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사상
* 상위항목: 북한/정치, --종교 관련 정보--,
--include(틀:종교)-- --근데,굳이 여기에 문화상대주의를 적용해야 되나?-- include(틀:불법)
||국가보안법 제7조(찬양·고무등) ①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의 활동을 찬양·고무·선전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국가변란을 선전·선동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개정 1991·5·31> ||
목차
--酒滯思想-- --술에 취해 만든 삐딱한 생각--
북한의 체제 유지 근간을 이루는 ~~강제로 믿어야만 하는 사이비 종교~~ 통치·정치사상. 김일성주의, 수령절대주의, 또는 주체교라고도 불린다. 영어로는 Juche Ideology, 보통은 그냥 Juche라고 부른다. --[wiki:"독일어"유헤]가 아니다-- Chaebol(재벌), Jeonse(전세)와 함께 한국어가 그대로 영어에 편입된 고유명사에 속한다.
공식적으로 북한은 공식적으로 김일성이 창시해 1930년 6월 열렸다는 카룬 회의에서 처음 발표한 사상이라고 주장한다고 하지만 당연히 신빙성이 없다. 1930년이면 김일성이 고작 18세였던 때다. 게다가 김일성의 학력은 중졸이다.[* 사실 당시 사정을 보면 중졸이라고 다 무식한 것은 아니다. 당시 초등학교 졸업만 해도(일제 시절에는 소학교조차 의무교육이 아니었다.) "지식청년"으로 대접받았던 사실을 보면, 더욱 그렇다. 사실 공산주의 사상가들을 보면 가방끈 짧은 사람이 많다. 레닌 처럼 대졸에 변호사 자격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도 있지만 스탈린이나 트로츠키 같은 경우는 고졸이며, 마오쩌둥도 엄밀히 따지면 고졸에 대학 청강생(북경대 청강)이며 호치민은 아예 무학(나중에 모스크바에서 동방 노동자 대학교에 다니긴 했는데 그곳은 그냥 공산주의 학교이다)이다. 18세에 주체사상을 창시했다는 것은 명백한 거짓이지만, 지금의 중졸과 당시의 중졸은 엄연히 다르며, 당시에 학력을 쌓지 못했다고 해서 머리가 나쁘거나 무식한 것은 아니었음을 고려해야 한다.] [* 이전 버전에는 김일성이 마적질을 하고 다녀서 "김마두"라고 불렸다는 설이 적혀 있었는데 당시 일본군은 만주의 독립운동세력을 마적이라고 주장했다. 김일성이 소규모였지만 항일운동을 했다는 것은 현재 주류학계가 대체로 인정하고 있다. 물론 김일성은 용서할 수 없는 [천하의 개쌍놈]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제나 친일파의 흑색선전으로 김일성을 욕할필요는 없다. ] 대부분의 주체사상이라는 단어가 실제로 등장한 것은 1970년대 초반 무렵으로 황장엽이 1960년대 말부터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개량하기 위한 새로운 사상을 연구해 1972년 일본 마이니치 신문에 기고한 '주체사상과 조선로동당의 대내외 정책'이라는 논문을 통해 처음으로 발표했다.
아래 항목에도 자세히 나와 있지만, 또 그럴 수밖에 없지만, 주체사상이 맑시즘과는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막연한 동경, 더불어 막연한 비판을 피할 수 있게 하는 핵심이다. 여기에는 붉은 색에 대한 컴플렉스도 포함한다. 이 차이점에는 주체사상의 진행 과정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사실상 1974년 2월 19일 김정일에 의해 김일성주의로 북한 내에서 정식 선포되었다.
북한에서의 정의
[인민|One] for [조선노동당|All], [조선노동당|All] for [수령|One]
원래는 대충 이런 것이었다.
>혁명과 건설의 주인은 인민 대중이며 혁명과 건설을 추동하는 힘도 인민 대중에게 있다.
* 위 명제에 대한 보충 =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며 자기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힘도 자기 자신에게 있다.[* 사실 이것도 실존주의 짝퉁에 불과하다.]
언뜻 들으면 틀린 거 하나 없는 말이다.
문제는 황장엽이 주장한 '인간중심철학' 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주장하는가인데 여기서 황장엽은 인간의 생명을 '육체적 생명'과 '사회적 생명'으로 구분지으며 '육체적 생명은 유한하지만 사회적으로 결합된 집단의 생명은 무한하다'고 주장하며 은연중에 전체주의 사고관과 영생을 약속하는 종교적 이데올로기를 짬뽕한다.
>인민 대중의 이익은 노동 계급이 대표하므로 인민 대중의 참다운 이익을 옹호하는 입장은 곧 노동 계급의 입장이며 노동 계급의 참다운 이익을 옹호하는 입장은 곧 노동 계급의 당(黨)의 입장이며 노동 계급의 당의 이익을 이상적으로 옹호하는 입장은 곧 수령(즉 김일성)의 입장이다.
위 정의가 혼합되면 '사회적 운동의 주체는 인민 대중이다'라는 명제가 슬그머니, 아니 대놓고 '사회적 운동의 주체는 노동 계급이며 노동 계급의 당이며 노동 계급의 수령이다'가 된다. 짧게 줄여서 '수령의 의지 = 인민의 의지'. 이로써 수령절대주의가 탄생한다.[* 출처: 북한의 진실과 허위, 황장엽.] 이를 둘러싼 과정은 역사 항목에서 기술한다.
--교리--내용
소련이 wiki:"니키타 흐루쇼프" 흐루쇼프 이후 wiki:"이오시프 스탈린" 스탈린을 비판하고 서방에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자 북한은 소련과 외교적 마찰을 빚게 되었다. 김일성은 소련과 다른 독자적인 이론을 개발할 것을 황장엽에게 지시했고 물질과 생산 방식에만 치중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던 황장엽이 4년 가까운 연구에 의해 내놓은 인간의 창조성과 자주성을 강조한 '인간 중심 철학' 을 기초로 하고 있다.
