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시프 스탈린
||||||||||<tablealign=center><width=10%> 소련 공산당 서기장 || || 이오시프 스탈린(1922~1953.03) || → || 게오르기 말렌코프 (1953.03~1953.09) ||
||||||||||<tablealign=center> < 1939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 || |||||||||| attachment:/time_1939.jpg?width=190 || || 1938 - 아돌프 히틀러 || → || 이오시프 스탈린 || → || 1940: - 윈스턴 처칠 ||
||||||||||<tablealign=center> < 1942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 || |||||||||| attachment:/time_1942.jpg?width=190 || || 1941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 || 이오시프 스탈린 || → || 1943 - 조지 C. 마셜 ||
||||<tablealign=center> https://b86a38.medialib.glogster.com/media/ec4adf94975e8dd1042d49e3de20dc86b105d7b898dc29f61d0f3d7a4e40a4e4/portrait-of-joseph-stalin-1879-hi.jpg?width=250 || || 이름 ||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br(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Сталин/Joseph Stalin) || || 생몰년 || 1878년 12월 18일 ~ 1953년 3월 5일 || || 출생지 || 러시아 제국 그루지야 고리 || || 학력 || 트릴리시 신학교 중퇴 || || 배우자 || 에카테리네 스바니제, br 나데즈다 알릴루예바 ||
||https://totalitarism.ru/bibliophagus/stalin_icon_large.jpg?width=500%7C%7C
스탈린 이콘
~~엄지에 힘은 빼시죠 십자가로 내려칠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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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전당대회 연설. 하도 뽀샵이나 조작으로 범벅된 일생이라 사진이 제대로 찍힌게 없다(...) 그나마 영상이 제일 정확하다. 사실 청중들이 지루해서 턱을 괴고 있는 듯한 행동을 취하고 있는 것은 스탈린의 연설을 들으려 귀에 이어폰을 대기 위해서임이 영상에서 확인된다. 소련이 다민족국가라서 소수민족 언어로도 번역해서 들려 준 것인지, 걍 볼륨 좀 더 키워서 들려 준 것인지(…)는 불명. 엄청난 연설능력을 가졌던 레프 트로츠키나 [아돌프 히틀러|히모씨][* 엄밀히 말헤서 히틀러의 경우, 연설 자체의 내용은 별 것 없다. 그는 몸짓, 말의 톤과 투 특히 무대설정이라는 연설 내용 외적인 요소를 통해 감정적 자극을 이끄는데 능숙했다. 말의 내용을 전달하는 능력이 뛰어난게 아니라 선동하는 능력이 뛰어났다는 것. 실제로 말이 지리멸렬하고 중구난방하며 모순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선동 자체가 나쁜건 아니지만 어찌되었든 그러하다. 오히려 연설능력 자체가 뛰어났던 인물은 그의 친구 중 하나인 무솔리니.]와는 달리 스탈린의 연설은 매우 평이하게 원고나 읽는 수준이었다. 일단 러시아어가 모어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원래부터 말이 없는 성격이었다.러시아어를 조금 아는 사람은 눈치채겠지만 스탈린의 연설에는 러시아어 특유의 엑센트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다.
이름
* 러시아어 : 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Ста́лин * 영어 : Iosif Vissarionovich Stalin
~~2×5=10=스탈린~~
그루지야어 초명은 이오세브 베사리오니스 제 주가슈빌리(იოსებ ბესარიონის ძე ჯუღაშვილი, Ioseb Besarionis dze Jughashvili).[* <크렘린의 수령들>에 따르면 레닌은 1915년에 지노비에프에게 보낸 자신의 서한에서 이런 질문을 했다. "코바의 성을 기억하시는지요?" 그리샤(지노비에프)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레닌은 그에 대해 재차 카르핀스키에게 묻고 있다. "부탁이 있습니다. 스티프코나 미하에게 코바의 성을 알아봐 주십시오. 우리는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시프 드주……뭐라고 했는데……."] 조지아어 '제(ძე)'는 '아들'이라는 의미이고 '베사리오니스(ბესარიონის)'는 아버지의 이름인 베사리온. 따라서 러시아어식으로 바꾸면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주가시빌리(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Джугашвили, Iosif Vissarionovich Dzhugashvili)가 된다.
이오시프라는 이름의 영어식 표기인 조지프 스탈린(Joseph Stalin)으로 부르는 사람도 제법 있으니 참고하자. 영미권 국가에서 만든 2차대전 관련 다큐멘터리 등지에서도 이 이름으로 자주 나온다.
가명으로 코바(კობა)가 있는데, 그루지야인인 알레크산드레 카즈베기(ალექსანდრე ყაზბეგი)가 쓴 소설 '아버지 살인(მამის მკვლელი, 마미스 므크블렐리)'의 주인공 코바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 주인공은 말하자면 로빈 후드 같은 인물이었다. 스탈린의 친구였다가 후에 숙청된 부하린은 처형 직전에 "코바, 왜 나의 죽음을 원하지?"라고 시작되는 편지를 썼다.[* 스탈린은 이 편지를 죽을때까지 자기 책상 서랍안에 보관하고 있었고, 그가 죽은후에 발견되었다.] 애칭으로 자주 쓴 모양이다. 바로 위에도 나오듯, 레닌이 다른 사람들에게 스탈린의 성을 물을 때도 코바라고 불렀다.
그 밖에도 '랴보이'(마맛자국)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이것은 그가 어린시절 천연두를 앓아 마맛자국이 있었기 때문. '가이오즈 니자라제(გაიოზ ნიჟარაძე, Gaioz Nizharadze)'라는 별칭도 조금 쓰였다.
가장 유명한 별칭은 항목명과 같은 스탈린. '스탈린'이란 '강철 사나이'라는 의미로('스탈'은 러시아어로 강철을 뜻한다.[* 여담으로 '스탈'은 쿠르스크 전투에서 소련군의 반격암호로도 쓰였다.] ~~쇠돌이?~~), 1912년부터 레닌의 제의로 쓰게 된 성이다. 본래의 성은 위에도 나와있듯이 주가슈빌리인데 고대 그루지야어로 주가(ჯუღა, djuga)는 철을 의미하는 말이였다고 한다.
~~다른 추가적 별명으로 조지아의 인간백정, 대원쑤, 맨오브스틸 등이 있다~~--[조조]를 능가하는 지도자--
개요
소련의 제1대 서기장, 혁명가, 정치가, ~~군인~~[* 독소전쟁이 개시되자 스스로 원수계급을 달았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는 대원수(генералиссимус) 계급을 신설하여, 스스로 취임. 처음이자 마지막인 소련 대원수에 올랐다.] 수백만 인명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소련을 미국과 맞먹는 초강대국으로 성장시켰다.
캅카스의 그루지야 출신이다.[* 일설에 의하면 남오세티야와의 접경지역, 혹은 오세티야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러시아 출신이 아닌데도 그는 평생 러시아의 내셔널리스트였다. 그의 반대 선상인 극우에 서있던 아돌프 히틀러 역시 독일인이 아닌 오스트리아인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참으로 역사 속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913년에는 캅카스 민족들은 우월한 러시아 문화에 머리 숙이고 들어와야 한다!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다. ~~네놈이 그루지야인이라는 것은 까먹었니?~~ 히틀러가 스탈린을 가리켜 볼셰비즘을 러시아-슬라브 민족주의로 바꾸었다라고 평가한게 결코 틀린 말 아니다. 현재 학자들까지도 히틀러의 평가가 일리있다고 본다.[* 리처드 오버리 <독재자들>] 더욱 흥미있는 점은, 볼셰비키 지도자 중 한 명으로 활동하던 당시의 스탈린은 당 내에서 대표적인 민족문제(특히 소수민족 문제) 전문가라는 평판을 얻었다는 점이다.실제 스탈린 선집에는 민족문제에 관한 스탈린의 논문이 들어있기도 하니 궁금하거나 맑스주의를 공부하는 위키러들은 참조하는것도 나쁘지 않다.
별명은 '강철서기장', '인간백정', 강철의 대원수. 지구상에서 인간을 가장 많이 죽인 권력자로는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이다. 스탈린이 실시한 대숙청 및 기타 숙청 작업에 의해 죽은 숫자만 약 60만명 이상으로 추정되며, [굴라그]]에 끌려갔다가 사망한 사람들까지 합하면 사망자는 좀 더 많아진다. 60만이라는 이 수치는 스탈린을 최대한 깎아내리려고 작정하고 집계한 니키타 흐루쇼프 치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사실 대체로 축소되지는 않았다고 보는게 타당하다.[* 200만 정도로 잡기도 하지만 200만은 좀 많이 잡는 경우이며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독재자들>의 저자 영국 역사학자 리처드 오버리는 180만 정도로 추산한다.]
그리고 정책 실패로 굶어죽은 사람 수백만 명은 덤. 사실 같은 살인마라고 칭송받는 마오쩌둥도 마찬가지다.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에 의해 맞아죽거나 자살한 사람은 사실 40만 이하이고, 일부 인터넷 논객들이 대부분 마오가 "학살"했다고 주장하는 수천만명은 대약진 운동 시기에 정책실패로 굶어죽은 사람들이다.[* 문혁의 사망자에 대한 중국 정부의 공식적인 통계는 4만명도 안 된다고 하나, 맥파쿼 등은 '농촌에서만' 3600만 명이 박해받아 그 중 75만~150만 명이 죽었다고 하고, 영국에서 활동하는 장룽은 300만 명을 추정치로 제시하고 있다. 사회학자 Daniel Chirot은 최소 백만, 최대 2천만 명의 사망자를 제시하고 있다. 중국 정부의 통계가 부실하고, 제대로 된 진상 규명의 시도가 없어 자세한 것은 안드로메다로... 다만 장룽(장융)은 반체제작가로서 그가 쓴 마오 전기인 "마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는 중국 역사 전공자들에게 부정확한 인용과 사료검증없는 사료인용으로 크게 비판을 받았다.][* 대약진 시기의 대기근은 마오쩌둥의 병크의 탓이 7할 이상이지만, 3할은 중공 정권 창립이후 인구가 너무 늘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 집권 이후 대약진 시기까지 인구가 1억 5천만이 늘었고 (5억 → 6억 5천만), 실제로 대약진에서 2-3천만명이 굶어죽는 와중에도 중국의 인구는 계속 늘고 있었다.(..)] 그런데 마오쩌둥이 한 행각 중에서는 문혁이나 대약진 외에도 반우파투쟁 등으로도 탄압당한 이들도 수만 수십만은 된다.
흔히 대숙청이 1937~1938년 대숙청 기간에만 진행되었다고 오해되는데,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1945년을 제외하고는 대숙청 기간보다 정도는 덜하지만 그가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이어졌으며 소련인들에게 이러한 종류의 위협은 일상적인 것이었다. 게다가 사회 전반에 대한 억압과 통제는 오히려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 이후에 더 강해진 면이 있다. 반공적인 입장에서는 독소전쟁 당시 전사한 2700만명 이상의 소련인을 스탈린이 죽인 사람에 포함시키기도 하는데, 스탈린의 잘못이라고 주장하는건 무리가 많다. 아무리 스탈린에 부정적인 러시아인도 독소전쟁 희생자들은 히틀러의 범죄로 보지, 스탈린의 범죄로 보지는 않는다.
후퇴하는 비겁자에게 자비는 없다는 최고 사령부 명령 제270호(1941년 8월. 후퇴하는 자는 즉결처분)[* 여담이지만 장제스도 이와 비슷한 명령을 했는데 효과가 상당했다.]와 악명높은 형벌 부대를 만든 국방 인민 위원회 명령 227호(1942년 7월 형벌 부대 창설명령)등이 역사에 길이 길이 남을 그의 피비린내나는 ~~똘기~~ 예술적(?) 사상이 돋보이는 대표적 작품이다. 붉은 군대 내 방첩부의 이름을 지을 적의 일화를 보면 그의 예술적 똘기가 잘 나타나는데, 그가 직접 제안하여, "스파이에게 죽음을!"(смерть шпионам! 스메르찌 쉬피오남!)의 앞글자들을 따서 스메르쉬(СМЕРШ)로 지었다. 이것이 그냥 별명이 아니라 공식명칭이었다. 우리말로 하자면 "간첩사살"을 기무사령부 공식명칭으로 한 셈.
멋있는 카이젤 수염을 기른 인상적인 용모를 하고 있으나 사실 공식 사진 대다수가 곰보자국을 지운 편집판. '인민의 뽀샵질'이 아니라 '인민의 에어브러시'질이 이루어졌다. KGB의 검열기구 내에 이를 위한 특별팀이 있었다고 한다. 원래 레닌 시절부터 에어브러시질은 소련 정권의 필수품이었다. 한 사람이 숙청되면 곧바로 공식 사진에서 그 사람 얼굴을 날려버려야 했으니까. 이것이 소설 1984의 모티브가 되었다. 물론 뽀샵질도 있었는데, 예를 들면 레닌의 연설에 모인 사람들을 수십배로 뻥튀기한 사진 등이 있다. --혹시 포토샵은 KGB 출신들이 만든 프로그램이 아닐까?-- 스탈린은 어린시절 천연두를 앓은 관계로 그렇게까지 미남은 아니었고 마차 교통사고로 왼팔을 제대로 쓰지못해 병역도 면제될 정도였다. 키도 163cm 정도였는데[* 당시 20세기 초의 동부유럽인 평균키가 160cm대 초반이었다.], 그당시의 키로서는 아주 작은 편은 아니었다. 또한 베니토 무솔리니와 김정일과는 달리 굽높은 구두--깔창--를 신어서 키를 커보이게 하려고 하진 않았다. 이사람은 다른 나라의 많은 독재자들과는 달리 권력 자체에만 탐닉했을 뿐, 허세를 부리거나 사치를 일삼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독소전쟁 전까지는 군복이 아니라 그냥 인민복 차림으로 다닐 정도.
생애
어린 시절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a/af/Vissarion_Jughashvili.jpg/425px-Vissarion_Jughashvili.jpg?width=400 스탈린의 아버지 베사리온 주가슈빌리.
1879년 12월 21일 현 남캅카스 그루지야 동부의 고리(Gori) 시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루지야는 러시아 제국의 일부였다. 아버지였던 '베사리온 주가슈빌리(ბესარიონ ჯუღაშვილი, 1849~1909.08.25)'는 제화공이었고 술주정뱅이에다가 매우 거칠고 폭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심지어 스탈린이 언제 그냥 죽여버릴까 벼르고 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머리는 있는 편이었는지, 그루지야어를 비롯하여 러시아어, 아르메니아어, 터키어에 모두 유창했다고 한다. 스탈린을 제화공으로 만들려고 했으나 스탈린은 이를 거부했고, 그 결과 부자간의 사이는 매우 나빠졌다. 스탈린의 아버지가 사실은 그 마을의 다른 사람이라는 설이 한동안 돌았었다. 스탈린의 부모가 그 마을에서 살때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던 성직자라는 설, 스탈린 자신도 사석에서 이런 이야기를 자주 했지만 사실 신빙성은 없다. 위의 사진에서 보듯 베사리온 주가슈빌리와 스탈린이 똑 닮은 판박이인지라 농담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https://wwwdelivery.superstock.com/WI/223/4266/PreviewComp/SuperStock_4266-16791.jpg 스탈린의 어머니 케테반 겔라제.
어머니 '케테반(또는 에카테리네, ეკატერინე) 겔라제(ქეთევან გელაძე, 1858.02.05~1937.06.04)'는 남편과 반대로 매우 신앙심 깊고 아이에게 모든 정성을 쏟는 여자였다. 아버지는 술마시고 들어와서 어머니와 아이에게 걸핏하면 폭력을 휘둘렀다.[* 이로 인해 스탈린은 훗날 아버지의 무덤을 갈아엎어버린다.] 이런 성장 배경이 스탈린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이 시절 마차에 다친 탓에 왼팔을 자유자재로 쓸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에서 징집 면제되기도 했다. 성인이 되고 권력자가 되었어도 왼쪽이 짧은 컴플렉스 때문에 주머니에 넣거나 해서 숨겼다.
