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P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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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 운동권, 학생운동

목차

개요

80년대 중반 한국의 학생운동 진영에서 제기된 이념 논쟁. '사회구성체 논쟁'이라고도 한다. CNP란,

* CDR(Civil Democratic Revolution, 시민민주주의혁명)
* NDR(National Democratic Revolution, 민족민주주의혁명)
* PDR(People's Democratic Revolution, 민중민주주의혁명)

의 세 가지 계통의 약자이다. 이 셋 중에서 NDR이 운동권의 주류 위치를 차지했다. 80년대 중반에 NDR은 주체사상을 수용한 세력이 성장하면서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NLPDR)으로 진화하여 80년대 후반에는 다수파 민족해방(NL) 노선과 소수파 제헌의회(CA) 노선으로 분립된다. 이때 CA 노선에 대한 비판으로 헌법제정민중회의(*****C) 노선이 등장하며, CA 노선은 자기해체 과정을 거쳐 CA다수파는 NL 노선에 합류하여 NL-좌파가 되고 CA소수파는 민족민주(ND) 노선의 소수정파로 존립한다. 한편,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을 수용한 여러 소정파들이 형성되었는데, *****C와 아울러 민중민주(PD) 계열로 통칭되었다.

비판

80년대 당시 학내 운동권 세력들은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려는 의도로, 더 나아가서는 새로운 사회를 설립하고자 하는 의도로 여러 이론적 기반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그 기초가 될 사상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는 결여되었기 때문에 사회주의 이론을 바탕으로 다소 이상한(…) 이론을 재조립해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이러한 사구체 논쟁인 것이다. 당시 사구체논쟁은 학생운동, 재야운동권, 노동운동을 비롯한 운동권 각계각층의 이론가들이 총 망라하여 나름대로 심도있게 벌인 논쟁--키배--이었다.

근본적으로 서양 역사와 사회에 기반한 사회 이론을 당시 한국 사회의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받아들였다가 망한 케이스라고 평가받는다. 당시 이런 병크를 저지른 집단이 국제적으로 한둘이 아니다.

또한 당시 운동권의 분파 프레임은 이 당시 학생운동을 했던 인원들이 주도하고 있는 현대 한국의 진보정치에, 주로 부정적인 면에서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역사

80년대 이전

사실 80년대 이전까지 한국에서 재야 운동권은 대부분 민족주의운동이나 부르주아적 자유민주주의 혁명운동에 지나지 않았다. 4.19 혁명부터 시작된 사회운동의 계보를 관찰해 보면 좌파를 비롯한 사회주의 운동은 아직 금기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70년대까지 재야 운동권에서 인기를 얻은 이론은 매판자본론이나 종속이론, 반독재 자유주의 이론이었지 사회주의는 별 인기가 없었다. 아니 인기가 없었다기 보다도 반공법국가보안법의 통제,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인해 공산주의에 대한 시민들의 반발로 성장할래야 성장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60~70년대 내내 남한에 좌파사회주의, 주체사상 노선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50년대에는 서울대 도서관에 일본어로 된 <자본론> 등 여러가지 책들이 비치되어 있어서 의외로 손쉽게 접할 수 있었고, 1960년 총선에서 사회주의 계열정당인 사회대중당이 의석을 확보하기도 했으며 박정희 정권 하에서 합법정당으로 활동했던 사회민주주의계열의 통일사회당도 존재했다. 그리고 60년대 초반의 사회대중당등 사회주의 정당을 북한이 지원했던 일도 있었고, 통일혁명당같이 북한과 직접적인 연계가 있는 지하당도 존재했다. 소수이긴 했지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표방하는 집단도 존재했다. 물론 이들은 지속적인 단속과 탄압으로 하나둘씩 역사속으로 사라졌고, 70년대에 유신독재가 강화되면서 끝없는 침묵 속으로 빠져든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한국은 기본적으로 반공국가의 기조가 강했기 때문에, 조직이 커질 수 없는 듣보잡 신세를 면하지 못했고, 일반 사람들에게 사회주의니 뭐니 하는것은 천하의 개쌍놈들 취급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80년대 초반

그러던 중 80년 5월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터지게 되고, 재야 운동권은 심각한 충격을 받기에 이르른다. 그때까지 재야 운동권은 미국(정확히는 [wiki:"지미 카터"카터] 행정부)의 인권외교로 인해 미국을 우방으로 믿고 있었지만 미국이 수수방관하는 바람에 엄청난 희생자가 났다는 결론에 부딪히게 되고,[* 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을 이상적인 국가로 바라보고, 미국식 민주주의 시스템이 한국의 롤 모델이라고 파악하는 이론가들도 꽤 많았다.] 또한 단순히 이때까지의 시민민주주의/자유주의 민권운동에 국한되는 이론으로는 사회의 구조적인 개선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학생운동가들과 재야 운동가들은 본격적으로 좌파 사상을 대안으로서 학습하게 된다. 80년대 초중반은 "원전 탐독의 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조잡한 필사본이나 복사본으로 된 자본론이나 <공산당 선언>, <모순론>, <무엇을 할것인가> 등등 외국의 서적들을 돌려보기에 이르른다.[* 물론 당시에는 금서였으니 번역의 퀄리티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러던 와중에, 사회 혁명에 도달하는 방법과 사회 혁명의 모델을 구상하던 재야 운동권의 사람들 사이에서 "현재 한국의 사회발전 단계가 어디냐"와 "변혁의 주체인 민중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기에 이르게 된다. 이는 사회혁명 운동을 할 때 필수적으로 현재의 정세 파악이 국가의 근간을 구성하고 있는 민중이 누구냐를 따지고 가야 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바로 이것이 "사회 구성체 논쟁"(약칭 사구체 논쟁)이다.