"인간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갖추고 있다"라는 참으로 그럴 듯한 가정으로부터 시작한다. 주체사상의 주체라는 표현은 사실 이러한 출발점에서 유래하였다. ~~의도는 좋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김일성의 동생으로 당시 중앙당 조직부장 김영주로부터 비판을 받게 되고 이때문에 김영주와 후계자 자리를 두고 권력 암투를 벌이면서 김영주에 대해 이론적 권위를 높이고 차별화를 꾀한 김정일이 내용과는 무관하게 황장엽의 사상에 관심을 보이게 된다.
충성 경쟁을 펼치던 김정일에 의해서 본래의 '인간중심철학' 은 온데간데 없어졌고 "수령과 인민의 관계는 뇌수와 신체의 관계와 같다. 육체적 생명은 저절로 주어지지만 사회적/정치적 생명은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인민을 해방시킨 수령 김일성이 부여한 것이다"라는 스탈린주의와 유교식 왕조 사상 등이 혼합되어 수령 개인의 독재를 위한 괴상한 논리로 변질되어버렸다.
간단히 말해 '사람 중심 철학'이라고 할 때의 그 '사람'은 wiki:"김일성" 혹부리우스와 wiki:"김정일" 뽀그리우스만을 가리키는 것. 나머지 인민들은 육체적 생명만 있지 사회적, 정치적 생명은 없어서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없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나 침팬지 같은 존재라는 게 주체사상이다. 그런 오스트랄로피테쿠스 같은 인민들이 '사람' 이 되기 위해서는 혹부리우스와 뽀그리우스에게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비판
마르크스주의와의 모순
"인간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갖추고 있다"는 이 가정 자체가 마르크스주의의 전제와 완벽히 상반된다. 다만 초기 맑시즘을 보면 인간의 의지를 중시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나중에는 바뀌지만.
마르크스주의는 이데올로기나 정치는 물질적 생산 관계의 변화에 따라 결정된다는 역사유물론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인간 개개인의 의지나 정신력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주체사상은 이와는 정반대의 주장이 되버린다. 이러한 무조건적인 낙관주의는 역사유물론적으로 열렬한 비판의 대상이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저런 자유의지와 같은 개념은 어디까지나 사회적 내지는 유적 관계와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다, 결국 하부구조 위에 구성된 상부구조에 해당한다. 저렇게 대충 끄적여놓고서 "자유의지가 어쩌고 주체가 어쩌고" 하는 건 이론적으로도 터무니없는 소리가 된다.
오히려 다량한 조류의 마르크스주의를 통일하는 이론적 사상 체계의 핵심인 유물론적 결정론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 귀에야 경악스럽게 들릴지 몰라도, 주체사상의 개인 결정론은 우파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이나 할 법한 한량한 뜬구름 잡는 소리이다.
마르크스 본인이 공산주의 선언을 집필하며 혁명가로서 자신을 동시대의 동업자들과 확실하게 선을 긋기 위해 특별하게 강조한 하나의 정교한 기계 장치 처럼 사회와 그 속의 개인이 거대한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대류에 맞물려 돌아가는 필연적, '과학적' 사회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주체사상의 골자는 모험주의적인 철 없는 부르주아나 할 법한 반동적 개인주의이자 레닌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좌파적 소아병에 더 가깝다.
이런 비판은 모두 현실에서 저지른 짓과는 별개로 순수한 이론적인 측면에서 기반한 것이며, 이 말은 즉 북한의 통치 이데올로기는 애초에 첫 단추 부터가 사회주의 진영 입장에서도 사이비라는 점을 시사한다.
이 사상이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아 탄생했다고 하는 건 거짓말이다. 아니면 황장엽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거나. 황장엽은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에 부족한 정신적인 측면을 보완했다고 자칭했으나, 실상 마르크스주의에서 이론적으로 부정해버린 부분을 억지로 되살린 것에 불과하다.
지도자 원리와 정신~~병자~~론
주체사상 같은 의지드립 운운 정신력 운운은 빼도 박도 못하는 극단적인 관념론적 사고방식으로서 나치 독일이나 일본군이 매우 질질 빨았던 정신론의 일종이며, 수령론은 뻔하게도 지도자 원리의 영향이다.
주체사상이 '철학적으로 대단한 의의'를 지녔다는 평가도 있지만, 알고보면 그 내용은 케케묵은 미카도이즘과 나치즘의 찌꺼기를 넝마주이 해온 것이다.
황장엽은 수령절대주의를 제외한 주체사상은 뭔가 대단한 업적처럼 자화자찬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수령절대주의를 제외한' 주체사상 역시 낭만주의 시대부터 계속나타났던 기존의 흔한 정신론의 재탕에 불과하고, 세계 철학계에서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영향
주체사상은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아주 교묘하게 패러디하였다. 육체적 생명을 [그리스어]로 프쉬케, [예수]에 대한 믿음을 통해 얻게 되는 '새 생명'을 조에라 한다.[* 출처: [숭실대학교] 교목실장 김회권 교수.] 여기에서 조에를 '사회적/정치적 생명' 으로, '수령 김일성'을 '[그리스도] [예수]'로 바꾸면 완벽하게 [그리스도교]가 된다. [예수]를 믿음으로써 새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 구체적으로 이 새 생명은 '[wiki:"야훼"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창세기 1장 26~28절.)되었으나 죄악으로 인해 잃어버린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로마서 3장 23절.)'이다.]이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리이다.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과 어머니 강반석이 독실한 [개신교]인이었고 김일성도 어렸을 때는 교회를 다녔다. 이것을 아주 교묘하게 표절하여 자신을 [예수]와 같은 구원자라고 선전을 했다고 볼 수 있겠다.
거기에 '10계명'([당의 유일 사상체계확립의 10대 원칙])도 갖추고 있다. 실제로 새터민이 기독교를 접하고는 주체사상과 너무나도 똑같아서 깜짝 놀랐다는 사례도 상당히 많다.
또한 주체사상의 핵심 이론 가운데 하나인 사회 유기체설 역시 기독교 패러디이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믿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성도들은 예수를 머리로 하여, 예수 안에서 한 몸을 이루어 지체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거기에서 예수를 혹부리우스로 바꾸기만 하면 주체사상 완성.