어린 스탈린은 초등교육을 받고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이는 전적으로 어머니의 영향으로 보인다. 스탈린의 어머니는 신앙심이 깊었기 때문에 스탈린이 신부가 되길 원했다. 스탈린은 최고 권좌에 오른 후에 조지아에 있던 어머니를 찾아갔었는데 정치에 대해 잘 모르던 그녀는 스탈린에게 "너 요즘 뭐하고 있니?"라고 물었다. 그러자 스탈린은, "어머니! 차르 아시죠? 전 차르같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스탈린의 말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한 채 "그래? 유감이네... 그렇지만 지금이라도 신부가 되는게 어떠니?"라고 말했고, 이후로도 가끔씩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신부가 아니라 이미 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스탈린의 최대 정적이던 트로츠키에게도 이와 비슷한 일화가 있다. 학생 시절 트로츠키가 혁명운동에 투신하자 아들이 불온분자로 낙인찍혀 장래를 망칠 것을 걱정한 트로츠키의 아버지는 "이 나라는 앞으로 천년은 더 갈거다." 라고 경고하며 허황되고 위험한 행동을 중단하라고 권했던 것. 그리고 10월 혁명이 성공하고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은 후 트로츠키가 아버지를 놀리듯 "아버지는 차르의 러시아가 천년은 더 갈거라고 하셨잖아요?" 라고 묻자 아버지는 웃으며 "그럼 네가 세운 나라가 그보다 더 오래가도록 하려무나."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두 일화를 비교함으로써 스탈린이 한때 동지였던 다른 볼세비키 당 지도자들을 상대로 보인 극단적인 적대행위, 더 나아가 스탈린이 보여준 극단적인 집요함과 잔인성[* 물론 볼셰비키 정권이 보여준 모든 잔인성이 스탈린의 책임일 수는 없지만, 고참 볼셰비키 내에서도 스탈린의 잔인성이 두드러진 것은 사실이므로.]의 원인 중 일부를 성장 환경에서 찾을 수 있다는 관점을 설명할 수도 있다.
일단 스탈린의 일화는 가쉽에 가까운 것이라 사실여부를 완전히 신뢰하기는 다소 힘들지만 스탈린이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아버지와 신앙심이 깊고 자식에게 헌신적이지만 세상 물정에는 어두운 소위 '시골 아낙'인 어머니 사이에서 성장한 것은 분명하다. 이 면에서 볼 때 위 일화에서 스탈린의 어머니가 소련의 최고 권좌에 오른 스탈린에게 굳이 신부가 되라고 권한 것이 세속적 권력~~을 가지고 인간백정질 하는 것~~보다 종교적인 삶에 더 큰 가치를 두었다기보다는, 자식이 가진 막대한 권력 자체를 이해하고 실감하지 못한 것이라고 해석하기가 더 쉽다.[* 실제로 신분적 차별이 강하고, 대중이 정치적 권력을 갖지 못하는 중세적 환경에 익숙한 사람들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 권력자가 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 점에서 트로츠키에 비해 스탈린이 더 주변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하는 성장기를 거쳤던 것으로 볼 여지가 크다. 또한, 스탈린의 신학교 진학 조지아 지역에서 농부나 제화공 같은 육체노동이 아닌 인텔리로써의 진로를 찾으려면 신학교로 가서 성직자가 되는 길 밖에는 없던 상황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트로츠키를 비롯한 다른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대부분 고등학교나 대학 교육을 받고 언론이나 사업, 관료나 군대 등 상대적으로 다양한 진로를 선택할 수 있었던 상황에서 성장한 것과 대비된다.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당시 유럽에 가까웠던 우크라이나나 러시아 서부 지역보다 캅카스 지역은 덜 근대화 된 지역이었고, 이런 성장 환경의 차이로 인한 갈등이나,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근대적 사상을 받아들인 인물에 대한 주변의 반응 차이가 스탈린의 인생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
신학교의 출발은 좋았다. 아래는 로버트 서비스의 <스탈린>에 나오는 그의 학교 생활 초기의 성적표다. 해당 성적표는 5점 만점이다.
|| 성경 || 5 || || 러시아 문학 || 5 || || 역사 || 5 || || 수학 || 5 || || 그루지야어 || 5 || || 라틴어 || - || || 그리스어 || 4 || || 교회 슬라브어 || 5 || || 조지아-이메레티 노래 || 5 ||
그러나 당시 그루지야의 신학교는 억압적인 분위기 아래 학생들에게 차르에 대한 충성을 강요했고, 그루지야를 억압하는 러시아에게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던 스탈린은 점점 신앙에서 멀어져 외부의 혁명활동, 특히 그루지야 독립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러다 보니 장학금을 받던 공부벌레는 당연히 학업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고, 신학교 마지막 학년 때에는 학교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낙제였다는 설도 있고, 스스로 나왔다는 설도 있다. 그런데 정작 학교 기록에는 수업료를 안 내서 제적된 것으로 나와 있다나.
참고로 시인이었다. 그것도 공식으로 데뷔한! ~~뭐 어때 히틀러도 화가가 꿈이었는데~~ 국내에 번역된 책 중에는 <스탈린>(구 <스탈린 : 강철 권력>, 로버트 서비스 저)이라는 책에서 <아침>이라는 시를 볼 수 있고, <달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시도 있다고 한다. <달에게 보내는 편지>는 그의 데뷔작이다. 1895년 <이베리아>라는 지면에 실렸고 교장에게 들키지 않도록 가명을 사용해 1895년~1896년 사이에 시 여섯 편을 발표했다. 그가 주로 다룬 주제는 자연과 대지, 애국심이었다.
> <달에게 보내는 편지> > > 지상의 비밀스런 먹구름 위를 > 예전처럼 거침없이 부유하라. > 그대의 은빛 광채로 > 짙은 안개의 어두움을 흩날려라. > > 잠에 취해 몽롱한 대지에 > 보드라운 미소로 고개를 기울여 > 캅카스 최고봉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라. > 그대를 향해 높이 솟은 얼음 봉우리에게. > > 그러나 언젠가 박해당해 유골이 된 이도 > 시인들이 잠든 그 신성한 언덕에 올라 > 희망의 날갯짓으로 날아오를 수 있음을 > 분명히 알아라. > > 어두운 하늘에서 빛나라. > 창백한 빛으로 뛰놀아라. > 예전처럼 한결같은 빛으로 > 나의 조국을 비추어라. > > 나는 그대에게 가슴을 열고 > 마주 향해 손을 내밀고 > 또 다시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 밝은 그대를 보겠노라. 또 다른 시 <아침>은 당시 조지아 문인들 사이에 유행하던 낭만적인 문어체로 쓰인 감동적인 작품이었다고 한다.
> <아침> > > 연분홍빛 꽃봉오리가 피더니 > 온통 푸른 빛 도는 보랏빛이네 > 부드러운 산들바람에 > 계곡의 백합 풀 위에 누웠네 > > 종달새 짙푸른 하늘에서 노래하며 > 구름보다 더 높이 날고 > 아름다운 목소리로 나이팅게일 > 숲 속에서 아이들에게 노래 불러주었네 > > 꽃이여, 아 나의 조지아여! > 평화가 내 조국에 넘치게 하라! > 친구들이여 노력해 > 빛내라, 조국을! 한국어로 보면 별 거 없는 조잡한 시처럼 보이겠지만, 원어로 보면 또 다르다고 한다. 그루지야의 이아코브 고게바슈빌리(იაკობ გოგებაშვილი, 1840-1912)라는 교육자는 그가 집필한 교과서에 이 시를 넣을 정도였다고 한다[* 스탈린이 집권한 다음에 교과서에 스탈린의 글이 들어간 거라면 대단할 것도 없겠지만, 해당 교육자의 생몰년도를 보면 알 수 있듯 정치적으로 성공하기 이전부터 교과서급 시인이었다는 이야기이다!]. ~~오오 시인 오오~~ 이 때 시는 그루지야 민족주의의 성향이 강하다고 한다.
희한한 것은 이렇게 그루지야어는 유창하고 명문장가였으면서 러시아어는 무미건조하고 평면적인 문장만 썼다는 점이다. ~~러시아어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하시지 그랬어요..~~
은행강도 혁명가
스탈린은 학교를 나온 후 방황하다가 블라디미르 레닌의 글을 접했고, 거기에 감명받아 그가 이끌던 볼셰비키당에 가입하게 되었다. 당시 혁명세력 중 가장 과격한 부류의 분파 중 하나였던 볼셰비키에서 스탈린이 한 일은 혁명운동의 자금 조달이었다. 자금을 조달하는 방법은 결과적으로 범죄일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위험하기도 했고 정파의 도덕성을 의심받을 수 있는 문제였기 때문에 누구도 맡아서 하려고 하지 않았다. 볼셰비키와 대척되는 멘셰비키는 이런 활동들 때문에 볼셰비키를 범죄조직이라고 디스했다. 후에 레닌도 자금조달을 위한 은행강도는 중지시켰다. 모두가 꺼리는 일을 떠맡은 것이다. 자금조달 방법으로 그는 은행강도를 하거나 현금 수송차를 털었다. 이 뿐 아니라 몸값을 위해 인질을 잡거나 납치를 하고 파업을 선동하는 등 그가 벌인 일은 대부분 비합법적인 범죄였다. 때문에 스탈린의 당시 활약은 스탈린 정권 시절에도 쉬쉬하여 잘 안 알려졌었다. 그걸 빌미로 트로츠키에게 혁명에 아무 공헌도 안한 잉여라고 자주 까이기도 했지만. 스탈린의 활약은 21세기에 학자들이 조지아의 문서보관소에서 당대 한패거리들의 회고록을 입수한 뒤에야 제대로 드러나게 되었다. 이전에는 스탈린이 잉여고 트로츠키가 혁명에 공헌했다는 식으로 알려졌는데 이것이 뒤집혔다. 다만 뒤집혔다고 해서 스탈린은 혁명에 공헌했는데 트로츠키는 알고보니 잉여였다는 식으로 뒤집혔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사실 10월 혁명의 전후과정을 보면 트로츠키의 활약이 스탈린보다 화려했던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다만 스탈린은 아무것도 한 것 없는 잉여라는 트로츠키의 주장과는 달리 스탈린 역시 볼셰비키 지도자로써 상당한 활약상이 있었음이 밝혀진 것.(그런데, 트로츠키의 오만하고 독선적인 성격을 생각한다면 설령 트로츠키가 스탈린의 활동 내역을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아무 공적도 없는 잉여라고 까는 것을 그만두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런 짓들을 저지르다 보니 경찰의 일급수배자가 되었고, 체포되어 7번이나 시베리아에 유배되었으나 그때마다 탈출하였다. 스탈린의 반대파들은 이것이 스탈린이 차르의 프락치였다는 증거라며 그를 비난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르 솔제니친도 지적했듯이 적어도 러시아 제국에서의 유형지 탈출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유형지 내에서는 범죄자들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 정도 사냥터를 지나 산을 넘어서 철도역으로 가면 되었고 10월 혁명의 지도자들도 그런 식으로 유형지를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레닌뿐만 아니라 스탈린을 프락치라고 디스한 트로츠키조차 이런식으로 탈출했었다. 물론 스탈린 시절의 시베리아는 탈출 따윈 얄짤없다. 유형지를 대체한 굴라그는 말 그대로 자유 없이 중노동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범죄자일지는 몰라도 남이 꺼리던 일을 맡은 결과 레닌의 신임을 얻은 그는 조지아인임에도 볼셰비키당의 지도급에 진입하게 되었다.
또 당시 스탈린의 혁명동료인 알레크산드레 스바니제(ალექსანდრე სვანიძე)와 남매였던 에카테리네 '카토' 스바니제(ეკატერინე 'კატო' სვანიძე)와 결혼도 하여 아들(야코프)도 두었으나, 이런 도피 생활 때문에 제대로 가정을 돌보지 못했다. 그녀는 혁명활동으로 매일 집을 비우는 남편을 대신해 홀로 아들을 키우다 그만 22세의 나이에 티푸스로 요절했다. 장례식에서의 스탈린은 매우 침통해 보였으며, "아내는 정말로 단단한 나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줬는데… 아내는 내 마지막 인간적인 감정과 함께 세상을 떠났네…."라고 말하기도 했다.[* 아마도 스탈린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자는 카토가 유일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떠나보낸 인간성의 빈 자리 뒤로 강철의 야수가 남았다.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c/cc/Stalin%27s_Mug_Shot.jpg%7C%7C ||1900년에 찍은 머그 샷[* 범죄자를 감옥에 가두기 전에 일렬번호와 함게 찍는 전신사진.] ||
이렇게 감옥에 있던 젊은 시절부터 무서운 정치적 재능이 있어서, 감옥 죄수들을 선동해서 자신은 움직이지 않고 폭력과 살인을 조장했다는 일화가 있다. 링크 참고.
프락치?
오래 전부터 그가 러시아 제국 비밀경찰 오하라나의 프락치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사람까지 살해한 은행강도도 유배형을 받았고 나름대로 편하게 지냈으며 심지어 그는 유배지에서도 애인을 사귀어서 사생아를 여럿 두었다!!! 게다가 유배지에서 자주 탈출하였다는 것이 그 증거, 또한 그와 다른 동지들이 집단으로 체포되었던 때는 프락치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비밀 모임이었다는 점도 있다. 그런 측면에서 대숙청은 자신이 프락치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묻어버리려는 꼼수였다는 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멘셰비키 쪽에서는 스탈린의 이러한 강도짓에 환멸을 느껴서 볼셰비키를 비난하고 그를 혁명운동에서 제명시키려고까지 했었다.
하지만 이런 프락치 설은 오늘날에는 거의 폐기되었다고 보면 된다. 스탈린 시절과는 달리 러시아 제국의 시베리아 유배는 상당히 널널한 편이었고 맘만 먹고 돈만 어디서 구해서 어설프게 위조 서류를 만든 후 역까지 걸어가면 되었다. 스탈린도 자유 상태의 동지들에게 돈을 융통해서 밀반입한 다음에 탈출했었다. 한번은 동지 하나가 그런 돈을 삥땅쳤는데(...) 스탈린은 당연히 정권을 잡은 뒤에 그를 처형시켰다. 스탈린도 한번은 여장해서 기차를 타고 탈출했었다. 사실, 제정 러시아 말기의 유명한 러시아 혁명가들 치고 시베리아 유형 갔다가 탈출한 전력이 없는 사람이 거의 없다. 레닌이나 트로츠키 같은 볼셰비키든, 멘셰비키든, 이들과 사이가 극도로 나빴던 크로폿킨 같은 아나키스트나, 조금 앞선 시대의 바쿠닌같은 인물까지 현재까지 이름이 알려진 인물들은 죄다 시베리아 유형을 갔었던 건 뭐 유명한 인물이니 찍혀서 잡혀간 거라 해도... 이 중에 탈출 실패한 사람이 어째 하나도 없다.(...) 즉, 본인에게 탈출할 의사가 있고, 그걸 도와줄 사람이 있기만 하면 누구나 탈출할 수 있었던 셈이니, 사실상 감시가 없었던 것이다 다름 없다. 네차예프처럼 탈출이 도저히 불가능 할 정도로 철저한 감시를 받았던 인물이 있긴 한데, 이건 사실 유형지에서 간수를 두들겨 패서 감시가 철저해진 것에 가까워서...
논란이 되는 체포의 건도 사실상 당시 볼셰비키 고위직에 실제로 오하라나의 프락치가 있었다. 로만 말리놉스키라는 인물인데, 레닌과 행동을 함께 했으며, 의회 격인 두마의 의원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말리놉스키는 혁명세력의 분열이나 체포에 항상 연루되어 있었다. 후에 의심을 받자 독일로 망명했지만, 레닌은 "그자는 그래도 경찰에 갖다바친 우리당의 정보보다 우리에게 가져온 경찰의 정보가 더 많았다." 고 옹호하기도 했다.