사회구성체 논쟁은 이전까지의 재야 운동권의 이론과는 사뭇 달랐다. 왜냐하면 기존의 민족주의 운동이나 자유주의 운동가들의 시각에서 사회 혁명은 "독재가 물러가고 모든 시민들이 한 표씩 얻는" 상황만 도래하면 종료하는 것이기 때문. 하지만 사회구성체 논쟁은 이러한 정치적 민주주의를 넘어서 사회 구조적 개혁으로 노동자/농민등의 민중이 주체가 되고 사회의 모순을 생산하는 자본가/군벌들이 타도되는 사회를 최종점으로 잡았다. 이는 사실 맑스/레닌주의의 무산대중 혁명 이론에 근거한 것이다.

80년대 중반

하지만 80년대 중반 주체사상이 학생운동을 비롯한 운동권에 본격적으로 스며들기 시작하면서, 이전까지의 이론에서 설명되지 않던 한국인의 민족성에 대한 부분이 해소(?)되기에 이른다. 이전까지의 이론들은 민중이 혁명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있었지만 서로서로 우리가 남이가 식의 공동체 정서가 남아있는 한국에서 무자비한 계급혁명을 완수할 이론적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주체사상은 깔끔하게 이를 "민족적 애국인사"와 그렇지 않은 자들로 이분화 시켜버린다. 일단 민중 주체의 혁명을 하긴 하되, 양심적인 자본가나 기업가는 우리 편이고, 민족적 공동 이익을 위한 그 외의 사회 상층부 인사들도 전부 규합 대상이라는 것. 이들은 현 단계를 일제시대와 별 다를바 없는 식민시기로 규정했기 때문에 민족해방이 우선이라고 불렸고, 민족공동체 건설을 최 우선으로 꿈꿨다.--wiki:"나치당" 국가사회주의?-- 이들이 바로 NL이다.

이러한 주체사상의 유입은 당시 젊은 세대들에게 애국민족이라는 기치 하에 엄청난 감수성 폭발을 일으키고, 순식간에 사회혁명과 민족봉승을 동시에 이룰 수 있다는 꿈을 심어주기에 이른다. 반면 민족이 장땡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현 단계가 아직 레닌의 이론에 나와있듯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완성단계에 머물러있고, 이를 먼저 해결 해야 그 다음에 비로소 민중이 주체가 될 수 있는 사회가 다가온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들은 사회 상층부와 민중(민족)을 분리한 민족민주주의 혁명이 완성되어야 그 다음에 민중이 주체가 되는 혁명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이들은 민족 민주주의를 주창했기 때문에 ND라 불렸다.

그리고 소수의 좌파가 모여 정통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표방하는 집단을 만든다. 이들은 인민(민중)민주주의 혁명을 주창했기 때문에 PDR이라고 칭해졌다.

80년대 후반

80년대 중반까지 원래 이들은 계속적으로 이론적 갈등을 겪다가, NL과 ND일부가 합류하여 NL로 진화하고, ND의 잔류세력과 PDR이 합쳐져서 제헌의회(CA) 세력이 된다. CA는 당시 현재의 정부를 타도하고 제헌의회를 구성해서 아예 나라를 새로 만들자는 논리를 내세웠다. 이는 사실상 러시아 혁명의 진행과정에서 케렌스키 정부의 설립을 본딴 것이다. 사회구성체 논쟁은 딱 이 시기에 터져나온 것이다.

80년대 말에 와서 CA파는 해체되었다. CA파 중 일부는 NL 집단으로 들어갔지만, 이들은 주류 NL과는 달리 북한의 주체사상에 반대하는 소위 '비주사 NL'(NL좌파) 노선으로 나섰다. 나머지 CA파는 대오를 가다듬고 민중민주(PD)로 진화했다. 그 이후야 우리가 다들 알다시피 6월 항쟁, 직선제, 노태우의 당선 등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현대사이다.

90년대 이후

90년대에 들어서 이념 논쟁의 기반이었던 학생운동 자체가 쇠락하였다. 학생운동 자체의 문제도 있었으나(이게 직접적으로 드러낸 사건이 1996년 한총련 사태와 1997년 구타 살인 사건이며 이 사건은 한총련이 결정적으로 쇠하게 된 사건으로 꼽힌다,), 학생운동 대신 정치적 이슈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 소위 '시민사회 세력'이 성장한 것도 학생운동 쇠퇴의 원인이었다. 이를 두고 학생운동은 그 사명을 다했다는 비관론도 없지는 않다.

그래도 이들 세력을 기반으로 1998년 국민승리21을 거쳐 본격적인 진보 정당인 민주노동당이 출범하고 진보 세력이 정치권에 입성하면서 8~90년대의 사상 논쟁이 열매를 맺었다고 평가하는 시각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성과는 2013년 통합진보당의 ~~깽판질~~부정선거와 진보 정당의 대분열로 인해 다시금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2000년대에 들어 학생운동은 정치적 사안을 벗어나 학내 인권 운동이나 청년 실업 문제 등 사회 현안에 집중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의 정치적 이론을 가지고 싸우던 기존 운동권 세력은 세가 미약해졌다. 그 와중에 학생운동 개혁 이론이 나오기도 했지만 정작 현장에선 별 성과를 얻지 못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