심지어 Adherents.com과 같은 일부 조사에서는 종교로 분류하고 있다. 2008년의 외국 조사에 따르면 Jucheism은 1,900만의 신자를 가진 세계 10위의 종교라고 한다. 이처럼 해외 신봉자들도 존재한다. ~~본격 바보 인증~~ 흠좀무.[* 프랑스의 주체사상 추종자가 운영하던 사이트였으나 한번 해킹 당해 다른 이상한 일본 사이트로 연결되었었다. 2015년 1월 현재 도메인이 만료되어 아무도 안 쓰는 중.]
모호성
주체사상은 굉장히 난해하고 복잡한 사상으로 실질적으로 애매모호한 말잔치 같은 사상이다. 사실 북한에도 '외우는' 사람은 많지만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난해하고 이해하는 사람이 드물다기보다는 내부 모순이 워낙 심해 원리적으로 이해가 불가능한 사상에 가깝다. 조야하게 비유하자면 '파란 것은 네모난데 노랗기 때문에 길어야 한다' 같은 문장을 읽는 느낌이랄까...그래도 그 동네에서 나름 머리 좋다는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것일 텐데 신기할 지경.
솔직히 이해가 필요한 사상인지도 의심스럽다. 사실상 'wiki:"김일성" 수령과 그의 의지를 잇는 wiki:"김정일" 후대 wiki:"김정은" 통치자들에게 절대 복종하라'는 것만 잘 알면 끝인 사상이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주체사상 자체는 말장난 투성이로 단지 주민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모순을 가지고 복잡하게 만들어진 '학습 그 자체를 위한 사상'으로 추측한다. 말하자면 일부러 쓸데없이 어려운 말을 많이 써서 배우는 데 시간을 많이 잡아먹게 만들어 딴 생각을 못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강철서신을 발표해 주체사상을 남한에 처음 전파했던 최초의 주사파 김영환도 91년 잠수정을 통해 북에 올라갔을 때 김일성과 주체사상에 대한 심도 깊은 토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정작 김일성 자신은 주체사상에 대한 이론적 지식이 전혀 없어 실망했다고 한다.# 김영환은 주체사상이 허상이라는 것을 깨닫고 뉴라이트 운동가가 되어 반북한정권 운동을 벌이고 있다.
~~국교~~지위
북한은 2009년 4월에 헌법을 개정하면서 아예 공산주의 대신 주체사상을 국시로 정했다. 이미 1970년대부터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 같은 정통 공산주의 서적들이 금서 처리되어 있었지만 법규로 명시된 것은 이때부터이다.
수령론
마르크스식 공산주의는 일견 경제적 평등을 부르짖는 사회주의학의 하나로 볼 수 있을지 모르나 '계급 타파를 위해 계급적 입장에 서야 하며 국가를 없애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치하 국가를 강화시켜야 하고 독재를 없애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추구해야 한다'라는 자기 모순적인 사상이었다. 혹자는 이것을 '과도기로서 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나 모든 것을 이루고 자연스럽게 소멸하여 국가도 권력 독재도 없는 프롤레타리아 세계를 향한 최종 목표로서는 과도기가 아닌 완결이 중시되는 이론이다.
프롤레타리아 계급만의 정부가 들어서면 당연히 그것은 하나의 일당독재국가가 된다. 마르크스는 그를 공산당으로 정의했다. 원래 그의 공산주의 이론은 공산당이라는 이름이었다. 검열 규제 때문인지 후에 공산주의로 바꿨는데 마르크스 주의자들은 이를 마르크스가 '아 이름 짓고 보니 좀 잘못됐네요. 수정합니다' 라고 했다고 주장한다. 거기까진 좋았을지 몰라도 만인의 절대다수의 정부 권력이라는 것은 복잡한 정치 구조와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한쪽으로 쏠리게 마련이다.
마르크스는 철저한 물질주의자였고 그래서 돈과 관련된 문제만을 핵심으로 다루었고 정신적인 면을 주장한 [wiki:"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헤겔]을 엄청 깠다[* 정확히 말하면 물질이나 경제 같은 형이하학적인 문제가 철학이나 이념, 윤리 같은 형이상학적인 개념들을 규정한다고 주장한 것이 마르크스의 입장이다. 이를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 때문에 놓친 이 부분을 스탈린이 악용하여 수령론을 내세웠다.
* 인민 대중→노동 계급→노동계급의 당(공산당)→당 수령
위와 같은 상향식 위계 관계를 설명하자면 모든 인민의 이익은 자본 계급보다 선진 계급인 노동[*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의해 대표되고 노동 계급 이익은 그를 통솔하는 당인 공산당이 주도하여 만드는 것이며 공산당은 탁월한 공산주의 지도자인 수령에 의해 지도되어야 한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2번 항목에서처럼 김정일에 의해 다시 이용되었다.]. 이를 통해 세계 공산 국가들은 공산주의의 원조이자 총아인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의 카리스마 하에 하나로 묶여갔다.
주체사상은 이것을 더욱 악화시켜 아예 인민 대중을 대표하기 위한 수령이 아니라 수령이 없으면 전체 인민들의 육체적/정신적 삶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아주 괴악한 논리로 변질되어버렸다.
주체사상 형성
어원
이 시기에 김일성은 1955년 12월 28일 당 선전부 간부들 앞에서 '사상 사업에서 교조주의[* 공산주의 맹주격인 소련의 방침에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것]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할 데 대하여'라는 연설은 한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 우리 당 사상 사업에서 주체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떤 다른 나라의 혁명도 아닌 바로 조선 혁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조선혁명이야말로 우리 당 사상 사업의 주체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상 사업을 반드시 조선혁명의 이익에 복종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소련공산당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나 마르크스/레닌 주의의 일반적 원리를 연구하는 것이나 다 우리 혁명을 옳게 수행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명백히 소련과 중국 눈치 보지 말고 우리 식대로 하자는 북한식 사회주의 주장이었다. 소련 공산당에서부터 마르크스와 레닌의 사상까지 멋대로 바꿔보자는 김일성 식의, 즉 김일성 주체 주장이었다. 이 시점에서 김일성의 사고방식은 이미 [공산주의]를 벗어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는데 김일성은 외부의 간섭을 물리치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욕망으로 '조선의 특별성'을 내세우면서 '마르크스 주의'를 부정하게 된다.