1차대전이 끝난 후 볼셰비키가 정권을 잡자 한자리 해먹을까 해서 러시아에 되돌아 왔는데, 그땐 이미 볼셰비키가 오하라나의 모든 기록을 접수했고, 말리놉스키의 프락치질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결국 체포 후 처형. 다만 이 사람이 볼셰비키가 오하라나 내부에 침투시킨 이중스파이라는 견해도 존재한다. 레닌이 그가 의심을 받고 있음에도 옹호했던 것을 봐서도 그렇다. 공식적으로 들통나기 이전에도 스파이 의혹이 있었는데 레닌과 스탈린을 포함한 다른 동지들의 변호로 살아난다. 레닌과 스탈린이 동지들을 믿지 않고 무분별한 숙청을 시작하게 된 것도 이때의 경험에서 보는 견해도 있다. 스탈린 자신도 비밀경찰 내에 스파이를 두고 있어서 비밀경찰의 움직임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고 하는데 때에 따라서는 프락치들이 무고한 사람들을 프락치로 몰아서 스탈린과 레닌에 의해서 제거되는 일도 심심찮게 벌어졌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연구한 학자의 결론은 오하라나는 프락치를 통해서 볼셰비키를 붕괴시키지는 못했지만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후일 숙청을 통해서 서로 의심하고 죽이고 죽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고까지 했다. 스탈린 자신이 스파이의 여러 정보들을 역정보라고 의심하게 된 이유가 바로 이때의 경험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스파이 조르게의 독소전 정보 등도 스탈린이 무시하고 넘어갔다~~[* 정보전이라는 것은 속고 속이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스탈린의 이러한 접근방식도 틀렸다고 보기는 힘들다. 정보전에선 상대국 스파이에게 가짜정보를 흘리는 경우도 허다하고, 이중스파이나 국가에 충성심이 부족한 스파이들이 자신의 입맛에 맞게 정보를 가공하는 경우도 매우 흔하다. 정보기관에서 권력자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하기 위해 정보를 가공하는 경우도 매우 흔한 사례(이 경우는 '인(人)'의 장막에 둘러싸였다고 표현한다.)인 만큼 일단 매우 중요해보이는 정보나 매우 구미가 당기는 정보는 의심하고 보는 것이 이쪽 바닥이기 때문이다.][* 독소전 역시 '아무리 독일이 소련을 침공할 가능성이 있다 해도 독일이 영국을 이기지도 못했는데 설마 지금 소련을 공격해서 동부, 서부 양면전선을 만들겠어?'라는 생각에 소련이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다는 의견이 군사학계에서도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리하르트 조르게의 첩보도 이런 맥락과 일본군에 대한 견제 필요성(만일 리하르트 조르게의 첩보가 가짜였고 소련이 조르게의 의견에 따라 서부전선에 군사역량을 몰빵했다면, 당연히 소련의 극동은 무주공산이 되고, 그러면 만주국과 중국에서 판치던 관동군이 북상할 여지가 생기게 된다. 소련과 일본제국은 1939년에 이미 할힌골 전투를 치른 전적이 있어 적어도 소련이 일본의 전력을 무시할 상황은 못 되었다. 스탈린이 소련의 극동전력을 포함한 모든 전력을 모두 독소전쟁에 투입할 상황이 되었던 것도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시작으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이다.)을 두고 본다면 오히려 독일의 일본을 돕기 위한 역정보라고 판단할 여지도 있었다. 이미 1940년 나치 독일, 일본 제국, 이탈리아 왕국은 삼국 동맹 조약을 맺은 동맹국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돌프 히틀러는 스탈린이 생각하는 것 이상의 돌아이였다는 점에서 비극이 시작되었다.]
권력을 획득하다
본래 러시아 혁명기에는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내성적이라 나서기를 극히 꺼려(이는 트로츠키와 매우 대조적이다.) 눈에 안띄는 인사였던데다가, 러시아어에도 서툴렀기 때문에, 말많고 논쟁을 즐겨하던 혁명가들 사이에서는 "조용한 사람", "말 없는 사람"이라고 간주되었다. 이랬기 때문에 10월 혁명 이전에 그를 주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훗날 그의 가장 큰 정적이 되는 트로츠키조차도 그가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어눌함의 아래 이글이글 불타는 권력의지가 숨겨져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어눌함은 다른 혁명가들이 그를 과소평가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것 때문에 그는 경계를 받지 않고 수월하게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10월 혁명에 대한 유명한 미국인 사회주의자 존 리드의 르포 <세계를 뒤흔든 10일>에서도 겨우 두번 이름만 언급될 정도이다. 이에 반해 레닌은 물론 트로츠키나 지노비에프는 거의 매장마다 언급되는데, 스탈린은 자신의 이름이 많이 나오지 않고 트로츠키가 더 많이 나왔다고 이걸 금서로 만들어서 소련 인민의 접근을 차단한다. 참고로 이 책은 레닌이 만국의 노동자들로 하여금 읽으라고 서문을 써준 책이다! 어쨌든 스탈린은 혁명 중에 한 일이라곤 없는 그저 레닌의 그림자에 불과했다라는 것이 정설이었다. 원체부터 일덕후였기 때문에 막후에서는 나름 열심히 한 것 같지만... 애초에 레닌에게 인정 받은게 말 많은 러시아 사람들에 비해 말 수 적고 과묵하며 근면성실함이었다.
하지만 이런 기록 중 상당수는 나중에 권력에서 밀려난 트로츠키의 공개적인 디스의 영향이기도 했다. 트로츠키가 한 일에 비해서 스탈린은 정말로 피래미인 건 사실이었지만 그가 늘 주장했고 그가 쓴 스탈린 전기처럼[* 트로츠키의 저작을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조차도 이 책은 흑역사로 간주한다. 심지어 레닌 독살설까지 심도 있게 실을 정도였으니. 트로츠키는 이 책에서 스탈린을 매독 환자로 묘사하기도 하는 등 개인적 원한이 너무 뻔히 보이는 글을 써놨다.] 잉여인사는 아니었다.[* 트로츠키의 기준이라면 레닌을 제외한 볼셰비키의 수뇌도 거의 전부 잉여인사이다. 즉 트로츠키의 독선적인 성격을 잘 보여주는 서술. ~~그러다가 자기 명도 끊게 된다~~] 오히려 은행강도 등으로 단련된 도시 뒷골목 어둠의 세력과의 커넥션으로 레닌의 망명이나 자금 동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 바로 스탈린. 괜히 레닌이 말년에 서기장을 준게 아니다.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당이 권력을 잡고 적백내전이 벌어지자, 그는 붉은 군대의 정치장교로 입대하여 직업군인의 충성을 감독하고 동향을 감시하는 역할을 했다. 흔히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군사적 재능은 있었다고 하는데 ~~사실 적군의 평균이 막장이라서 더 돋보임~~ 그러나 갓 건국되어 영토욕에 불타는 폴란드가 국가 막장 테크를 탄 소련을 침공해온 소련-폴란드 전쟁 때, 그는 자신의 권한을 넘어서서 직접 전선을 지휘하다가 폴란드군에게 역관광당해 대패했고,[* 단 이 일은 스탈린의 책임은 아니라는 것이 오늘날의 연구 결과이다. 폴란드 주변의 혁명운동을 퍼트리고 폴란드 내의 소수민족에 대한 혁명고취를 위해 잘 나가던 진격을 무리하게 옆으로 돌리게 한 것이 결정적 패인이라는 분석이 있다. 이 명령은 스탈린이 아닌 당 차원의 권고였고 주변국에 혁명을 퍼트리는 이론을 내세운 사람이 바로 트로츠키였다.] 이 때문에 소련측에 우세했던 전쟁 양상은 폴란드측으로 흐른다. 이때, 국방장관 트로츠키와, 전선사령관인 미하일 투하쳅스키와 엄청나게 사이가 나빠졌다. 이 때문에 스탈린은 군직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폴란드와의 전쟁을 스탈린의 책임으로 100% 물어버리고 당 차원의 추방을 논한 사람이 바로 트로츠키였다.] 훗날 자신을 디스하던 이들을 스탈린은 처형과 암살로 복수하였다.
이후 정부로 돌아가서 소수민족 출신이라는 메리트를 강조하여 민족 문제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원래 정권을 잡기 전까지도 스탈린이 남들에 비해서 비교우위를 갖는 분야는 민족 문제 분야였고, 실제로 민족 문제 관련 일을 많이 했으니 당연한 일. 이 자리는 스탈린에게 엄청난 이득을 가져다줬는데, 소수민족 출신의 공산주의자들을 자신의 권력기반으로 포섭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교묘한 정치적 책략과 소련 내 민족 업무에서 보여준 과단성[* 스탈린은 볼셰비키 정권 내에서 민족문제 위원이었으나 사실 서기장직(엄밀히 말하면 간사장)도 업무량만 많고 권한은 별로 없는 직위지만 스탈린에 대한 배려로 레닌이 임명해 주다시피 한 것이었다. 그리고 스탈린의 서기장 취임 한 달만에 레닌은 지병으로 쓰러진다.] 등으로 세력을 키워나갔고, 다른 혁명가들은 그를 거의 경계하지 않았다. 제도적으로 당에서 가장 높은 서기장직까지 별 반대없이 올라갈 수 있었다. 실질적인 최고지휘자였던 레닌은 1919년 뇌출혈로 반신불수가 되었고, 와병 중이었기 때문에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단 스탈린은 이 때 소수민족을 너무 억압해서 레닌에게 상당한 반감을 산다.
아마도 당시 볼셰비키당 내에서는 레닌이 유일하게 스탈린의 성격을 정확히 보고 스탈린 지휘하의 당의 미래를 예측한 사람인 것 같다. --예지력 대장-- 레닌은 죽기 전 써둔 유언장에서, "스탈린 동지는 너무나 잔인하고 성격이 급하다. 그의 성격은 서기장 자리에 맞지 않다. 그러므로 서기장에서 해임하라."고 써놨다.[* 다만, 레닌이 스탈린의 해임을 요구한 시점까지 스탈린의 잔인성은 공적인 영역에서는 드러나지 않은 상태였고, 레닌의 부인을 대하는 태도와 같은 사적인 문제에서만 문제시되고 있었다. 이 점에서 당시로써는 '목숨 걸고 함께 싸운 동지인데 부인에게 무례하게 대했다는 이유만으로 해임을 요구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여론이 나올만한 상황이었음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레닌은 후계자에 대해 암시적이고 모호한 표현만 했지 아주 명백하게 후계자 지명을 언급하지는 않아서 문제가 되었다. 혁명의 1등공신이라고 할 수 있는 국방장관 트로츠키는 영웅주의적인 성격 때문에 '제2의 나폴레옹'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로 당내 유력주자들의 견제를 받았고,[* 실제로 러시아 혁명 당시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 혁명을 본보기로 행동했는데, 군인 출신 나폴레옹이 제정을 세워서 혁명 정신에 역행한 것을 보면서 '아 슈바 우리도 군인들 가만 내비두면 역관광 당하겠구나.' 라고 생각하여 태생부터 군인에게 별로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보나파르트주의자라고 소련에서 까인 군사관련 인물이 한 둘이 아니다.] 스탈린이 사임하면 그에게 총서기 자리가 돌아갈 판이었다. 그래서 정치국 위원들은 만만하게 보이는 스탈린의 사임을 반대했다. 그래서 이 유언장은 스탈린이 주재하는 정치국회의에서 공개하지 않기로 했고, 이는 흐루쇼프 시대에 와서야 공개될 수 있었다. 이때 스탈린의 유임을 강력히 주장한 혁명가들 대부분이 후에 스탈린의 대숙청 때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려 처형된 것은 정말로 역사의 아이러니.
우선 레닌의 유언장은 스탈린에 대한 가혹한 평가와 트로츠키에 대한 전체적 호평, 그리고 약간의 단점과 그 부분을 다른 동지들이 보좌해서 채워달라는 언급을 하고 있다.
>스탈린 동지가 서기장으로써 무제한의 집중된 권력을 쥐게 된다면, 그 권한을 주의깊게 사용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반면, 트로츠키 동지는(중략) 개인적으로 가장 현재 중앙위원회에 적합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과도한 자만심을 보였고 문제의 순 관리적인 작업[* 이 표현은 당시 러시아 혁명가들이 사용하던 일종의 관용구라서 관료적인 작업이라고 오독하기 쉬운데, 사실은 오히려 절차적 정당성을 중시하는 관료주의와는 반대 개념에 가깝고(관료주의는 오히려 서기장 스탈린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문제나 갈등을 그 배경과 상황에 맞춰 순리에 따라 차근차근 해결하지 않고 문제 자체만 관리해서 해결하려 드는 특성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 트로츠키의 특징에 비춰서 설명한다면, 트로츠키가 볼셰비키 당 내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이라는 건 레닌도 알고 트로츠키도 아는 사실이었으므로 당연히 ~~트로츠키가 생각하기에는~~ 트로츠키의 주장이 옳고 다른 주장은 틀린 것일 수 밖에 없으니까 굳이 토론이니 공감대니 합의니 하는 데 시간 낭비할 것 없이 그냥 아가리 파이트로 상대를 밟아버리고 자기 주장을 받아들이게 하려는 태도를 말하는 것.]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 레닌의 인민위원회에 보내는 유언장 중 1922년 12월 24일 작성된 부분
>그루지야 쪽의 일들은 진정으로 프롤레타리아적인 입장에서 접근한다면 극도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며, 사려깊음과 준비성을 가지고 필요사항에 대해 절충안을 이끌어내야 한다. 하지만 그루지야인(스탈린)은 이런 문제에 대해 무지한 모습을 보여줬고, 마구잡이로 남들을 '국수주의적 사회주의자'[* 소수민족의 입장을 소련의 이익보다 앞에 놓는 것. 쉽게 말해 러시아 밑으로 안 들어오면 나쁘다고 주장하는 깡패스런 폭압적 논리로, 당시 소수민족위원회 의장이었던 스탈린이 남을 비난할 때 남용하던 단어다. 심지어 조지아는 스탈린의 모국이었는데도.]라며 비난하고(사실은 그 자야말로 진정한 국수주의적 사회주의자이며, 대러시아주의에 물든 천박한 깡패 놈이다.), 사실상 노동자 계층의 단결을 저해하고 있다. 노동자 계층의 단결을 가장 크게 해치고 그를 무너뜨리는 요소는 국가의 '부당함'이며, "피해를 본" 민족들은 평등하다는 느낌과 그 평등에 대한 침해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다 - 특히 그게 과실이나 기만, 그것도 바로 그들의 노동자 동지들에 의한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게 바로 내가 이 건에서 소수민족들에 대해서는 많이 양보하고 관대하게 대할수록 좋다 말하는 이유다. 이게 바로 이 건에서 노동자 계층의 근본 권리를 위한 투쟁에는, 단순히 형식적인 태도가 아니라 억압받는 소국의 노동자의 편에 서서 억압자 대국을 대하는 태도에 입각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레닌은 좀 더 그들을 달래 가며 타협과 절충을 했어야 한다고 느낀 것이고, 그런 문제에서도 폭압적이며 잔인한 모습을 보이는 스탈린은 지도자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있는 것.]
>- 레닌의 국가와 '자치화'에 대한 서한. 1922년 12월 31일.[* 조금 더 나중 시점에 쓴 서한에서는 스탈린은 소련의 소수민족 문제에 펠릭스 제르진스키와 함께 계속 종사하도록 해야 한다고 언급하긴 했지만, 이 평가를 보면 대강 레닌이 스탈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답이 나온다.]
스탈린에게 혁명의 영웅 트로츠키는 눈엣가시였고, 전 세계의 공산화를 이룩해야 공산주의를 유지할 수 있다는 영구혁명론을 주장하는 트로츠키에 맞서 러시아 단독으로도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일국 사회주의론을 펼쳤다.[* 종종 한국에서 국가 사회주의로 번역하는 인터넷 논객들이 있는데 헷갈리지 말자! National Socialism이 아니고 State Socialism으로 '일국 사회주의'가 맞는 말이다. 사실 헷갈리는 것도 당연한 것이, 나치즘, 즉 국가사회주의는 좌파들에게 혼란을 주고 좌파 지지자들을 흡수하려고 일부러 좌파 코스프레 삼아 붙인 이름이기 때문. 사실 정확히 말하면 히틀러의 합류로 극우화되기 전의 나치당이 가지고 있던 사회주의적 특징 때문에 붙은 이름이기도 하다.] 다만 트로츠키는 거만한 태도 때문에 스탈린이 아니고서도 적이 많았다. 후일 외무장관에 취임하여 '몰로토프 칵테일'이라는 단어가 생겨나게 한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같은 경우 윗사람에게 고분고분하고 근면한 것 외에 장점이 없는 평범한 관료에 불과했는데, 트로츠키가 대놓고 몰로토프를 조롱하자 몰로토프가 부들부들 떨면서 "동무, 모두가 (동무처럼) 천재가 될 순 없소." 라고 대답하는 일도 있었다고 할 정도. 그런 반면 그 당시 좀 만만한(?) 감이 있었고[* 후일의 이미지에선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이 당시의 스탈린은 그냥 평판은 좋지만 별 말도 없고 존재감도 없는 사람이었다.] 겸손하고 상식적이라는 인상을 주변에 주고 있던 스탈린은 혁명동지들에게 마치 모두의 합의를 도출할 만한 좋은 지도자가 될 것이란 인상을 주었다.
