므로 그 문화 기반은 한문화(漢文化)이다. 중국 본토의 전통 사회와 마찬가지로 가족은 사회 조직의 중요한 사회 단위가 되고 있다. 따라서 선조 숭배는 현재도 중요한 가족 행사의 하나이다. 또 구정 및 이십사절기에 따르는 청명절이나 중추절 등의 전통적인 연중 행사는 매년 성대하게 행해지고 있다.
타이완 섬에 대한 일제의 강점기간은 한국보다 15년이 더 긴 50년(1895년-1945년)이지만, 타이완 주민들의 반일 감정은 한국인에 비해 현저히 덜한데 이는 1947년의 2·28 사건 이후 무려 38년간의 계엄령 아래서 본성인외성인을 차별했던 폭압통치에 대한 주민들의 반감이 일제시대에 대한 향수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타이완에는 세계적인 도서관이나 미술관이 많다. 저명한 도서관으로는 타이베이 시에 있는 국립 중앙도서관이 있으며, 방대한 양의 장서를 보유할 뿐만 아니라 분관도 존재하고 있다. 또 각 주요 도시에 공립 도서관이 있다. 타이베이 시에 있는 《국립고궁박물원》에는 중국 베이징자금성으로부터 옮겨져 온 중국 역대 왕조의 뛰어난 문화유산이 다수 수집되어 있다. 또 《국립 역사박물관》, 《타이완성립박물관》에는 중국의 민속 문물이나 현대 예술 작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인기 있는 스포츠는 야구로, 중화 프로 야구 대연맹(타이완 프로 야구)이 있다.

대중 문화

타이완은 중화권에 속한 지역으로, 타이완의 대중 문화는 중화권과 맥을 같이 한다. 타이완 출신의 연예인들은 중국 대륙와 세계 각지의 화교 사회에서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외국 문화 중에서는 일본의 대중 문화가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일본의 대중 문화는 타이완의 대중 문화 형성에 거의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타이완에서 제작된 영화드라마 중에는 일본의 만화소설을 원작으로 한 것이 많다. 최근에는 한류 열풍으로 젊은 층을 중심으로 한국의 대중 문화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같이 읽기

각주

<references/>

바깥 고리

Template:Commonscat Template:메타 Template:Wikivoyage

Template:중화민국의 행정 구역 Template:중화민국의 행정 구역 (미통치 지역 포함) Template:폐지된 중화민국의 성 Template:동아시아 Template:동남아시아 Template:아시아 Template:APEC Template:중국어권 Template:Authority control

*중화민국 * 분류:중국어권 분류:아시아의 나라 분류:1912년 설립 분류:미승인 국가 분류:섬나라 분류:일본의 옛 식민지 분류:공화국 분류:유엔의 옛 회원국 분류:분단된 지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