자신들은 공산주의의 한계를 극복했다고 자칭했으나, 실상은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지도자 원리를 이용하여 세계 인류의 보편성을 주장하는 공산주의를 배척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것이 공산주의의 탈을 쓴 파시즘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당시까지 주체사상이라는 용어는 확립되지 않았다.
1955년 연설은 주체사상을 창시하거나 한 시기가 아닌 '주체를 세우는 데 대한 문제'를 제기한 시점으로 보고 있다. 이 연설은 북한의 방향성에 큰 틀을 제시한 중요한 연설이었고 이 '주체를 세우는 데 대한 문제'를 이론적으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언어인 듯하다고 한다. 황장엽의 말에 따르면 당 대회 문서에도 주체사상이라는 용어는 나오지 않았고 1961년 4차 당 대회가 끝난 뒤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자주적, 창조적 노선
* 자주적 - 다른 나라(소련)를 무조건 숭배하는 사대주의를 벗어나 주체인 자기 나라와 인민의 이익을 옹호해 간다[* 이때까지는 남조선(남한) 개입에 대한 의사가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 창조적 - 다른 나라의 시스템을 무조건 모방하는 것[* 교조주의]를 그만두고 자기 나라의 현실에 맞는 창조적 노선을 지향한다.
이로부터 출발하여 4대 노선이 세워졌다. 이것은 소련 공산당이나 중국 공산당의 북한 간섭을 막으려는 의도로 세운 사상으로 북한 내에서 소련이나 중공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김일성, 김정일에 대항하는 파벌들을 숙청한 사건에서 구체화 되었다. 주체사상을 내세우면서 외국 것이라면 소련 음반도 가리지 않고 제거하는 작은 문화대혁명이 벌어졌고 북한의 독재는 최소한의 다른 파벌조차 허용하지 않는 심각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4대 기본노선
* 사상에서의 주체 - 사대주의와 교조주의를 배격하고 자기 인민의 이익, 자기 나라 혁명 실정을 반영한 자기 당 지도사상에 충실하여야 한다. * 정치에서의 자주 - 외국의 간섭을 일체 배격하고 자주독립의 원칙을 견지한다. * 경제에서의 자립 - 외국에의 경제적 예속을 반대하고 자체의 힘으로 자기 나라 실정에 맞는 자립적 민족경제를 건설한다. * 국방에서의 자위 - 다른 나라의 무력에 의존치 않고 자주독립과 국가 권익을 자체 국방력으로 수호한다. ~~땅크는 소련제를 쓰더라도 말이지~~
간섭을 철저하게 배제하면서 공산주의의 긍적적인 측면인 인종차별 해소나 남녀평등 같은 요소조차 북한에서는 '자주'를 내세워서 배척하게 된다. 사실상 이념으로서의 [공산주의]는 북한에서 매장당했으며 마르크스나 레닌, 심지어 스탈린의 저작물 조차도 자유롭게 배울 수 없게 돼버렸다. 그리하여 완벽하게 기만적인 독재체계가 만들어졌다.
천리마 운동
https://pds15.egloos.com/pds/201001/23/40/b0009940_4b5a1b015f56f.jpg ~~동무는 천리마를 탔는가?~~ 주체사상의 실천 방안으로 행해진 천리마 운동은 1958년 대숙청 이후 김일성 일인독재가 성립하며 본격 실행되었다. 주요 골자는 사상 교양과 대중 동원을 통한 생산운동이었다.
청산리 방법
김일성이 강서군 청산리에 직접 강림하시어 현지지도하며 만든 이 방법의 특징은 "당 소속 지도 일꾼이 군중과 함께 고생해가며 일하면서 군중의 사상을 각성시키고 그들의 창조적 지혜와 적극성을 발동시켜 당 정책 관철에 혁신을 일으키도록 한다"는 것.
놀랍게도 이 방법은 한 몇 년 간은 꽤 긍정적인 효과를 보였다. 생산이라는 목표만 가지고 채찍질을 가한 게 아닌 당 직원[* 당 소속이면 누가 뭐래도 상위 계층]과 함께 일하며 사상 교육을 겸하며 받아가는 관료주의의 극복과 대중의 자발적 참여와 창조성 유도라는 목적을 잘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정말로 경제적으로 잘 발전되기 시작했고[* 실제 공업생산이나 각종 경제통계를 살펴보면 1950년대에서 60년대 중반까지는 북이 남한을 경제적으로 압도하였다. 그러다가 60년대 중반부터 남이 고도성장을 하고 북의 성장률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1970년대 초·중반경에 따라잡아 대략 1970년대 후반에 북을 추월하였다. '남에게 따라잡힌다'는 북한 정권의 위기감, '북을 넘어서겠다'는 남한 정권의 경쟁의식이 만나면서 온갖 종류의 병림픽을 벌였다. 결국 체제경쟁 승리를 위해서 어떠한 반대파도 허용하지 앉고 전국력을 총동원해야 한다는 명분하에 북에는 1972년 사회주의 헌법 개정을 통해서 김일성 수령제, 남에는 10월 유신을 통한 [박정희] 종신집권이라는 닮은꼴의 극단적인 독재체제가 성립한다.][* 실제로 전쟁 후 1970년대 초반까지는 북한이 남한보다 잘 살았다.] 사회 도덕 규범도 잘 세워져 나름 괜찮은 나라가 되려고 했었다. 탈북자의 실제 증언에 의하면 한 마을 사람들끼리 문도 안 닫고 지냈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 청산리 방법을 바탕으로 작사 및 작곡된 노래가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
주체 사상의 변질
알다시피 공산주의라는 시스템은 언뜻 이상적으로 보일지언정 인간의 이기심과 나태함을 극복하지 못하는 이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북한의 황금기도 5~6년이 한계였다. 선전과 대중동원이 반복되면서 사람들의 피로가 쌓여갔으며 실적은 저조해졌지만 한 번 재미를 보고 맛들린 북한은 대중 동원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했다.[* 대략 1960년대 후반부터 생산성 저하와 경제 성장 둔화 현상이 나타나면서 이북 내에서도 경제개혁 논쟁이 불거진다. "천리마" 등의 잡지를 통해서 일군의 젊은 경제학자와 당간부들이 인센티브와 독립채산제(자주관리) 등을 중심으로 한 경제개선 조치를 주장했고 헝가리와 소련의 사례가 많이 소개되었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최소한 당 내에선 어느 정도의 발언의 자유가 보장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이 혁명전통계승, 주체사상 등을 내걸고 후계자 투쟁에서 승리하면서 이런 논쟁은 박살나고 대신 극도로 중앙집권화한 유일 수령제로 귀결되면서 하부단위에 일말의 자율성도 부여하지 앉고 3대혁명소조 운동 같은 대중 동원이 극도로 강화된다.]