당시 세계대전과 내전으로 피폐했던 소련인들은 다수가 타국의 혁명에 간섭하려던 트로츠키 노선보다는 다른 나라 일에는 일단 거리를 두면서 소련의 독자발전을 구상한 스탈린 노선을 지지했다. 왜냐하면 트로츠키가 주장한 국제주의는 너무나 공상주의적이었고 자칫했다간 서방 각국과 전쟁을 벌일 수도 있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스탈린의 "밥먹고 합시다" 노선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다 트로츠키가 하필 스탈린의 음험한 권력욕이나 잔인한 노선[* 특히 스탈린은 자기 조국인 조지아인들을 가혹하게 대하는 과정에서 레닌에게 상당한 어그로를 먹었다.]을 비판하며 후계자 지명을 하지 않을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레닌의 서찰을 공개하지 않았다. 레닌은 애초에 스탈린에게 경계심을 품다가 볼셰비키가 초심을 잃고 소련의 군소 가맹국들에게 깡패 독재국가스러운 면모를 드러내는 것을 경계하고 반성하던 터라 약소국에 가혹한 면모를 내비치는 스탈린을 지도자 자리에 앉힐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됐다. 레닌은 절대 스탈린을 후계로 삼지 않을 것을 암시하는 여러 서찰을 남겼지만 트로츠키는 아직도 자신이 목숨을 건 권력투쟁의 장에 있다는 감을 잡지 못했는지 스탈린이나 스탈린 편을 드는 혁명동지들을 물리적으로 말살할 기회를 잡지 않았고, 그 사이 여기저기 그리고리 지노비에프나 레프 카메네프 등의 여러 인물들에게 손을 뻗친 스탈린이 본격적으로 트로츠키를 조지려고 마각을 드러낸 상황에서 트로츠키가 하필 사냥 나갔다가 앓아누웠다. 몸져누운 트로츠키는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들에 대해 반박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고, 결국 최종적으로 스탈린은 트로츠키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하고 트로츠키를 극좌 모험주의자로 낙인찍을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그냥 나쁜 놈으로 낙인찍었다.(...)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딱지는 소련이나 동구권 내에서는 그냥 '무지무지 나빠서 때려죽여야 하는데 파시스트나 자본주의자라고 부를 수는 없는 놈' 이라는 의미일 뿐이다. 트로츠키주의가 극좌 모험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서구권의 트로츠키주의 정당이 극좌노선을 취했기 때문에 생긴 인식일 뿐이다. 이 점은 흐루쇼프와 마오쩌둥이 서로를 '극우 수정주의자'와 '극좌 모험주의자' 라고 공격하면서 '트로츠키스트'라고 매도한 점이나, 노동조합이 국가의 개입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한 좌익 반대파를 탄압한 트로츠키의 노선을 스탈린이 '우익적이고 독재적이다' 라고 비판한 점에서도 알 수 있다.]
권력항쟁 과정에서 패한 트로츠키는 처음에는 그냥 시베리아에 유배되었고 최종적으로 소련에서 추방되었다. 트로츠키가 곤란한 상황에 처하자 독일 공산당 등에서는 트로츠키를 모셔가려고도 했지만 교활하게 스탈린은 트로츠키가 외국에 가서 혁명을 성공시키고 자신의 세계 혁명론을 입증하고 영웅이 되어 돌아오는 것을 막으려고 이런저런 바보스런 핑계로 트로츠키를 묶어 놓았다. 당시 스탈린의 동맹 지노비에프는 트로츠키를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물론 지노비에프도 후에 숙청~~ 스탈린은 오히려 추방으로 처리했는데, 트로츠키가 아무리 실각했다고 해도 트로츠키의 영향력은 그만큼 무서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추방당한 후에도 반스탈린 활동을 계속 펼치자, 훗날 멕시코로 요원을 보내 암살하기도 했다. 대체로 스탈린에게 숙청된 인물들은 흐루쇼프에 의해 대부분 복권되었지만, 자신이 세운 소련 체제를 "퇴보한 노동자 국가"라고 주장하며 근본적으로 부정한 트로츠키는 흐루쇼프도 외면했고 오히려 트로츠키를 암살한 라몬 메르카데르에게 소비에트연방영웅 지위를 수여하기도 했다. 트로츠키는 결국 소련이 망할 때까지 복권되지 못했다.[* 다만, 트로츠키가 정말 소련 체제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것인지에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스탈린에 의해 확립된 서기장을 중심으로 한 소련의 '정부'체제를 기준으로 본다면 트로츠키는 이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것이 맞지만, 트로츠키의 주장은 노동자 국가였던 소련이 스탈린의 체제로 인해 타락, 또는 퇴보하여 타락한 노동자 국가로 전락했다는 것이었으므로 소련 정부 바깥의 기준으로 본다면 소련 자체를 부정한 것이라고 보기는 다소 힘들다. 실제로, 트로츠키가 소련을 타락한 노동자 국가라고 주장한 것과는 달리, 트로츠키의 직접적 영향력 없이 발전한 IS계열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소련을 아예 국가자본주의 체제로 규정함으로써 더욱 철저히 부정하고 있다. 즉, 트로츠키는 소련 바깥에서 보면 소련 내의 이단자일 뿐 소련을 부정한 인물이 아니며, 이는 결국 스탈린 이후의 소련이 본질적으로 스탈린에 의해 규정되었다는 것, 따라서 스탈린을 비판한 흐루쇼프와 같은 인물마저 스탈린의 틀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후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몰아내는데 협력한 지노비에프-카메네프와 손을 잡고 트로이카 체제를 수립하나, 지노비에프나 카메네프는 스탈린보다 훨씬 혁명가적 커리어가 높았기 때문에 스탈린이 만만히 볼 수 없는 위치였다. 즉 이들은 자신의 유일지배체제에 방해가 되는 인물들이었다. 그래서 다시 이번에는 떠오르는 우익반대파의 니콜라이 부하린과 손을 잡고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를 권력에서 몰아내었다.
이후에 트로츠키가 자신을 우익적이라고 디스질하면서 사용했던 논리를 그대로 부하린에게 적용해서 비판을 가했고, 부하린을 몰아내는데 성공하였다. 당내의 유일지도자로 자리를 확고히 하였다. 이후 대숙청을 실시하여 이렇게 권력투쟁과정에서 자신에게 한번이라도 밉보인 인간들은 모조리 "트로츠키주의자"로 몰아서 처형했다. 지도적 혁명가들은 스탈린을 과소평가한 대가를 죽음으로써 톡톡히 치르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까지
당시 소련의 실태는 동물농장에서 비판되기도 했다. 스탈린의 의심과 불안이 소련사회의 구석구석을 지배하였고 대숙청이라는 사상 최대의 [마녀사냥]을 발생시킨다.[* 이에 대해 그의 딸은 "아버지는 어디에서든 적을 찾아내려 했으며 고독감과 절망감으로 가득한 탄압매니아였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동물농장과 1984의 저자인 조지 오웰은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좌파임에도 스탈린과 소련식 정책을 증오하며 그들을 신랄하게 까는 저 두 책을 썼다. 이에 관해선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파 내의 트로츠키주의자(POUM)들을 박멸시키기 위하여 NKVD로 하여금 스탈린주의자(PCE)를 부추겨 공화파를 후원하긴커녕 분열을 조장했다는 이유도 있는데, 당시 오웰은 스페인 내전에 참전 중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스탈린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고, 개전 이후 독일과 함께 폴란드를 사이좋게 갈라먹었다. 그러나 애초부터 서로가 서로를 믿지 않았던 조약은 언제 무너질지 모를 일이었다. 소련도 언젠가 독일이 뒤통수를 후려칠 것을 예상하고 있었고, 때문에 1939년의 폴란드 분할 이후 새로운 독일-소련 국경선에 "스탈린 라인"이라는 방어선을 건설하라고 명령한다. 다만 그 방어선이 이전의 소련-폴란드 국경선에 있었던 방어선을 뜯어다가(…) 만들려고 한 병크가 문제였다.
나중에 스탈린이 죽고 난 후에 니키타 흐루쇼프의 발언 중에는, "우리는 스탈린 덕분에 이긴 것이 아니라, 스탈린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긴 것이다."라는 것이 있다. 실제로 러시아 역사학자들은 스탈린 집권기를 공식적으로 대공포(大恐怖)기로 정의하고 있을 정도. 다만, 흐루쇼프의 평가는 전쟁 지휘에 대한 부분에 한정해서 본다면 맞을지 몰라도 스탈린의 공업화 정책이 아니었다면 소련이 독소전에서 이기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이야기라고 봐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과 독소전쟁
1934년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한 이후, 노골적으로 소련을 디스하며 주변의 소국을 병합, 소련의 안보를 위협하게 된다. 소련은 안보적 위기를 느끼게 되었으며, 대숙청 와중에도 꾸준히 국방력을 증진하기 위해 병력을 늘리고 무기를 뽑아내었다. 스탈린은 영국, 프랑스와 손을 잡고 히틀러를 막아보려 했으나, 영불은 소련을 노골적으로 무시했고,[* 얼마나 무시했냐면, 영불 지도자급에서도 뮌헨 협상 이후 독일에 대한 불신과 1938-9년 들어 폴란드 위기가 번질 때 영불대사가 모스크바에 가서 스탈린과 대면해서 협상을 한 적이 있었다. 이 때 스탈린은 "만일 독일의 침공에 대비해 독일을 공격한다면 소련은 200개 사단을 동원할 용의가 있다. 영불은 무엇을 할 수 있느냐?" 라고 물었다. 이에 영국 대사는 영국 본토에 육군사단 3-5개를 원정군으로 동원할 수 있다는 드립과 프랑스 대사는 전쟁의지에 대해 머뭇거림을 보였다. 이에 스탈린은 "이런 도둑놈들! 우리는 200개 사단이나 동원하는데 즈그놈들은 손도 안대고 코풀려고 하네?" 라는 반응을 보이며, 서방이 독소이호경식지계를 노리는 것 아니냐라는 서방에 대한 의심을 한층 더 강화했다. 다만, 프랑스는 몰라도 영국에 대해 실드를 칠 여지는 있다. 영국은 전통적으로 대륙에서 전쟁이 터질거라 예상되면 육군 사단보다는 해공군 투자 혹은 전쟁에 쓸 재원 마련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독일에 침략당해도 소련의 개입을 허용할 수 없다는 폴란드의 고집 때문에 협상은 결렬되고 만다.
결국 스탈린은 서방각국을 불신하게 되었고, 이 때 히틀러는 서방과 전쟁을 치르기 위해 소련과 폴란드 침공 직전인 1939년 8월 유럽을 독소가 반분하자는 비밀조항을 넣은 불가침 조약을 맺는다.(독소 불가침조약) 이후 히틀러가 서방각국과 전쟁을 치르는 동안 소련은 비슷하게 폴란드 동부, 발트 3국, 그리고 루마니아의 몰도바 지방, 핀란드 일부(카렐리야 지방)[* 사실 핀란드도 통째로 꿀꺽하려고 했지만 겨울전쟁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는 바람에 카렐리야 지방만 점령하는 선에서 강화를 맺었다. 손바닥만한 나라에게 얻어터진 놀라운 업적으로 스탈린은 1939년 올해의 인물에 선정.]를 차지해 대가는 톡톡히 챙긴다.
스탈린이 히틀러를 믿었는지 안 믿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영국과 전쟁이 끝나기 전에는 소련을 침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스탈린의 판단은 히틀러가 희대의 돌아이가 아니라는 조건하에서는 옳은 판단이었다. 당장 독일은 1차 세계대전을 양면전쟁으로 끌고 갔다가 [좆망|X망]했다. 문제는 히틀러는 인류의 역사상 다시는 보기 힘든 돌아이였다는 거지.] 그러나 히틀러는 소련과 끝까지 강화할 생각이 없었고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여 소련을 침공한다. 붉은 군대는 초장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독일이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자 스탈린은 망연자실, 이후 며칠간 출근하지도 않고, 관저에 숨죽이며 틀어박혀 있었다고 한다. 보다 못한 몰로토프 등의 심복들이 관저로 대책을 세워야할거 아니냐고 찾아왔는데, 스탈린은 이들이 자신을 불신임하고 체포하러 온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어쨌든 현실을 깨달은 후에는 적극적으로 전쟁수행에 개입했다. 이것이 지나쳐서 몇몇 군사작전에 개입했다가 수백만의 병력을 날려먹긴 하지만, 자신이 개입해 봐야 별로 좋을게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이후에는 직업군인이 짠 작전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가장 큰 위기는 1941년 12월의 모스크바 전투였는데, 스탈린은 정부 부서를 모두 동쪽으로 피난시켰으면서도 시와 운명을 함께할 것이라고 선언했고, 실제로 공방전 내내 모스크바를 지키면서 방위전을 독려했다. 게오르기 주코프와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의 활약으로 모스크바는 성공적으로 사수되었다. 이후에는 총사령관 대리인 주코프에 작전지도를 맡기고, 자신은 자는 시간을 빼놓고 하루 12시간 이상씩 일하면서 전쟁 수행에 필요한 행정을 총괄했다. 그는 전쟁 전부터 총괄하던 일반 행정뿐만 아니라 군업무로부터 군수생산, 그리고 서방 원조까지 거의 모든 방면의 세부사항을 직접 챙기면서 실무진에 엄청난 압박감을 주었고, 이들은 저승사자였던 스탈린의 노여움을 사지 않기 위해 죽어라 일을 했다. 실제로 이 당시 대숙청 기간은 아니었으나 자신의 임무를 달성하지 못한 자는 굴라그로 가거나 혹은 처형되었다. 이런 면에서 스탈린은 2차대전 당시 소련의 승리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
어쨌든 붉은 군대는 전세를 역전시키고, [베를린 전투|베를린을 함락시켰다.] 전쟁 이전부터 우상화가 진행되고 있던 스탈린은 이제 군사적 커리어까지 더해 정말 소련에서는 신같은 존재가 되었다. 이런 것들이 종교화의 레벨까지 이르러 반종교를 표방하는 프라우다지에서조차 공개적으로 "자신의 일이 잘 안될때, 그분(즉 스탈린)에게 기원하면 모든게 이루어질 것이다" 라는 사설을 쓸 정도였다. ~~사이비종교의 레벨~~
그런데 아주 놀랍게도 스탈린 자신은 독소전쟁 축하연 연설에서 "우리의 승리에 저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고, 모든 것은 소련 인민들의 피와 땀이 이룩한 것입니다."라고 겸손을 떨었다. 어떤 역사가는 이 연설이 스탈린이 한 연설중에서 가장 정직한 것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냉전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지만, 추축국 동맹을 패퇴시키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던 미국과 소련은 전후 질서를 둘러싸고 첨예한 대립을 했다. 스탈린은 영미와 흥정으로 동유럽을 차지할 수 있었고, 소련의 건국 당시부터 숙원이던 완충지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동서 간의 첨예한 대립으로 나타나는데 이를 냉전이라고 한다.
소련은 나치 독일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나, 종전 3년 만에 전쟁 전 수준으로 생산량을 회복한다.
1949년 핵 실험을 하여 소련은 미국의 핵무기 독점을 끝내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스탈린이 세계 적화의 야욕이 있었다는 식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 스탈린은 다른 나라의 혁명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다른 나라의 혁명이 실패하더라도 미국과 대결하는 것은 피했다. 그래서 베를린 위기때도 도로는 봉쇄했을지언정, 미국의 공중 수송은 막지 않았고, 국공내전 때도 인민해방군이 승리하기 직전까지 개입하지 않았다.
다만 소련군이 진주한 나라에서는 소련식으로 사회를 개조하려 했고, 꼭두각시 정권을 세워 위성국으로 삼으려고 했다. 이런 제국주의적인 태도는 나중에 동유럽에서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거의 독자적인 혁명으로 집권한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이에 반발해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스탈린 사후, 헝가리나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소련의 간섭을 벗어나려는 소요사태가 일어났고, 동유럽과는 약간 다르지만 마오쩌둥이나 김일성, 엔베르 호자는 이전의 소련 꼬붕을 했던 노선을 폐기하고 독자노선을 천명하게 된다.
우상화의 절정
스탈린 우상화는 1920년대부터 레닌과 엮어서 레닌의 계승자로 슬슬 나왔고 1930년대부턴 레닌을 제치고 자체 우상화로 더 심해지더니 대숙청이 시작되자 --죽지 않기 위해서-- 열광적으로 변하고 독소전쟁에서 승리하자 신격화되기 이른다.~~난 신세계(공산 세계)의 신이 되었다! 라이토, 보고 있나?~~ 1940년대 소련 지도를 보면 독소전쟁때 유명한 격전지 스탈린그라드 뿐만 아니라 '스탈린스크' '스탈리노고르스키' '스탈린스키' '스탈리노그라트' '스탈리나오울' 같은 도시가 등장한다 심지어는 모스크바를 '스탈리노다르 혹은 스탈린다르(스탈린의 선물)로 바꾸자는 아부성 청원이 나왔고 역법을 감히 예수 태어난 연도 따위하면서 서기 연도를 대체하여 스탈린 생일을 기준으로 하자는 의견도 나온다.. 두가지는 겸손한 스탈린 동무도 낯간지럽다고 생각했는지 사양한다.[* 북한에선 김일성 사후 김일성의 생일연도(1912년)를 따라 주체연도로 쓴다. 우상화는 여기가 한수 위.]