이 하향곡선은 김정일과 김영주(김일성의 동생)가 다음 권력을 승계받기 위해 병림픽을 벌이며 더욱 가속화된다.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대북 압박
1966년 중국의 문화대혁명 바람이 북한에도 몰아쳤다. 당시 소련은 마르크스의 이상에 발맞춰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끝나간다는 과도기에 들어서 있었으나 중국 측에서는 그러한 수정주의를 비판하며 더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를 위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중국은 마오쩌둥 독재지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아니다.
덩샤오핑 등과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발생한 문화대혁명을 북한이 공식 지지하지 않는 것에 대해 중국이 딴지를 걸었는데[* 심지어 이 시기에 북한과 인접한 중국의 도시들에서는 홍위병들에 의한 반 김일성 데모도 자주 벌어졌다.] 이에 대해 김일성은 1966년 8월 당 기관지 로동신문을 통해 '마르크스-레닌 주의는 행동 지침에 불과하다'는 주체설을 바탕으로 중국과 소련에 대한 완전한 '사상 독립'을 선언했다.
당 개편
중국의 압력을 비판한 김일성은 그 해 10월 당 중앙지도기관 직제개편을 단행했다. 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에서 총비서로 명칭이 바뀌었고 당연히 총비서는 김일성. 부위원장제가 폐지되고 비서국이 새로 설치돼 담당비서제로 바뀐다. 이로써 비서국 조직비서와 조직지도부장 자리가 김일성 다음의 권력의 핵이 되었다.
갑산파 숙청과 유일사상체계
갑산파
갑산공작위원회는 항일 투쟁을 벌이던 단체로 갑산파의 리더 박금철은 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었다. 그 자리가 순식간에 통째로 사라지면서 박금철은 권력을 상당수 잃었고 김일성 동생 김영주가 정치국 후보위원 및 당 조직비서 겸 조직지도부장의 자리에 임명되면서 권력 판도가 뒤바뀐다. 당시 박금철은 김일성, 최용건, 김일에 이은 당 서열 4위였다.
박금철은 이에 김일성에게 반발하였고 항일투쟁 당시의 박금철을 과대선전하는 <일편단심>이라는 영화까지 제작되었는데 김일성을 제외한 개인숭배가 용납되지 않던 시대에 엄청난 짓을 저지른 것이었다.
당시 갑산파는 김일성의 중공업정책을 비판하며 국방비를 줄이고 외국의 원조를 받아 인민들의 실생활 수준을 높일 것을 주장하고 있었다. 경제에 관해서도 청산리 방법을 부인하면서 당의 간섭을 줄이고 전문가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당 독재를 약화시킬 만한 발언을 계속하고 있었다.
유일사상체계
1967년 3월 비밀리에 당중앙위원회 회의가 열려 김일성은 갑산파의 숙청을 결정한다. 이 회의에서 처음 '유일사상체계'라는 말이 나왔다.
>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세우는 것은 당 건설에서 나서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다. 당 안에 유일적인 사상체계를 철저히 세우지 않고서는 도대체 사상의지 통일을 보장할 수 없고 당을 전투적 조직으로 만들 수 없으며 따라서 혁명과 건설을 성과적으로 령도해 나갈 수 없다.
이 단어는 김영주가 김일성의 후장을 빨기 위해 고안한 말인데 김정일이 당 사업에 뛰어들면서 둘의 권력(=김일성의 신임)을 얻기 위한 경쟁이 심화되었다.
김정일 득점
황장엽의 회고록에 따르면 갑산파 주요 간부 중에는 김영주의 지인이 몇 있었다. 갑산파 선전비서 김도만과 국제비서 박용국 등. 숙청은 중견지방간부 공무원의 2/3이 공석이 될 만큼 엄청난 규모였는데 김일성의 애널써킹에 정신이 팔려있던 김영주는 자기 양 날개를 스스로 잘라낸 셈이었다. 결국 이는 자신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김정일의 서열 상승에 영향을 끼쳤고 김영주는 이후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5.25 교시
황장엽의 논문
당시 당 서기 겸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이었던 황장엽은 1966년 10월 대학창립 20주년 기념논문집에 <사회발전동력>이라는 논문을 개제한다. 논문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공산주의)로의 과도기는 경제 시스템 수립 뿐만이 아닌 그에 상응하는 생산력으로써 우월함을 보여줄 때에만 끝난다. 남한의 경우 남북이 통일될 때에 그 과도기가 끝나며 그때까진 남북간 계급이 계속될 터이니 프롤레타리아 독재 정권은 계속 존속하여야 한다. 그리고 사회 발전에는 인텔리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므로 인텔리들을 출신 성분이 아닌 사회발전기여도에 따라 평가하여야 한다.
논문 발표 후 김일성대학에서는 독창적 견해라며 높게 평가됐는데 김일성대와 경쟁 관계에 있던 중앙당학교 교장 양형섭[* 김영주와 김일성의 고종매부(姑從妹夫) 또는 내종매부(內從妹夫)]이 이를 읽고 딴지를 걸었다. 그는 황장엽의 논문이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약화시키는 수정주의 논문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2인자였던 김영주도 과도기 문제라는 민감한 글을 좋게 봐줄 수가 없었다.
김일성의 황장엽 비판
김일성은 1967년 5월 25일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과도기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문제에 대하여'라는 연설을 통해 김영주와 황장엽의 두 대립된 이론을 모두 씹었다. 그러나 김일성이 내심 더욱 우려한 것은 논문 말미의 '인텔리 역할론'이었다. 그는 당 연설 말미에서
> 사회주의 사회에서 계급투쟁은 없어지지 않고 계속되면서 형식이 바뀔 뿐이다. 지금 일부 인텔리들은 자유 운운하며 당 생활을 비롯한 조직 생활 강화에 비협조적이고 잘 참여하질 않는다. 당 간부도 그렇고 이런 애들이 당 정책을 잘 어기고 그런다. 인텔리는 늙은이든 젊은이든 자유주의와 부르조아 사상을 없애고 혁명가로 단련되기 위해 당 조직 생활 등 여러 조직 생활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이 '당 정책을 잘 어기는 인텔리'는 황장엽을 지칭한 것이었는데 결국 이 5.25 교시 이후 황장엽은 각종 비판에 시달렸고 서기실 동료를 비롯해 그와 이론을 같이한 이들과 함께 모조리 쫓겨났다. 황장엽은 회고록에서 '이는 중국 문화혁명을 모방해 민주주의적 인텔리를 압박하려는 의도'였다고 밝혔으며 김영주의 논문이 김일성의 연설의 도마에 함께 오른 것은 김일성의 권위를 더욱 세우고 자신은 더 신임을 얻으려던 김정일의 의도였다고 본다.
북한판 문화대혁명: 도서정리사업
* 도서정리사업 항목 참조.
당의 유일 사상체계확립의 10대 원칙
북한에선 김일성과 김정일의 교시 및 지시가 곧 법이며 이것은 기존의 어떤 법도 초월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이는 일견 초법적인 권한으로 보일지 모르나 이 행위는 당의 유일 사상체계확립의 10대 원칙(이하 10대 원칙)에 의해 합법화되고 있다.
10대 원칙 5조 1항에 의하면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교시를 곧 법으로 지상의 명령으로 여기고 사소한 이유나 구실도 없이 무한한 헌신성과 희생성을 발휘하여 무조건 철저히 관철해야 한다'라고 되어있다. 따라서 북한에서 김정일의 교시가 헌법이나 당 규약에 위배된다고 거부하거나 반대할 경우 해당자는 처벌을 받게 된다.
사상의 씨앗은 이미 60년대에 뿌려졌다. 중-소 분쟁과 쿠바 미사일 위기를 겪으며 공산주의 진영의 갈등과 분열이 심화되자 북한 고위층은 '아 이거 소련만 믿고 있다가는 쿠바처럼 낙동강 오리알 될 수도 있겠구나' 하고 긴장감을 다잡게 된다. 이러한 위기감에 체제도 강화하고 대내외적인 자주성도 드높이고자 꺼낸 카드가 주체사상이었다. 이에 1972년에는 북한에서 6차 헌법 개정이 이루어져 그야말로 헌법이 새로 제정되는 것에 가까운 변화가 일어났다.
마침 그때 남한도 박정희 정권하에 10월 유신을 벌였다. 유신체제는 얼마 못 가 끝나버렸으나 주체사상은 21세기에 들어서도 계속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30여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북한의 [wiki:"현실은 시궁창" 현실은]... ~~역시 높으신 분들은 뜨거운 맛을 보기 전까지는 반성을 모른다~~ 수십 수백 만 명이 굶어죽고 왕정에 비견될 권력이 세습되는 마당에도 이북이 조용한 걸 보니 역시 사상의 힘은 무서운 것 같다?
위의 '5.25 교시' 항목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주체사상이 확립되면서 이전까지 남한과 그 수준이 비슷하거나 일부 분야에선 오히려 남한보다 훨씬 우위에 있었던[* 한 예로 고고학이 있다. 본래 북한의 고고학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분단 이후 북한의 고고학을 주도했던 인물인 도유호와 한흥수는 각각 비엔나 대학과 프라하 대학에서 유학 경험이 있던 엘리트였고 이들의 주도로 관련 인력 및 제도가 정비된 북한 고고학계는 남한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북한의 모든 학문 체계는 말 그대로 박살났다. 모든 것이 김일성-김정일 유일사상 체제에 종속된 마당에 중립성과 객관성이 생명인 학문 체계가 유지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학술 활동의 가장 기본 요소인 '논문'에서도 주제를 막론하고 서론에 김일성 부자에 대한 찬양 문구가 먼저 기록될 지경이다. 이를테면 신부님이나 목사님께서 성경 말씀을 인용하고 난 후 강론, 설교를 시작하는 것처럼, 김일성 일가의 어록에서 조금이라도 해당 학문 분야에 관련이 있는 문장을 찾아 먼저 거론하고 나서 논의를 시작하는 것. 당연히 논의의 폭이 크게 제한될 수밖에 없고, 학문적 객관성은 안드로메다로 가게 된다. 애초에 김일성 일가의 독재자들이 제 가문 독재와 관련된 사안 외에는 딱히 깊이 아는 분야가 없는지라, 실제로 북한 학자들의 논문에 기재된 김씨 일가 어록들을 보면 정말 초보적인 내용의 문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그래도 어떻게든 이 유치한 소리에 끼워맞춰 연구를 진행해야 할 북한 학자들 지못미.]
남한에서의 상태
남한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이 극도로 높아졌고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의 존재로 인해 주체사상이 뿌리내릴 수 없었다[* 이 시기엔 단순히 정부에 반대하는 수준도 빨갱이로 매도당하는데 주체사상이 뿌리내릴 일은 더더욱 있을 수가 없었다.]. 다만 일부 학자들이나 소수의 운동권들 사이에서 존재 자체만 암암리에 전해지는 수준이었다.