영화 <베를린 함락> 에서는 감독이 스탈린 홀로 히틀러의 패배를 궁리하며 참모부 지도를 주시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전쟁 시 신화 속엔 스탈린이 홀로 전쟁영웅-정치인의 실체가 되었다고 믿을 판이었다. 1948년 소련 예술상 출품작 중에 단 두편만이 위대한 스탈린을 묘사하지 않은 작품이었다. 새로운 노래나 출판물은 말할것도 없었다. 노래야 손발이 오그라드는 스탈린 찬양 내용이 주를 이었고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은 겨우 1000만부 정도나 팔렸지만[* 대부분은 국비로 결혼하는 부부에 증정한 것이다.] 위대한 지도자 동지의 저작들은 총 7억 600만부가 팔렸다. 레닌의 저작은 2억 7900만부 마르크스-엥겔스의 저작은 꼴랑 650만부가 판매 되었다. 하지만 인류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 셀러작가가 되었던 스탈린 동무의 기록은 마오쩌둥에게 곧 깨진다. 마오주석 어록은 44억부가 출판되었다. 역시나 대륙의 기상이다..[* 마오나 스탈린의 저작은 히모씨와 달리 불쏘시개감은 절대 아니다. 둘의 저작은 이론이나 사상적으로 당시는 물론 현재도 연구되고 있다. 문제는 그것만 강요하고 거부하면 코렁탕 먹인다는 것.]
사망
1953년 2월 28일 저녁, 고혈압에 걸린 상태에서 주치의의 권고를 무시하고 사우나를 강행했다. 결국 사우나를 마치고 침실에서 떡실신, 식사 담당 파출부가 쓰러진지 3일만에 발견했고 --용케 바로 죽지 않고-- 3월 5일에 사망했다.[* 바로 같은 날에 대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가 사망. 그러나 그의 죽음은 스탈린의 죽음에 묻혔다. 안습.] 그의 공식 사인은 '고혈압의 발작에 의한 뇌의 대출혈'. 이중삼중으로 경비를 세웠고, 항상 자신이 자는 방을 수시로 바꿀 정도로 암살이나 테러에 민감했다.(그리고 바로 그 철통 경비 때문에 바로 발견되지 못해서 죽었다.) 수많은 인민을 학살하고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강철 사나이 스탈린도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한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던 것이다.
https://www.surgicalneurologyint.com/articles/2011/2/1/images/SurgNeurolInt_2011_2_1_161_89876_u4.jpg?width=560 이미 신격화가 철저히 진행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죽자 수많은 인민이 대성통곡을 했다. 독재자가 현직에서 죽으면 대체로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실제로 김일성, 마오쩌둥의 장례식을 보면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시신은 방부처리되어 레닌묘에 합장되었다가 후에 화장되어 크레믈린 벽묘지에 안장.
스탈린의 장례식 때는 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깔려 죽은 사람도 있었다. 역시 죽을 때까지도 대숙청을 가하는 인간백정(...).
업적: 최강의 강철 대원수
공업화의 신화적 성공
>>우리는 자본주의 열강에 한세기에서 반세기 이상 뒤처져 있다. 10년안에 이를 따라잡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주의 조국의 미래는 없다. 그들을 따라 잡을 것인가 그들에게 잡아 먹힐 것인가. (1931년의 연설)[* 정확히 10년후 [독소전쟁]이 발발했고, 10년간의 무자비하게 밀어붙인 산업화로 나치독일에 승리했으니, 스탈린의 예언은 들어맞았다.]
하여간 결과로만 봐서는 후진 봉건 사회였던 러시아를 미국과 맞먹는 초강대국으로 만든 인물이다. 원래부터 마르크스주의는 과학을 표방했으며, 역사발전의 원동력으로 생산력을 들었다. 그러므로 스탈린은 생산력을 증가시키는게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했고, 이런 생산력 증가에 올인했다. 특히 철강과 전기 생산이 중점적으로 강조되었다.
스탈린은 1928년부터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정부의 모든 행정력을 동원하여 산업화[* 특히 중화적 공업화.]를 무지막지하게 밀어붙였다.[* 그리고 이는 한국을 비롯한 여러 개발도상국이 모방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한국의 5개년 계획도 사실 원조는 소련이다.] 이렇게 정부가 직접 나서서 산업을 육성하는 것은 독일과 일본에서도 벌어진 일이었지만, 소련은 스케일이나 범위, 강도에서 독일과 일본을 훨씬 능가했다. 대부분의 개발독재자들처럼 스탈린도 기술력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고, 개인적으로도 경제개발에 큰 열의를 보였다.
과학자들도 대접을 받았다. 대우가 훨씬 좋아졌을 뿐만 아니라 푸짐한 연구비를 타내 여러 최신 연구를 마음껏 할 수 있었다. 로켓 연구가 대표적인데, 현대 로켓의 아버지였던 [콘스탄틴 치올콥스키] 같은 경우 러시아 제국 때는 지나치게 공상적인 연구때문에 학계에서 푸대접을 받았지만, 소련 성립 이후에는 연구의 중요성을 알아본 소련 정부의 적극지원을 받게 되어, 소련 공군사관학교가 생겼을 때 창립 교수가 되었고 장례식도 국장으로 치뤄졌다. 비록 과학계에도 [대숙청]의 칼날이 덮치긴 했으나, 심지어 체포당일 처형되던 많은 다른 분야의 인재들과는 달리, 숙청대상이 된 많은 과학자들이 사형을 면할 수 있었고, 굴라그에 가지 않고 훨씬 편한 전용감방에서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일류신]이나 우주개발의 책임자가 된 [세르게이 코롤료프]가 바로 이 케이스. [래프 D.란다우]라는 한 유대인 물리학자는 서슬퍼렇던 [대숙청]기간에 "스탈린 독재는 히틀러와 다름 없다"고 말했다가 NKVD에 체포되어 반동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그 재능을 아낀 대물리학자였던 표트르 카피차[* 1978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가 스탈린에게 "쟤 죽으면 나도 그만두겠음"이라고 직접 위협 편지를 썼고, 스탈린이 베리야에게 명령해 감방에 갇혔던 그를 석방하였다. 란다우는 결국 1962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타냈고, 소련은 하마터면 천재 물리학자를 잃을 뻔했으나, 스탈린의 과학자 사랑으로 란다우는 목숨을 건진 것이다.
그리하여 1930년대 소련은 매년 10%가 넘는 경이적인 경제성장률을 기록한다. 당시 대공황으로 전 세계의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의 10%가 넘는 경제성장률은 더욱 경이적이었다. 소련은 프랑스, 영국, 독일을 추월하고 1938년에는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된다. 혁명과 내전으로 잿더미가 된 농업국가가 15년 만에 발전된 공업국가가 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기 때문에 소련은 전쟁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다.
스탈린 주도의 경제개발은 단순한 총생산 증가에 그친 것이 아니라 소련 경제의 체질이 질적으로 달라졌다는 것에 그 중요성에 있다. 더 나아가 스탈린식의 경제개발은 소련의 상하부 구조를 완전히 탈바꿈시켰다. 사실 러시아는 덩치가 크기 때문에 18세기 이래 못해도 5강(20세기 초반까진 영국+프랑스+독일+미국과 함께)에는 꼭 드는 나라였다.[* 미국이 영국의 공업생산을 추월하면서 세계1위의 총생산 국가가 된게 1870년대였다. 1차대전 이전만 하더라도 미국은 강대국의 하나였지, 초강대국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주산업은 농업이었으며, 공업의 비중은 매우 낮았고, 사회는 봉건제의 잔재가 강하게 남아 있는 후진 농업사회였다. 그리하여 러시아제국은 20세기 들어와서도 그 덩치와 국력에도 불구하고 초강대국으로 보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명분하에 러시아의 모든 부분에서 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예를 들어 제정시절에는 의무교육도 없었고, 문맹율은 90%에 육박했지만, 스탈린 집권기간동안 교육기관의 확충으로 문맹율은 1% 미만으로 떨어지게 되었고, 광범위한 지식층이 생겨났다. 또한 제정시설 러시아의 과학기술은 유럽본토에 비해서는 2류로 간주되었고, 연구기관이나 교육기관 모두 형편 없었으나, 스탈린 시절 소련의 과학기술은 뿌리를 내리고 일취월장하여 20세기 중반에 가면 미국과 맞먹을 정도로 발달하게 된다. 스탈린 덕으로 소련이 20세기 후반에 미국과 맞장뜰 수 있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소련은 스탈린 이후 G2로 평가받은 바 있지만, 러시아는 그 이전이나 이후로도 그 위치에 이른바가 없었다. 스탈린시절과 그 사후 40년 정도가 러시아가 세계사에서 보여준 가장 전성기였다. 19세기에 러시아는 나폴레옹을 패퇴시키기는 했지만, 당시 양대 초강대국은 프랑스와 영국이었지, 러시아가 아니었다. ~~당시 미국은 신세계에 쳐박힌 듣보잡국가였고...~~ 현재 냉전시절 소련의 위치를 가질 수 있는 나라로 가장 먼저 꼽히는 나라는 러시아가 아니라 중국이다.] 소련이 독소전쟁의 상흔이 가시기도 전인 1950년대 [스푸트니크]와 [보스토크]로 우주시대를 열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스탈린 시절에 키워놓은 중공업과 과학기술 때문이었다.
전쟁으로 소련은 또다시 잿더미가 되었으나 종전 3년 만에 경제를 전쟁 전 수준으로 회복시킨다. 그가 죽은 50년대에도 소련의 GNP 경제성장률은 평균 5.8%.[* 60년대까지도 소련은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으나 70년대부터 경제가 침체되기 시작한다.(70년대 소련의 경제성장률은 3.7%였다.) …그래도 소련은 붕괴되기 직전(1990년)에도 한국보다 국민소득이 훨씬 높았다. 1990년 당시 소련의 1인당 GNP는 9300$ 대였지만 한국의 1인당 GNP는 5800$ 대였다. 지금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의 반밖에 안되는 러시아를 보면 소련보다 얼마나 몰락했는지 알 수 있다.(이걸 역으로 뒤집어 본다면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체제를 전환했을때 부작용이 심각했다는 얘기도 된다.) 덧붙여 저 당시 서방의 국민소득은 1만달러 ~ 2만달러였다.] 소련의 국민소득 대비 투자율은 28%로 아주 높은 수준이었다. 아시아의 네 마리 용도 나중에 국가 주도로 경제를 발전시키는데, 소련과 아시아국들의 성장에는 비슷한 면이 많지만, 아시아국들은 미국이라는 거대시장을 잘 이용한 반면, 소련의 경우에는 거의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낸 것이기에 이 시기의 소련의 경제성장은 더더욱 경이적인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반론도 있다. 소련이 해외 시장이 봉쇄된 것은 사실이지만 많은 인구가 있었고 드넓은 땅에서 자원이 쏟아져 나왔다. 또, 소련은 혁명과 내전으로 잿더미가 되기 이전 제정시절에는 GDP만 따지면 프랑스보다도 더 높은 세계 5위였다. 유럽에 비해 떨어진 것은 사실이나 세계적으로 선진국임에는 틀림없었다. 아예 식민지로 전락해버린 우리나라와는 넘사벽의 차이가 있다. 또, 내전으로 전 국토가 쑥대밭이 된 것은 맞지만 원래 역사적으로 그런 쑥대밭 국토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GDP 성장률은 높아지게 마련이다. 2차대전 이후 50~60년대의 전세계가 GDP성장률이 쩔었던 것은 전후 수습의 탓이 크다.] 이후 박정희가 "5개년 계획" 등을 벤치마킹했다.[* 기타 유사성에 대해서는 이정우 교수의 이 글 #을 참고할 것.] 김일성도 역시 중공업화를 신나게 추진했다. 하지만 김일성의 중공업화 정책은 말 그대로 망했어요.[* 사실 이건 소련-중국간의 갈등과 소련의 붕괴에 따른 석유 수입통로 봉쇄 등이 원인이긴 했다. 하지만 체제 내의 무능으로 동력을 잃은 것도 역시 사실. 사실 남한이 그러했듯 북한 역시 "닥치고 광물이나 파내시고 내수나 잘 돌리시죠"라는 식으로 소련의 간섭을 받고 있었기에 중공업화 자체는 타당하긴 했는데... 중공업화 자체는 좋은데 원조 없이는 살 수 없던 경제였던지라 망했어요. 실제로 소련이 망하고 북한은 싸게 원료를 얻을 수 있는 공급처와 물건 사주는 판매처가 없어져 찰지게 망했고 90년대 고난의 행군의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 소련의 공업화는 소비재 위주가 아닌 중공업이라 규모의 경제가 중요한데 북한 같은 작은 나라에서 수출목적으로 많이 생산하는 것도 아니고 수입대체로 자력화 목적인데 그런 생산력 수준으론 경제적 생산을 기대하기 어렵다. [* 김일성 당시에 경제막장의 [북한/80년대 3대 흑역사|싹]이 보이긴 했지만 김일성이 사망하는 1994년까지는 북한 경제가 그런대로 돌아가긴 했다. 적어도 김일성 시절에는 굶어죽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김일성 사후인 1994년 이후 2000년대 초반까지 [고난의 행군]으로 북한에선 커다란 식량난이 발생하고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한다. 그래서 그런지 [황장엽]을 포함한 나이가 지긋한 [탈북자]들의 대부분은 [김정일]은 [천하의 개쌍놈]으로 욕하지만, 김일성에 대해선 그다지 비난의 강도가 심하지 않다.]
그러나 [공밀레|인민을 갈아넣어 만든 공업화]
그러나 저런 초고속 성장을 밀어붙이기 위한 국민들의 희생은 너무나 어마어마했고, 인민들의 희생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특히 농업 정책에서는 저 닥치고 밀어붙이기가 잘 통하지 않았고, 집단화의 부작용 때문에 결국 소련은 망할 때까지 만성적인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뭐, 그래도 국가가 안정된 다음에는 식량을 수입해서라도 국민들이 식량부족에 시달리지 않게 하기는 했다.
집단화 직전의 소련의 농업상황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이는 블라디미르 레닌과 니콜라이 부하린이 강력히 추진한 신경제정책(NEP)에 의해 농업부분에서 상당부분 자본주의적 요소가 도입되었기 때문이었다. 부하린은 실제로 농민들에게 "여러분, 부자 되세요!"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스탈린도 처음엔 부하린의 정책에 반대하지 않았다.[* 물론 이후에 부하린은 농업정책에 대한 이견으로 숙청되었다.] 농민들은 고무되어 부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일을 했고, 그래서 농업생산량도 증대하고 부농(네프만(NEPman)/쿨라크)[* 쿨라크는 단순히 부농이란 뜻보단 계급의 적으로 통했다. 스탈린 시대에 생겨난 건 아니고, 제정 러시아 시대 때에도 반동적인 성향의 농민들을 칭했고 적백내전 당시 붉은 군대에 식량을 숨기거나 --누가 공짜로 빨갱이들 주겠냐?-- 병력 제공을 거부하거나 백군과 내통하는 부농들을 뜻한다. 쿨라크 판정 기준도 한심한 게 잘산다는 기준이 자기땅에 도와 줄 일꾼을 둘 이상 쓰거나 가축이 3마리 이상이면 부농이다.(1927년 소련 재무부 기준) 나중엔 소수민족에 대한 편견으로 폴란드인이면 반드시 쿨라크다 란 소리도 나왔다.]도 생겨났으나, 문제는 다른 부문에 비해 그 속도가 더딜 뿐만 아니라 그 부산물로 생긴 부농들은 정권의 위험요소였다. 사회주의 이론상 부농들을 그냥 놔두는 건 모순되었고 [* 부하린도 집단농장화 자체는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속도 조절을 하자는 것.] 자연스럽게 추진하면 50년이 될지 100년이 될지 모르는 공업화 추진을 위해선 "내가 아니면 안된다." 생각한 스탈린은 1929년 계급의 적 쿨라크 박멸을 선언한다.[* <러시아 역사>(История государства и народов России) (신아사) 문명식 번역.] 농촌에서 만들어지는 잉여를 모조리 공업생산에 투입할 목적으로[* 다만, 농촌의 잉여 역량을 도시로 흡수하는 과정 자체는 공업화 과정을 거친 모든 나라가 겪은 과정이다. 공업 지역에 밀집한 대규모의 노동력을 부양할 식량이 필요한 동시에, 농업 구조를 개편해서 농업의 노동력 효율을 높임으로써 생기는 잉여 노동력으로 공업 노동력을 충당해야 하니까... 멀리는 인클로저 운동이 이러한 공업을 위한 농촌 착취의 효시로 꼽히고, 가까이는 60~80년대의 한국에서도 추곡수매의 저가정책을 통해 농촌 착취는 일어났다. 다만, 초고속 공업화로 인한 농촌 공동화가 지극히 격심한 것으로 평가받는 한국에서도 스탈린 당시의 소련같은 대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전국의 모든 농토를 소프호스와 콜호스라는 집단농장으로 재편하는 강제적인 농업집단화가 행해진다. 해당 지역마다 농민집단의 상위 4~5%의 쿨라크를 때려잡으라고 할당량(?)까지 내려온다. 실제론 상위 15%~20%에 해당하는 중농까지 때려잡았다.