남한에서 북한식 사회주의, 다시 말해 김일성과 그 일파를 추종하는 재야 운동권은 소수지만 언제나 존재했긴 했다. 이는 남한 운동권의 흐름상 사회주의가 유입되기 어려웠기 때문에 크게 확산될 수 없었던 것이다. 1970년대까지의 운동권은 오로지 매판자본 비판 수준에 머물러 있었을 뿐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부르주아 민주주의 운동 이상을 기대하기 어려웠다는 것.[* 이게 또 김일성으로 하여금 "남조선 인민들은 스스로 해방 투쟁을 할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무장공비를 지속적으로 침투시켜서 해방구를 만들고 봉기를 시켜야 한다"고 믿는 원인이 되었다. --아니 그것보다 너네한테 관심이 아예 없는데...이 무슨 얀데레--] 1970년대가 다 지날 때까지 운동권들의 입장은 김일성의 항일 운동 경력이나 정통성을 인정하는 정도였지 김일성의 학문적인 성과라든가 노작들을 숭배하는 수준까지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쉽게 말해 한국의 [wiki:"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 정도로 평가하는 수준. --하긴 주체사상 자체가 스탈린주의 표절에 가깝다-- 과거 20세기 국제주의 운동들이 소련을 '좀 이상하긴 하지만 어쨌든 사회주의 국가'라고 실드 치던 모습과 비슷하다. 이 시기의 북한 관련 조직 사건은 통일혁명당 사건이 있다. 이 당시에는 북한의 남파 간첩과 연계가 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10월 유신 이후 남한 사회가 극도의 통제국가 체제로 전환되면서 망했어요.
아무튼 이 시기의 운동권들은 주체사상과는 거리가 있다. --주체사상이 발명되기 전부터 활동하던 사람들도 있으니 당연하지--
80년대 들어 주체사상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터져나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자생적 종북 세력이 등장한 것. 이들은 "미지의 세계"였던 북한에 대해 단순한 호기심 반, 동경심 반으로 북한 방송을 들으며 북한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생각보다 북한이 상당히 개발된 현대적인 국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반공주의 교육에 대한 반동으로 주체사상으로 전환하게 된다. --까가 빠를 양산-- 이들은 대학 내 지하조직들을 통해 전파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기존의 민족주의적 기풍과 결합한 NLPDR 이론이 80~90년대 운동권을 풍미하였으며 이들을 주사파라고 한다. 이들은 앞서 말한 대로 북한과의 연계가 없었고 북한과의 연계는 나중이 되어야 생겼다고 한다. 80년대 소위 '강철서신'으로 불리우는 일련의 ~~불쏘시개~~ 저작들로 주체사상 도입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던 김영환조차 91년이 되어서야 실제로 북한에 가봤다고 한다. 주사파와 북한의 연계가 얼마나 없었는지에 대한 하나의 일화로 주사파에게 고정 간첩이 접근했는데 '우리의 북한쨩이 이렇게 치졸하게 남파 간첩 같은 거 보낼 리 없다'라며 국정원에 신고한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링크. 이들은 자기들끼리 모여서 북한 관련 저작물이나 라디오 녹음 테잎을 돌려 들으면서 열심히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던 것.(...) 이들의 존재에 북한 당국도 놀랐다(...)고 한다.
이 같은 사례를 보면 주체사상은 강력한 '사상 무기'였던 것은 틀림 없다. 이는 사실 의도한 바는 아니고 소 뒷 걸음질 치다가 쥐 잡은 거나 다름 없는 수준이기는 한데, 일단 그 내용은 실존주의, 낭만주의 짝퉁이지만 다른 공산주의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주체사상의 존재는 좌파 청년들에게 상당히 '흥미'를 불러일으켰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북에서 자기들 스스로 사상을 만들어냈다고 선전하면서 기존에 사회에 깔려 있던 '민족주의 자주의식'과 쉽게 호응을 이룰 수 있었다. 즉, 대학생들이 "우리 민족만의 사상이 있었네?"라고 착각하게 되었다는 것. 물론 실상은 정신승리적 낭만주의의 짝퉁에 불과하여 별다른 값어치가 없지만 저열한 지적능력 때문에 북한의 선전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결과 민족주의의 주화입마에 걸리게 되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신승리적인 낭만주의가 가지는 보편적인 호소력에 있다.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정신승리론은 시크릿 류의 자기개발서에서 볼 수 있듯이 현대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시장성(?)은 확보하고 있다. 현대, 특히 여가가 많은 대학생은 공허함을 느끼기 쉽고 뭔가 그럴듯한 소리로 철학적 빈곤함을 채우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주체사상은 이 틈을 파고들었다.
진보신당은 민주노동당에서 갈라서면서 민주노동당 당내 주사파들의 횡포를 분당 이유 중 하나로 들었다. 흠좀무.
주사파는 현재도 존재하는 걸로 추정이 된다. 하지만 1996년 한총련 사태 이후 세력이 꺾이기 시작하여 97년 두 차례 구타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거기에 한총련에서 많은 단체[* 행진, 전학협, 다함께, 한대련 등등. 다만 행진, 전학협은 PD 계열이고 다함께는 IS 계열이다.]가 떨어져 나가면서 현재는 세력이 미미한 상태긴 하다. 게다가 남한 경제가 발전하고 북한의 실상이 알려지면서 대부분의 주사파가 전향을 했으며 남아있는 주사파들도 자주민보급이 아닌 이상 주체사상을 대놓고 말하지는 않고 있다. 위에 나온 주체사상 도입의 선구자 김영환도 북한을 다녀오곤 북한의 모습에 실망하곤 전향하여 뉴라이트[* 북한 민주화운동도 여기에 포함된다.] 활동을 하고 있다고.
참고로 앞서 언급했다시피 주체사상을 만드는 데 기여한 황장엽이 탈북한지라 북한으로선 그를 껄끄럽게 생각하는 듯. 실제로 2010년 4월 20일 간첩이 황장엽을 암살미수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런데 조금 웃기는 점은 황장엽의 주체사상도 남한 쪽에서 보기엔 그다지 민주주의적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보도연맹 사건의 주동자인 오제도하고 의형제를 맺기도 했다.] 그는 남쪽으로 내려온 후 "3권 분립을 넘어서 인민의 정치 향상을 돕는 부가 추가되어야 한다"는 발언이나 사회유기체설을 옹호하는 발언들을 여러 차례 하면서 자신의 주체사상도 결국 김일성이란 한 개인을 엘리트 층으로 바꾼 차이밖에 없지 않느냐라는 비판을 샀다.