어쨌든 자기 땅을 잃는데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 부분은 카를 마르크스도 농민의 소 부르주아지적 특성이라고 규정한 바 있는데, 공장 노동자야 어차피 공장은 자기 것이 아니었고, 수많은 사람이 모여서 월급 받으면서 일한 것이니 국유화가 되건 말건 큰 불만이 없지만 농업은 가족이 소유한 땅을 가족 단위로 경작할 수 있으니 집단농장화를 곧 자기 땅을 빼앗긴다고 받아들이고 이에 대해 저항할 수 밖에 없다는 것. 농민들에게 자신이 농사지을 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야 러시아 최초의 인민주의자 조직 이름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땅과 자유.] 초기에는 자기 땅을 잃은 농민들이 항의을 하였고, 그게 통하지 않자 아예 종자를 태우거나 혹은 세마리 이상 가축을 가지면 어차피 쿨라크로 몰리거나 몰수되니 가축을 굶겨 죽이거나 도축해서 숨기는 등의 태업을 하였다. 그 결과로 농기계 역할을 하는 가축과 퇴비의 부족으로 다음해 흉년크리로 이어졌고 심지어는 이판사판이라 생각한 대규모의 농민 반란이 일어나서 군대가 출동하여 잔인하게 진압하기도 했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일어났고, 결과적으로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소비에트 연방에서 최소 700만명이 사망했다. 이러한 인구학적 타격은 2차대전 전에도 통계치에 수정을 가할 정도라 대기근의 여파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 서방에선 1930년대 후반 소련의 기존 인구 증가 속도론 1억8천800만이 넘어야 되는데 2천만 명 정도가 모자르자 희한하네~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니얼 퍼거슨(하버드 교수) 著 <증오의 세기>] 기존의 이에 대해 정권을 잡았던 스탈린의 책임이 있는 것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으나 그것이 농민반항을 억압하기 위한 의도적인 것이었는지 혹은 그저 자연재해와 행정적 문제로 인한 불가피한 것이었는지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대체로 서방측 학자들은 전자라고 주장하지만, 러시아인들은 대체로 후자를 주장한다. 스탈린과 소련 체제에 매우 비판적이었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도 우크라이나 대기근은 스탈린이 아니라 자연재해가 원인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우크라이나 대기근 이전 1920~1921년 적백내전 직후 기근에 이은 발진티푸스로 1000~1100만명 정도 죽은 참사가 근거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도시에서 굶어죽었고 우크라이나 기근은 농촌에서 굶어죽었다. 강제 공출로 도시는 상대적으로 멀쩡하고…….[* 이 당시 농담으로 '볼셰비즘(20년대)와 공산주의(30년대)의 차이는 볼셰비즘은 도시에 식량이 없고 공산주의엔 지방엔 식량이 없는 것' 이란 소리도 나왔다.] 1932년 곡물 생산은 1930년보다 20%가 감소한걸로 추정하고 가축수는 1929년 기준으로 1935년엔 절반에 불과 했다고 한다. 명백한 인재다. 이러한 삽질은 이념상 이유로만 단순히 농업집단화를 추진한게 아니라 공업화 추진으로 기계류 등을 수입하는데 모자라는 외화를 식량 수출로 땡기기 위해서 농촌에 공출량을 늘리는데 개인적으로 갈취하기보다는 집단농장에서 공제하기 편한 사정도 있었다.
결국 이런 삽질들은 반세기 뒤인 80년대 소련 농업인구는 전체의 22~23%, 미국 농업인구는 전체의 4~5%인데도 미국은 수출 잘하는데 소련은 자기 수요도 안되었다라는 참혹한 이야기도 있다. 물론 기후 탓도 있다. 러시아의 최남단이 미국의 북쪽 지역이다.(...) 그러나 러시아도 추운 나라라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남쪽 지대에 농사가 매우 잘 되는 비옥한 땅이 있고[* 2010-2011 아랍권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도 그 해 러시아 농사가 흉작크리가 겹쳐서 전 세계 곡물가가 올랐기 때문이다.] 소련은 유럽에서도 가장 풍요로운 곡창지대라는 남캅카스 지역과[* 북캅카스는 러시아의 영토이고 남캅카스는 현재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름대로 농사 잘 되고 자원도 풍부한 흑토지대인 우크라이나도 가지고 있었던 점을 보면 결국 당시 소련 정부가 농업 계획을 잘못 수립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우리는 소련 농민들이 만족할 수 있는 농업 계획을 수립할수립할수립할.~~
그러나 어쨌든 당시의 소련 인민들의 엄청난 희생은 헛되지 않아서 1960년대부터는 소련도 그럭저럭 살기 괜찮은 나라가 된다. 냉전 이후 미국의 반밖에 안되는 경제로 미국과의 군비경쟁을 하면서 국가 재정의 태반을 군사부분에 밀어 넣기는 했어도, 소련은 북한과 같은 막장국가는 아니었다.[* 사실 북한이 이상할 정도로 막장인거다. 다른 동유럽 국가들도 그런데로 무난하게 사는 편이었다. 문제는 우리와 가장 가까운 공산국가는 북한인데 북한이 워낙 막장이라서 소련같은 다른 나라도 죄다 경제가 막장이라는 인식이 박혀있다.~~근데 북한은 [주체사상|공산국가가 아닐텐데?]~~]
1960~1980년대의 소련 노동자들의 삶을 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제도적으로 보장받았다. 무상의료, 무상교육, 1년에 3주간의 유급휴가, 그리고 차례를 꽤 오래 기다려야 하지만[* 신혼부부들은 꽤 오랜 시간을 단독주택을 배정받기 위해 기다려야했고, 배정받기 전에는 한국처럼 여러 가구가 단칸방에서 같이 지내기도 했다.] 월봉급 10%가 넘지 않는 임대료를 받는 국영 임대 주택. 그리고 소련 전체에서 최저/최고 봉급차는 6배에 불과했다. 참고로 현재 미국의 경우는 수천배가 넘는다.
문제는 이런 좋은 복지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생산성의 혁신이 제자리걸음을 걸었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인간은 이기심의 존재이기 때문에 "사회주의"와 같은 추상적인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일하는 것도 스탈린 시절 잠시였고, 잘하나 못나다 똑같은 봉급을 받으니 게으름피우는 것은 당연한 일. 미하일 고르바초프도 저서인 "페레스트로이카"에서 이런 현실을 개탄하면서 이들이야말로 사회주의를 좀먹는 반동이라고 비난했다.
고르바초프는 이런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급진적인 시장경제를 도입했으나, 치밀한 계획없는 시장경제 도입은 유통-배급 시스템을 붕괴시켜버렸고, 인민의 삶은 수렁으로 굴러떨어졌다. 사회주의가 아니라 막장자본주의 국가가 되어버린것. 여기에 보수파들이 고르바초프를 끌어내리려던 쿠데타를 일으켰다 망하는 바람에 소련은 허망하게 무너졌다. 보수파들이야 막나가는 나라를 걱정했겠지만, 사회주의적인 부작용을 치유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소련체제를 유지하려고 해도 얼마간 연장할 따름이었음은 명약관화. 그러나 많은 러시아인들은 적어도 삶의 질의 면에서는 소련 시절이 현재보다 나았다고 이야기한다.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 노선과 그 저항으로써 보수파의 쿠데타에도 여러 관점이 있는데, 이중에는 아예 당시 소련은 '능력에 따라 생산하고 기여한 만큼 소비하는' 사회주의 체제에서 '능력에 따라 생산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하는' 공산주의적 이상이 완성되는 사회로의 과도기에 있었는데, 그 과도기적 문제를 지나치게 심각하게 받아들인 고르비가 설레발을 쳐서 다 말아먹었다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있다. 한국에서도 대학 교수 중에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얼핏 보면 막장 종북주의자들이 할 주장 같지만 걔들은 북한밖에 몰라서 소련은 관심도 없으며, 애시당초 북한은 출발만 공산체제지 실제로는 전제왕정이었으니 해당사항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주로 소련 말기의 개방기에 유학갔던 사람들 중에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좀 있는데, 한국에서 대학 다니려면 부모 등골을 빼먹어야 하는데 소련에서는 학비가 공짜일 뿐더러 대학생은 공부하는 게 일이라고 월급까지 주는 체제에 매료돼서 눈에 뭐가 좀 씌인 것이라고 보는 경우가 많은 듯. 어쨌거나, 위 단락의 내용처럼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인들의 삶의 질은 소련 시절보다 훨씬 열악하고, 그나마 좀 나아진 것도 블라디미르 푸틴이 집권한 뒤의 일이다.
중공업 우선주의에 대한 후세의 평가
급진적 공업화를 위한 농업 희생이 불가피했다는 견해도 있다.[* 대체로 현재의 러시아인들도 저렇게 생각하며, 푸틴도 저런 식으로 스탈린을 옹호했다.] 이게 꼭 소련의 경우에 한정된 것도 아니고 국가 주도의 고속 공업화를 추진한 나라에서는 대부분 농촌과 농업이 희생당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중공업화를 위해서는 국가의 자원을 공업 분야에 우선적으로 투자할 수 밖에 없고, 공업 노동력을 확충하기 위해서는 농촌 젊은이들을 도시로 끌어들일 수 밖에 없으며, 또 그렇게 도시에 밀집한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서는 농촌에서 생산한 식량을 싼 값에 도시에 공급해야 하니까... 스탈린 정권 당시의 소련이 사회주의 이념에 따라 토지를 국유화해서 이런 문제점이 크게 두드러진 부분은 있지만, 다른 나라도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당장, 한국의 경우에도 60~70년대 중공업화 기간을 거치면서 농촌이 거의 회생 불가능할 정도로 공동화 되었다는 점을 생각하자. 영국도 산업 혁명 당시 농촌의 붕괴로 인해 도시로 유입된 농민들이 저임금 노동자로 전락하는 문제를 겪었다.]
이렇게 중공업 우선주의는 인민 생활의 저하 등의 많은 문제[* 미국인 기자가 방문하고선 강철 생산 19톤당 인민 1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철생산을 위해선 베르됭 전사자 (약 70만)정도 사람이 희생 되었다고 추정한 것이다. '리처드 오버리' ≪독재자들≫.] 를 야기했으나 소련은 안보적으로 이에 우선순위를 둘 수 밖에 없었다.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 지도자들은 자본주의 세력이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전복하기 위해 쳐들어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고, 실제로 적백내전 당시 외국군들이 러시아 땅에 들어와서 혁명을 방해했기 때문에 이런 강박관념은 허상이 아니었다. 1920년대 초엔 폴란드에 쳐발리면서 붉은 군대의 현대화에 목말라 있기도 했다. 하여튼 중공업 투자가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련의 승리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소련군은 독일군 못지 않게 기계화가 되어 있어서 초반의 대패에도 불구하고 후에 승리할 수 있었다.[* 냉전 시절에 한국에서 독소전을 설명한 자료들에서는 이 부분은 빠지고 소련군을 단지 물량으로만 밀어 붙이는 야만적 군대로 묘사하곤 했다.] 실제로 1920년대에 투하쳅스키가 붉은군대의 현대전 작전 수행을 위해 필요한 전술에 필요하다 주장한 수만대의 전차, 장갑화 차량과 항공기의 요구는 당시 소련의 공업력 수준으로 불가능했고 스탈린의 공업화가 아니었다면 전시에 소련의 생산능력은 달성하기 어려웠다. 게오르기 주코프도 공업화가 아니었다면 전쟁에서 패했을 것이라며 이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여하간 이런 닥치고 밀어붙이는 스탈린의 경제를 "국가자본주의(State Capitalism)"로 보는 시각도 있다. 스탈린과 대척점에 선 트로츠키주의자를 자처하는 IS(국제 사회주의. ~~이슬람 국가아니다~~) 등의 소수 시각인데, 일리가 없는 시각도 아니지만[* 스탈린 시기에 도입된 노동영웅제도는 자본주의 사회의 회사에서 쓰는 우수사원 모범사원제도와 비슷하다.] IS 자체는 좌파내에서도 극좌 모험주의라고 비판될 정도로 급진적이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무리다. 그들은 지구상에 존재한/했던 공산주의를 표방한 국가들을 정부가 자본가인 자본주의 국가로 본다. 마찬가지 이유로 북한도 자본주의 국가로 본다. 그러다 보니 이들은 친북이 아닌 반북이 된다.
여하간, 적어도 수성, 발전의 측면에선 스탈린이 트로츠키보다 나은 인재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2차 대전의 이후 잭팟으로 전지구의 상당부분이 공산화되지 못 했을 것도 사실이다.
외교적 승리와 초강대국이 된 소련
그런 의미에서, 스탈린의 가장 큰 업적은 얄타 회담에서의 외교적 승리이다. 얄타 회담을 통해 스탈린은 루즈벨트의 불안함을 이용하여 대일전 참전을 약속하는 대가로 동아시아에서의 세력확장을 보장받았으며, 결과적으로 만주 작전을 통해 70만의 관동군을 2만의 사상자만으로 제압하는 위업을 달성하여 한반도에 진출할 수 있었다. 소련군의 진군 속도를 봤을 때, 일본이 1주일만 항복을 늦게 했어도 아마 한반도 전체는 소련군이 점령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유럽 각국에 공산정권을 세워서 소련과 서방의 완충지대를 마련했다. 2차대전에서 폴란드 침공의 결과 독일과 국경을 맞대었다가 독소전쟁 초반에 거의 나라가 망할 지경이었음을 상기하면 스탈린은 엄청난 희생에도 불구하고 결국 희생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 같은 경우는 수백만의 일본군을 대륙에 잡아놓는 대가로 약 2천만 가량의 인명을 희생당하고도 전후 처리에서 6주만에 참패한 프랑스보다 떡고물을 못 얻은 것을 보면 스탈린이 외교적으로 승리했다는 것은 명백하다. [* 다만 그 당시 중국은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으로 나뉘어 일본군이 침공하는 가운데서도 내전을 벌이고 정부가 각 당의 수뇌부로 이원화 되어있으며 국민당이 나치 독일과의 밀월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외교적으로 심하게 손실을 본 이유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름값도 못하고 6주만에 캐발린 다음 국민 다수에 의해 비시 프랑스까지 수립되고 독일의 속국화되어 전범짓을 하는 가운데(이를테면 홀로코스트협력 등) 자유 프랑스와 소수의 레지스탕스만이 대독전선을 형성했던 프랑스보다 외교적 혜택을 못 받은건 좀 너무한 처사이긴 하지만서도...]
2차대전이 끝난 이후의 스탈린은 인류란 종족의 정점에 올랐다고도 평할 수 있다. 미국의 대통령은 스탈린과 정치적으로는 대항점에 있다지만 권력으론 비할 바가 아니었다.
대인관계
대부분의 공산주의 국가에서 서기장은 막강한 권한이 집중되는 자리였으며, 특히 개인 숭배가 절정을 이루었던 스탈린 집권기에는 단순한 독재자를 넘어 봉건시대의 국왕과 유사한 지위에 있었다. 때문에 스탈린과 당대 주요 열강 지도자들 간의 대인관계는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국제 정세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아돌프 히틀러
당대 공산주의의 정신적 본산인 소련의 최고 권력자 스탈린과 공산주의의 무조건적인 척결을 외치는 나치당의 리더인 히틀러는 사상적으로 양립이 불가능한 존재였다. 게다가 히틀러는 예나 지금이나 동유럽의 주류 민족인 슬라브인을 유태인과 동급의 열등인종 취급하기도 했다. 비록 2차대전 직전에는 서구권 국가들이 소련의 대(對)독일 안보동맹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던 상황에서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독소 불가침조약이 체결되기도 했지만, 이는 불과 몇 년도 지나지 않아 화려하게 뒷통수를 맞으며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다만 20세기를 상징하는 최악의 독재자들답게 통치 기술(독재 기술)에서는 서로 상당한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스탈린의 대숙청은 히틀러가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벌인 두 차례의 숙청에 다소 영향을 받았으며, 히틀러 역시 프로이센 시절부터 전통적으로 독립적이었던 군부를 통제하는 데 스탈린의 방식을 상당수 차용했다. 심지어 히틀러는 소련을 정복한 뒤 유럽 러시아 영토를 관리할 적임자로 스탈린을 꼽기도 했다. 히틀러는 전쟁 후반기에 가서 고참 지휘관들이 자기와 계속 의견충돌을 빚자 , 측근들에게 "나는 정말 스탈린이 부럽다. 그 사람 정말 자기 뜻대로 군을 좌지우지하잖나. 나도 머리가 굳어버린 군윗대가리들을 스탈린처럼 모조리 쓸어버렸어야 했는데.." 라고 말하기도 했고,[* 그 유명한 히틀러 관련 영화인 몰락에서도 이와 같은 대사가 나온다.] 히틀러 암살 음모사건이 벌어진 이후에는 정말 스탈린 방식[* 쥐도새도 모르게 체포, 고문으로 거짓진술, 연출된 간략한 공개재판, 판결즉시 처형 ]으로 군부 숙청을 단행한다. 스탈린은 히틀러의 [에른스트 룀]과 SA상층부의 숙청사건([장검의 밤])을 보고, "봤지, 히틀러 그친구 참 멋지게 해치웠군"이라고 말하며 대숙청에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숙청술은 어느정도 비슷해 보이지만, 히틀러와 스탈린은 독재자적 성격상 완전히 달랐다. 스탈린의 통치술은 히틀러보다는 훨씬 치밀하고 정교했다. 일반 행정측면만 봐도, 스탈린은 세부사항까지 완전히 장악하고 챙긴 반면, 히틀러는 행정에 무능이 아니라 아예 무관심에 가까웠을 정도이다.[* 이때문에 히틀러의 명령을 행정기관에 하달하던 [마르틴 보어만]이 실질적인 독일의 통치자였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또한 스탈린은 절대로 2인자를 허용하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히틀러는 괴링, 히믈러, 보어만, 슈페어, 괴벨스등의 수많은 2인자들의 전횡을 방치했고,[* 스탈린은 전형적인 1인 원톱 체제를, 히틀러는 2인자들의 박터지는 충성경쟁을 통한 1인 권력의 강대화를 노렸던 것일 수도 있다. 참고로 2인자들의 박터지는 충성경쟁을 통한 1인자의 권력 강화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용한 방법이기도 했다. 그게 화가 되어 암살당하지만...]이들의 불화때문에 제3제국은 국력의 낭비가 심했다.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루즈벨트, 스탈린, 처칠은 연합국의 세 주축인 미국, 소련, 영국을 대표하는 지도자로서, 전시의 전략적 결정 및 전후처리를 위해 여러 차례 회동했다. 사적인 자리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어떠한 인상을 받았는지는 정확히 알 도리가 없지만, 루즈벨트는 파시즘에 대해서는 강경했던 반면 사회주의-공산주의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유화적인 입장이었고, 때문에 전쟁중에 이루어진 몇 차례 회담에서도 루즈벨트와 스탈린은 상반되는 이념에 비해서 다소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미국이라는 불편한 동맹국 지도자의 호의를 철저히 이용할 능력과 의도가 충분한 현실주의자였고, 국제연합이나 자유선거 등 미국의 다소 이상적인 전후 구상에 장단을 맞추어주는 대신[* 알다시피 국제연합은 불과 5년 뒤에 그 한계가 드러났고, 동유럽에서의 자유선거 약속은 말뿐이었으며 철의 장막 너머에는 죄다 소련의 후원을 받는 공산정부가 들어서게 된다.]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등지에서의 실질적인 영향력을 공인받는 데 성공했다. 당시 소련의 절망적인 상태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자본과 공업력이 건재한 데다 렌드리스를 통해 사실상 연합군의 전쟁물자를 대부분 책임진 미국에게서 상당한 양보를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이는 전후 냉전의 주도권을 내줄 뻔 한 루즈벨트의 대표적인 실책이자 스탈린의 외교적 승리로 평가받는다. ~~이쯤되면 진짜 루즈벨트에게 전승훈장 줘야할 기세~~
그러나 루즈벨트가 소련에 유화적이었다는 것을 실책으로 보는 것은 결과론적으로 본 것이고, 당시 시점으로 보면 루즈벨트도 스탈린에 휘둘린건 아니다. 미국도 전통적인 고립주의자의 입김이 세기 때문에 전후처리를 두고 소련과 아웅다웅하기는 힘들었고, 스탈린은 이를 잘 이용한셈이었다. 또한 루즈벨트가 단순히 스탈린에게 양보만 한 것은 아니다. 루즈벨트는 스탈린의 대일전 참전 약속은 받아냈으며, 이는 사실 2천만명 넘게 희생한 소련을 다시 큰 희생이 요구되는 다른 전쟁으로 끌어들인 것은 매우 큰 소득이었다. 원자폭탄 투하와 [wiki: "8월의 폭풍 작전" 소련군의 관동군 궤멸]로 일본이 쉽게 GG친 것처럼 보여서 사실 소련의 대일전참전은 가볍게 여겨지고 있지만,미국은 일본 본토 점령전에 거의 100만이 넘는 희생을 각오하고 있었으며, 일본과 중립조약이 되어 있는 소련을 여기 끌어들이기 위해 유럽에서 대폭 양보를 한 것은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로 인해 일본이 항복을 하지 않았다면 소련 역시 몰락 작전에서 엄청난 피를 흘렸을 것이다. 그만큼 소련군에게도 이득이 있긴 있었겠지만(이를테면 한반도, 일본 북부) 독소전쟁에서 이미 연합군 최고의 피해를 입었다는 점을 상기하자.
윈스턴 처칠
루즈벨트와는 달리 처칠은 전후에도 떠오르는 미소의 도전을 뿌리치고 대영제국의 영광을 유지하려는 입장이었다. 제국주의자이자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였고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처칠이 각국의 반제국주의 세력을 후원하는 공산주의자인데다 강철의 독재자인 스탈린과 친하게 지내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게다가 전통적으로 유럽 대륙의 중재자 역할을 자처해온 영국으로서는 안보상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도 전후 패권국으로 부상할 것이 자명한 소련을 외교적으로 반드시 견제해야 했으며, 이는 제2전선 문제나 자유 폴란드의 전후 처리, 독일 분할 문제 등의 사안을 두고 양국의 첨예한 대립과 의심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쇠퇴해 가는 대영제국의 힘만으로 소련에 맞서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사실 처칠은 독일의 항복 후에 잔존독일군과 서방연합군이 연합하여 소련군을 공격, 동유럽에서 소련군을 몰아내려는 언싱커블 작전을 벌여 소련의 뒤통수를 치려는 음흉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뒤통수를 벌이기에는 미국이 여기에 매우 소극적일 것 같고, 새로운 전쟁을 만드는건 매우 여론이 안좋은데다가, 결정적으로 영국군 참모부가 유럽전선에 전개된 소련군이 서방 연합국에 비해 3배 많아서 이기기 힘들다는 평가를 내려 취소했다.[* 이 언싱커블 작전은 90년대 비밀이 해제되면서 수면에 나왔지만, 소련은 당시 스파이망을 동원해 이런 처칠의 의도는 대충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스탈린 자신도 처칠을 매우 안좋게 생각했다고 흐루쇼프 회고록에 나온다. ] 처칠의 반소련 정책은 미국의 미온적인 반응과, 결정적으로 처칠 자신이 종전 직후에 실각하면서, 처칠과 스탈린의 대결은 스탈린의 판정승으로 돌아가게 된다.
해리 S. 트루먼
종전을 얼마 앞둔 1945년 첫 집권한 트루먼은 반공주의자였고,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고자 노력했다. 트루먼의 입장에서 미소간의 대규모 첩보전이나 베를린을 둘러싼 갈등, 동유럽 및 제3세계의 연이은 공산화 등 일련의 시대적 흐름은 스탈린과 소련을 신뢰할 수 없는 파트너로 여기게 했으며, 스탈린의 입장에서도 서방 연합군이 진주한 지역에서 벌어진 공산주의에 대한 탄압이나 마셜 플랜 등으로 대놓고 소련을 견제하며 적성국 취급하는 미국이 고까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 소련은 미국이 전쟁 동안 보여준 압도적인 생산력과 핵무기로 대표되는 첨단 기술을, 미국은 소련이 독소전쟁에서 보여준 불굴의 저항정신과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기갑전력을 각기 두려워했고, 양국 모두 전쟁으로 엉망진창이 된 상황에서 ~~물론 이건 아예 본진이 털린 소련이 훨씬 더 심각했지만~~ 또다른 전쟁을 수행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기 때문에 정말 다행스럽게도 미소간 전면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한편 소련군이 만주 작전으로 만주를 넘어 한반도 북부까지 폭풍처럼 밀고 내려오면서 38선을 경계로 미소간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졌고, 급기야 1950년 한반도에서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냉전의 첫 포화를 알리게 된다. 다만 스탈린은 매우 조심스러운 성격이었고, 히틀러처럼 과대망상증 환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미국의 국력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고,(일부 반공소스가 주장하듯이) 미국과의 세계대전을 꾸미려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공군과 북한군의 공군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한국전쟁에 어쩔수 없이 공군을 참전시키면서도 미국과의 마찰을 피하려고 엄청나게 신경썼다.
마오쩌둥
스탈린이 사망하고 집권한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비난하자 마오쩌둥은 흐루쇼프를 수정주의자라고 비난했다. 사실 스탈린은 자시의 혁명이론을 깡그리 무시한 마오쩌둥을 불신했고, [국공내전] 말기까지도 마오쩌둥보다는 장제스를 지원했을 정도이다. 마오쩌둥의 국공내전 승리를 예상하지 못한 스탈린은 마오쩌둥과 장제스에게 전쟁을 반대한다고 말하고 중국 분단을 제안했지만 압도적으로 강했던 장제스와 약했지만 승리를 확신한 마오쩌둥은 전쟁을 했고 마오쩌둥이 역전하여 승리하자 "승자는 비난받지 않는다"고 말하며 마오쩌둥을 인정하고 중공 정권에 거액의 차관을 제공하고, 기술고문을 파견한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스탈린 사후에 나온 마오쩌둥의 후기저작에서는 스탈린에 대한 비판이 많이 나온다. 즉, 스탈린은 기술과 생산력을 사회주의로 가는 가장 큰 요소로 보았는데, 마오쩌둥은 그 반대로 인간의 의지를 더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이런 입장에서 스탈린의 사상을 비판한것. 마오는 스탈린이 70퍼센트의 위업과 30퍼센트의 과오를 저질렀다고 평했다. 중소관계가 최악이었던 [* 당시 중앙아시아와 만주접경에서는 중소 양군 수백만이 일촉즉발의 태세로 대치중이었다.] 1969년 10월 1일 국경절에 톈안먼 광장에 레닌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세웠다.
김일성
한마디로 김일성은 스탈린의 빵셔틀이었다.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는 오만방자한 김일성이 유일하게 무서워한 사람이 다름아닌 스탈린이었다. 마오쩌둥에게조차 강요해서 6.25 전쟁을 지원받기로 약속받았던 그 김일성은 오직 스탈린에게만 굉장히 어려워했다. 그래서 전쟁을 일으키려고 스탈린에게 허락을 받으러 갔으나 번번히 퇴짜를 맞고 쩔쩔맸다. 그럼에도 김일성은 그 전쟁만은 무조건 일으켜야 했기 때문에 스탈린을 설득하기 위해 머리 터지게 말을 만들어냈고 결국 애치슨 라인을 열심히 설명해서 스탈린에게 "한국에 전쟁을 일으켜도 미국이 관여하지 않는다"고 계속 설명해서야 간신히 전쟁을 허락받았다. --그런데 미국이 혼자 오지 않고 UN을 끌고왔다. 어?-- 하지만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전쟁 허락을 받았어도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소련군 중에서 육군은 아예 내주지 않았고 극소수의 공군만 지원했다. 소련은 세계대전을 우려해 공군의 참전조차 감추었지만, 미국도 이를 인지하고서도 문제삼지 않았다. 미국도 전쟁의 확대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족사
두번 결혼하여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었다. 그리고 '사생아 아들이 세명 더 있다는 설이 있다.[* 이런 사생아 설은 서구의 야사적인 전기작가들이 발굴한 것인데, 공식 역사학계에서는 그다지 비중을 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밝혀졌다고 보기 보다는 설이라고 쓰는게 합리적이다.] 사실 가족에게도 냉혹한 성격으로 처자식조차 믿지 않았다. 야코프 자신도 이런 저런 일로 자살 기도를 한 적이 있었고, 스탈린은 그 소식을 듣고 그 놈은 총도 제대로 못 겨누는 군인이라고 했다.
장남 야코프 주가시빌리
야코프 주가시빌리(Яков Джугашвили, 조지아어로는 이아코브 주가슈빌리-იაკობ ჯუღაშვილი)는 첫결혼에서 탄생한 아들이며 그루지야에 남겨져 조모에게 길러지다가 아버지인 스탈린이 최고권력자가 되자 모스크바로 와서 살게 되었다. 2차대전 당시에는 포병장교로서 군에서 복무하다 독일군에 포로가 되었다. 그 당시에는 자신이 직접 명령으로 '독일에 투항하면 반역자로서 취급하고 그 가족들도 피해를 받게 하라.'라고 항복을 못하게 강력히 지시해놓은 상황이었는데, 스탈린은 실제로 아들의 가족을 투옥시켜버렸다. ~~그 가족 중 애비는 당연히 열외로 하고~~[* 손자 예브게니 쥬가슈빌리 역시 예외였다.] 게다가 '내 아들이라 하더라도 반역자는 가만 놔둘 수 없다.'라고까지 하는 등 완고했는데, 아들은 결국 독일군 포로수용소에서 죽었다.
이래서 그런지 "스탈린은 가족에게도 냉정했던 철면피다."면서 그를 비난하기도 하는데 전시 지도자로서는 솔선수범을 했다고 봐야 할 듯.~~어느 나라 정치인들과는 비교된다.~~ 스탈린의 두 아들은 모두 제2차 대전에 참전해서 최전선에서 사지를 넘기는 근무를 했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 스탈린이 가족에게 냉혹했다고 비난하는 주장은 주로 종교계를 중심으로 하는 서구권의 반공진영에서 나온다. 일단 이런 나라들은 직접적인 전쟁위협을 덜 느끼는 편이고,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 역시 징병제나 국가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강한 편이라서...(서유럽 중도우파야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하고 국가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강한 건 유명하니까) 아무리 전쟁이라도 어떻게 아들을 버릴 수 있느냐는 감성을 가지기 쉽지만, 징병제를 유지하는 한국 입장에서 이런 감성에 동의하기는 쉽지 않을 듯.].
스탈린은 며느리를 반역 행위로 수감했지만, 야코프는 그래도 포로생활을 의연하게 했다고 한다. 독일 측이 스탈린의 아들이라는 거대한 가치를 지닌 야코프를 전향시키려고 했는지, 독일의 --거지같은--거대한 군수공업을 보여주었지만,[* 스탈린의 아들이 전향한다면 아마도 소련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질 것이다.] 야코프는 소련측이 최후에 승리할 것이라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고, 독일 측은 다시 야코프를 포로수용소에 수용했다.
그런데 기밀 해제된 그 측근들의 증언 등에 따르면 스탈린은 가끔 아들을 걱정하는 이야기들을 했으며, 여러 번 야코프를 탈출시키기 위해서 포로협상과 구출작전도 계획하고 실행도 했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고 한다. 구출작전에 대해서는 스탈린에게 '감히' 언급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그나마 유일하게 게오르기 주코프가 구출작전 이야기를 물어보긴 했다고 한다. 스탈린 역시도 동의하고 구출작전을 지시했으나, 실질적으로 구출작전을 실행할 방법이 없었다. 야코프는 매우 불확실한 정황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되었는데 비밀해제된 러시아의 자료로 현재 밝혀진 바에 의하면 수용소의 명령를 듣지 않아 초병에게 사살되었다고 한다. 원래 우울증을 앓고 있었으며, 그랬기 때문에 전쟁 전에 자살기도를 했으나, 총을 제대로 못쏴서 상처만 입었다.