여담이지만 흔히 남쪽의 진보 세력들을 한데 묶어서 주사파라고 보는 경향이 주로 보수 세력 사이에 만연한데 물론 여전히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세력이 있을 지 모르겠지만 이는 자기 아니면 모두 적이라는 엄청난 병크에 속한다. 그러니 아무나 붙잡고 주사파라고 말하는 병크는 저지르지 말자. 오히려 주체사상은 수령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말한다는 점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전제하에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정치, 경제적 불평등과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를 없애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더불어 살아가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주장하는 진보, 좌파와는 정반대 개념이다. 다만 이런 경향은 진보 진영에서 자초했다고 할 수 있는데 멀리 갈 것도 없이 2012년 총선에서만 해도 노회찬, 유시민, 심상정 등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진보 인사들이 NL계열이 사실상 장악한 통진당에서 활동했으며 제1야당인 민주당 또한 그런 통합진보당과 연대하여 총선을 치른 탓에 진보 세력이 주사파와 한 묶음으로 인식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근데 사실 이 논리라면 지만원같은 사람을 예시로 하며 모든 보수 세력들은 수꼴이다 라고 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그리고 지금 이 사상의 창시자가 묻혀 있는 곳이 과연 어디인가를 생각해 본다면 누구를 주사파라 해야 하는지--
종교인가?
일단 주체사상을 종교로 보는 시각은 주류는 아니다. 하지만 김일성을 창시자로, 김정은을 교주로 하는 종교처럼 작용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주체사상을 종교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프레스턴 헌터라는 프로그래머가 운영하는 개인 웹사이트 애드히어런츠 닷 컴(adherents.com)에서는 '주체이즘' 혹은 '김일성교'는 종교 사회학의 관점에서 보면 엄연한 종교라고 말한다. 종교 딱지만 안 붙었다 할 뿐 종교의 필수요소인 교리문답도 있고 성지와 의식체계 및 숭배의 대상을 명확히 갖췄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도 경희대학교 신은희 종교학 교수 등 아예 대놓고 "주체교"라고 부르면서 종교 취급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냥 북한판 왕권신수설이라고 생각하는 게 가장 편하다. 왕권신수설은 신은 모든 것을 지배하며 왕은 신의 대리인이니 절대 복종하라는 논리면 주체사상은 인민대중은 국가의 주인이며 그 인민대중의 대리자인 주석은 모든 것을 지배한다.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아니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던 유럽에서는 그래도 왕권을 견제할 수 있는 귀족 등이 있었지만 북한은 그마저도 없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
주체사상과 대한민국 국가보안법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반국가단체로 보며 찬양고무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한 대한민국의 현행 국가보안법상, 대한민국 국민이 주체사상을 '건드리는' 행위는 법에 저촉될 여지가 있다.
국가보안법의 존속에 대해서는, 다른 법으로 처벌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며 반대하는 입장과 안보 환경상 폐지는 시기상조라며 찬성하는 입장이 맞선다. 변호사 등의 영화가 이 주제를 반대 입장에서 다루고 있다. (찬성 입장 작품 등은 추가바람)
다만 주체사상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순수 학문연구[* 여기서 말하는 '연구'는 무슨 거창한 학위 논문 이런 것이 아니라 개인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행위.]의 목적으로 북한에서 발간한 자료를 취득하였다고 하자. 이는 국가보안법 제 7조 제 5항에 명시된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는 행위를 할 목적"이 아니므로 국가보안법의 찬양고무죄로 처벌할 수 없다.
또한 주체사상은 파시즘과 다를 바 없거나 오히려 그보다 더한 천하의 쓰레기 같은 사상이라 판단하든 아니면 주체사상은 [지상락원] 건설에 제일 적합한 반석이자 내 삶의 나침반이라고(...) 생각하든 이 자체로는 아직 내심의 판단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는 헌법상 양심의 자유, 더 좁게는 양심 형성의 자유로 보호된다.
문제는 만에 하나 주체사상에 깊은 감동을 먹은 뒤(...) 길거리에 나가 "[wiki:"대순진리교"주체사상을 아십니까?]" 하거나 혹은 온라인에서 주체사상을 옹호하는 등의 의견을 표명하는 경우. 이 지경이 되면 국가보안법상의 찬양고무죄에 저촉될 수 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절대시계를 받게 되겠지~~ ~~[창시자]를 국립묘지에 안장시켜 준 나라에서?~~
기타 주체사상
주로 정신승리론과 유사하다. 주체사상에선 이 부분을 승리적 관점이라고 부른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을 참고.
강제로 애국심을 강요한다거나 물질적인 보상보다는 정신적 만족을 추구해야 한다거나 하는 경우이다. ~~그야말로 철저하게 높으신 분들 편할 대로의 논리~~
뉴라이트와의 연관성
뉴라이트는 대부분 80년대 주체사상을 신봉하며 김일성을 찬양하고 주체사상 체제로의 통일을 추구하다가 90년대 들어와 북한 체제의 실상을 알게 되고 나서 정반대 방향으로 전향한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구성되었다. 그런데 이들이 겉으로는 전향을 했다고는 하지만, '지도자에 대한 신격화'와 '인간 존엄성에 대한 부정' 등 주체사상적 사고방식에는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비판이 많이 나오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뉴라이트 항목 참조.
결론
~~공산주의~~, 국수주의, 파시즘, 국가주의, 전체주의, 영웅주의 등 세계 모든 사상의 나쁜 점만 집대성한 뒤 독재권력의 유지에 적합하도록 짜깁기한 최악의 이데올로기~~인 동시에 20 ~ 21세기 역사상 최악의 사이비 종교~~라고 결론내릴 수 있다.
참고문헌
주체사상의 형성과 변화, 손광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