한편 독일 측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때 포로가 된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와 야코프를[* 파울루스를 구하기 위해 제안한 게 아니라 잡아다 처형하려고 포로 교환을 요구했다.] 바꾸자고 소련 측에 제의했으나, 스탈린은 "모든 소련군 포로와 바꾼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야코프는 전우들과 운명을 같이 한다." 라며 거절했다. "중위랑 원수를 바꾸자니 뭔 개소리?" 라는 반응을 보였다고도 한다. ~~모범적인 지도자구먼.~~ 한편, 파울루스 원수는 "아니, 원수 씩이나 돼서 상병 나부랭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그의 계급.]따위를 위해 목숨을 버리라고? 웃기는 소리지."라 말하며 그대로 소련에 투항했다.
차남 바실리 스탈린
https://www.historyinanhour.com/wp-content/uploads/2011/12/Vasily-Stalin.jpg 소련공군 소장 예복을 입은 바실리 스탈린. 얼굴 생김새가 아버지의 유년기와 매우 비슷하다.
둘째 아들인 바실리 스탈린(Василий Сталин)[* 주가시빌리(Джугашвили)라는 조지아식 성을 붙여준 첫째아들과는 달리 두번째 아들은 자랑스럽게 "스탈린"이라는 성을 가지게 되었다.] 는 지상공격기 IL-2 조종사였는데, 26번 출격한 공로로 --물론 아버지 후광도 있었겠지만-- 20대에 공군 장성까지 되었다. IL-2는 많이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손실율도 엄청났기 때문에 위험한 임무를 수행한 것임은 틀림없다. 둘째 아들은 전후까지 생존하였는데, 모스크바에서 승전기념 에어쇼를 하다 충돌사고가 일어나자 스탈린이 책임을 물어 해임되었고 --정말 아들 강하게 키우시네요-- 스탈린 사후 아버지가 독재자로 격하당하자 술에 쩔어 살다가 41세로 요절했다. 흐루쇼프가 제20차 공산당 대회에서 아버지를 모독한 것에 대한 회한도 있고 자신의 입장에 대한 불안감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아버지가 없는 소련에서 흐루쇼프가 자기를 찢어죽일 거라고 이야기하곤 했다고 한다.
라리사 바실리에바의《크레믈린 여인들》에 따르면 부하린이 어느 때 스탈린을 만나러 갔을때 스탈린은 갓난 아기였던 바실리의 얼굴에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아기가 콜록거리며 우는 걸 보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고 한다.(…) "아, 괜찮아. 애한테 좋은 일이라구. 연기를 뿜어주면 이 놈이 강해진단 말이오!"라고 했다. 흠좀무[* 2000년대 이후로는 천하의 개쌍놈이나 할 막장짓이지만 사실 우리나라도 90년대까진 이랬다. 그땐 극장에서 영화보며 담배피고, 택시기사가 손님 태우고 운전하며 담배피고, 버스나 지하철에서 승객들이 담배피고, 강의실에서 교수가 강의하며 담배피던 시절이라...].
외동딸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
https://troglopundit.files.wordpress.com/2011/11/svetlana-alliluyeva.jpg?w=202&h=300 만년에 미국에서 인터뷰를 하는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
외동딸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Светлана Аллилуева)는 스탈린에게 매우 귀여움을 받고 자랐다. 아버지를 닮았는지 머리는 꽤 좋아서 러시아어는 물론,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에도 매우 유창했고, 최고 명문대인 모스크바대학을 나와서 번역자와 대학강사로 일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두 아들들과 마찬가지로 딸에 대해서도 그다지 특전은 주지 않았고, 분가 후 생활은 서민처럼 했다고 한다. 첫번째 결혼에서 대학시절 만난 교우와 결혼했다가 딸 하나를 낳고 이혼했다. 그 이혼이 스탈린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으며, 이혼 이후 스탈린이 자신의 관저 옆에 그녀의 집을 만들어 놓고 그녀를 사실상 감금시켰다는 주장도 있다. 참고로 그녀의 첫사랑이었던 유대계 시나리오 작가 알렉세이 카플레르를 스탈린이 무척이나 싫어했었고, 여러 차례 총살시키려고 했었으나, 결국 굴라그로 보냈는데, 스베틀라나가 이 때문에 스탈린에 반감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후 스탈린이 독재자로 격하당하자 자신의 성씨였던 스탈리나(Сталина, 스탈린의 여성형 성씨)를 그녀의 어머니이자 스탈린의 두번째 부인이었던 나데즈다 알릴루예바(Надежда Аллилуева)의 성씨에서 따온 알릴루예바로 바꾸었다. 그동안 아버지의 심복인 즈다노프의 아들과 두번째로 결혼했다가 자식낳고 얼마안가 이혼하고, 다시 결혼은 하지 않고 인도의 공산주의자와 동거하다가 1967년 미국으로 망명해 이주하여 '라나 피터스(Lana Peters)'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피터스 라는 성은 미국에서 재혼한 세번째 남편 건축가 윌리엄 피터스의 성을 딴 것. 그와의 사이에서도 딸을 한 명 낳기도 하였다.
1984년에는 두명의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과 딸이 있는 소련으로 다시 귀국하여 소련 국적을 회복한 후, 소련 당국의 강요였는지, 자의에 의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에서 하루도 자유로운 날이 없었다" 라며 공개적으로 미국을 비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2년도 채 못돼서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고, 1980년대 말에는 영국에서 잠시 살다가, 말년에는 미국의 위스콘신 주의 소도시 리치랜드에서 외부와의 접촉을 피하며 극도로 폐쇄된 생활을 했다. 그 후, 2011년 11월 췌장암으로 사망하였다. 사망하기 1년 전, 미국 일간지 '위스콘신 스테이트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스탈린이 내 인생을 망쳤다. 어딜 가던 나는 아버지의 이름 아래 언제까지나 정치범으로 남을 것이다." 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 전에 소련에 있을 당시에는 소련 공산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스탈린은 도덕적, 정신적인 괴물이다." 라고 공개비판하기까지 하였다. (...) 하인리히 힘러나 도조 히데키의 딸과는 비교되는 부분, 망명 후에 미국에서 '나의 아버지 스탈린'이라는 글을 썼는데, 이것이 소련 정부의 어그로를 끌었다. 당연히 소련에서는 금서. 그러나 그녀는 이 책으로 큰 돈을 벌었다.
그녀의 망명 당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소련 정부는 그녀의 망명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으며, 오히려 그녀의 망명으로 스탈린과 그 가족들의 명예가 실추되길 내심 기대했었고, 당시 미국에서도 그녀에게 그렇게 크게 신경을 쓰진 않았었다는 주장도 있다.
아내들
아내들에게는 좀더 다른 태도를 보였다는 기록도 있는데 첫 아내가 결혼 2년도 못채우고 병사하자 몇 달 동안 상복을 입은 채로 슬퍼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에 관하여 한 말이 앞서 보듯이 "나는 첫 아내를 묻으며 인간에 대한 애정 또한 묻었다."] 두번째 아내가 자살한 직후에는 정치국에 사표를 내고 서기장 자리를 물러나겠다고 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랬으면 역사는 달라졌… 으려나?--
그러나 첫 아내의 사인은 원래 허약한 아내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이곳저곳 도피생활을 반복하다 생긴 영양실조가 원인이 된 티푸스였고 두번째 아내의 자살 원인은 스탈린이 혁명 동지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것에 충격을 받아 생긴 우울증이라고 보고 있으니[* 자주 도는 일화는 두번째 아내가 아는 사람이 굴라그로 추방될 위기에 처하자 스탈린의 아내를 통해서 줄을 놔서 추방을 면하려고 했다고 한다. 물론 강철의 대원수는 추방될 사람과 아내에게 줄을 놓는데 가담한 사람 전원을 처형시켰다고 한다. 냉전 때 돌던 이야기니 신빙성은 얼마나 있을지?]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다.
사생아
앞서 말하듯 유배 시절 사생아가 있었다는 소문이 있는데, 흥미로운 케이스가 조선에서 태어난 손자인 유리 다비도프. 노보쿠즈네츠 지역 건설기술업자인 그는 인터뷰를 통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시베리아 쿠레이카 마을에서 혼외로 자신의 부친 알렉산드르가 태어났으며 출생 후, 아버지인 스탈린은 곧 떠났고 어머니는 한 마을에 살았던 '다비도프'란 성을 가진 남성에게 시집가 다비도프란 성으로 자랐으며 차후, 스탈린은 아들을 모스크바로 부르려 했으나, 그의 어머니가 동의하지 않았다."
사생아인 아버지가 1941년 독소전쟁에서 모스크바 방어전에 참전했으며, 이후 일본군의 침공을 대비하여 다시 극동지방으로 부대가 이동하였다고 한다. 유리 다비도프가 태어난 경위는 그의 아버지가 적군으로서 "한반도(조선반도) 해방전투(만주 작전)"에 참여했으며 1948년 4월 22일에 조선(북한)에서 아들을 보았다는 것이며, 1955년 노보쿠즈네츠크에 영구적으로 정착했다고 한다. # 콤소몰스카야 프라프다 러시아신문의 보도.
믿거나 말거나
신빙성이 희박한 루머이긴 하나 사모님과 비서, 자신해서 3P플레이를 시도하려 했다가 사모님에게 퇴짜를 맞은 적이 있다 한다. 사모님은 당연히 울고불고 뛰쳐나가고, 실망한 스탈린은 비서 하나를 더 불러서 소원을 성취했다 한다. 흠좀무. 그리고 진짜인지는 모르지만 어린이를 사랑해서 같이 자기까지 했다는 소문도 있다. 진실이라면 페도필리아. 그가 로리콘이란 설은 있다. 그의 딸 스베틀라나의 기록에 의하면 스탈린은 사망 직전 병적으로 소년, 소녀들의 사진을 무차별적으로 수집했다고 전한다.[* 스탈린이 치매에 걸렸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노년에 치매에 걸리면 증상 중 하나로 갑자기 페도필리아 증세를 보일 수 있다고 한다. 당신들의 조국의 작가 로버트 해리스의 가상역사소설 아크엔젤이 스탈린의 어린이 사진 수집을 중요한 플롯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이런 페도필리아설의 신빙성이 낮은 것이, 아동성애에 대한 거부감이 격심한 미국이나 서유럽에서 누군가에 대한 흑색선전을 하면 꼭 나오는 것이 아무개는 페도였다는 이야기라서... 스탈린 페도설, 베리야 페도설, 마오쩌둥 페도설이 다 있는데, 뭐 공산당이 무슨 페도당도 아니고?]
또 다른 루머로는 스탈린의 자살한 두번째 부인 나데즈다 알릴루예바(나디아)가 실은 자신의 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는 나데즈다의 어머니와 스탈린이 내연관계였다는 썰에 기초한 것이다. 스탈린은 나데즈다의 아버지의 집에 자주 피신을 왔는데, 이때 어린애였던 그 딸과 친해졌고, 혁명 후에 그 애와 결혼을 했다. 결혼할 당시 나데즈다는 18세, 스탈린은 40세로서, 아무리봐도 정상적인 결혼은 아니었다. 나데즈다가 자살한 이유는 스탈린이 자신의 친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 너무나 충격받아서 그랬다는 것이다. --정말 엘렉트라 돋네요. 아니면 룻의 딸들이냐--[* 문제는 이 설 자체가 말이 안되는 건 스탈린이 나데즈다의 부모와 처음 알게 된게 나데즈다가 3살때였다는 것이다. 어머니와의 내연설은 사실 당대부터 있지만 나데즈다가 딸이라는 건 조금만 봐도 성립되기 어려운 일.]
또는 항상 민심을 탐방하던 나데즈다가 스탈린 앞에서 농업정책 실패와 대숙청을 비난하자, 이를 듣고 스탈린이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끝에 부인을 사살하고 자살로 위장했다는 썰도 있다.[* 김일성도 비슷한 이야기가 도는 걸 보면 냉전시 흑색선전은 어디나 비슷하다. ~~혹시 정말 아냐?~~ 이런 이야기가 나온 것은 나데즈다가 자살한 방에서 나온 문건이 당시 감옥에 있던 고위 볼세비키 당원이 퍼뜨렸던 스탈린 흑색선전에 대한 문건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건 비밀 서류도 아니었고 스탈린이나 기타 당원들도 사건 자료의 목적으로 보던 문건이었고 무엇보다도 스탈린 자신이 읽다가 만 것이었다!]
하지만 냉전 이후 공개된 KGB의 사건 조사서 및 의학 기록 등의 문서 자료에 의하면 나데즈다는 말 그대로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었다는게 정설, 계속되는 두통과 발작, 빈혈, 생리불순(폐경기도 아니었지만 3년 넘게 하지 못했다.) 등등으로 정신적으로 피폐했다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피폐한 상태에서 여러 사람들과 모인 파티 직후에 충동적으로 방에서 총으로 쐈다는 것이 오늘날에는 결론으로 정립되었다. 게다가 둘째 아내와는 결혼생활도 그다지 좋지 못했다. 나디아는 사교적이고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길 원했지만 스탈린은 내조를 원했던 것. ~~소련은 원칙적으로 양성평등 표방 국가가 아니었나?~~
아내들의 끝도 좋지 않았지만 처가 식구들의 끝은 더 좋지 않았다. 부하린이나 과거 다른 볼셰비키들과의 친분도 있었지만, 스탈린은 자신이 인격적인 모습이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1930년대 이후에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스탈린 관련 포스터를 보면 스탈린을 마치 부동자세를 취한 고요한 신처럼 그리고 있는데, 군중들 속에 섞여 있거나 캐리커쳐로 바뀌어 역동적인 모습을 보이는 레닌 포스터와는 천차만별이다. 이러한 자신의 인격적인 모습을 알고 있는데다가 그것을 출판까지 한 처가 식구들은 스탈린의 눈에 좋기 보일 리가 없었고, 아내도 죽었기 때문에...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의심과 불안
굉장히 심약해서 잔걱정과 겁이 많은 성격으로, 권력의 정점에 오른 뒤에도 불안을 버리지 못해 대숙청을 감행하였다. 특히 군을 믿지 못해 장교를 왕창 죽였으며, 이것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군이 고전하는 원인이 되었다고도 한다. 이 때문에 미하일 투하쳅스키같은 많은 유능한 장교들이 숙청당했고, 콘스탄틴 로코솝스키도 거의 죽을 뻔했다. 그 자리를 메꾼 자들 중 주코프를 비롯한 2차대전의 스타급 장성들도 있었기 때문에 인적 자원 자체의 손실은 결정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스탈린 본인은 군부에 대한 숙청을 상당히 망설였다고 한다.
한편으론 매우 사무적이고 꼼꼼하여 수많은 서류를 자신이 직접 보고 결재하고 계산해 가며 업무를 했다고 한다. ~~소련의 진시황?~~ 그런 과도한 업무에다가 자신이 신경 안써도 될 너무 많은 일에 신경을 쓰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다 독소전쟁 시절에는 직업군인들이 짠 작전의 세부적인 면에까지 간섭하다가 몇 번 크게 말아먹었고, 그다음부터 작전에 그다지 간섭을 안했다니, 그래도 최소한의 이성은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 못한 히틀러는 결국...
한편, 정작 자신은 새벽 3~4시까지 일하고 잠자리에 든 뒤 다음날 11시쯤 늦게 일어났는데 주위 당 간부들과 군 장교들은 그러고 나서도 또 업무시간을 엄수해야 했으므로 실질적으로 잘 수 있는 시간이 2~3시간도 안되는(…) 경우도 많았다. 거기다 술까지 폭음을 했기에, 주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과로에 수면부족에 숙취까지(…) 3중고로 시달려 결국 병을 얻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은 스탈린 통제 하의 동유럽 공산당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여서, 스탈린의 생활리듬에 맞춰 동유럽 공산당 지도자들도 생활리듬을 모두 바꿔야 했고, 언제 스탈린이 전화를 때릴지 몰라 늘 전화기 옆에 붙어 있어야 했다고 한다(…).
머리는 상당히 명석한 편으로 판단력이나 이해력은 서방의 관찰자들도(심지어는 윈스턴 처칠도!) 놀라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게다가 기억력이 상당히 좋았는데, 문제는 잊어버려야 할 사소한 원한 같은 것도 기억했다가 후에 모조리 배로 갚는다는 점. 아주 기억하기도 힘든 작은 노여움 때문에 후에 숙청당한 이도 많았다. ~~머리가 나쁘면 독재자를 하기도 힘들다.~~ 반대로 스탈린이 유배 생활 도중에 즐겁게 지내고 동지들과 연락하는 걸 방조해주었다는 이유로 부농으로 몰린 유형지 간수 하나를 그냥 풀어준 경우도 있었다(...).
스탈린의 의심 때문에 연해주에 살고 있던 우리 동포와 독립군들이 중일전쟁이 터진 1937년 일본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며 강제로 중앙아시아 지역까지 끌려가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상당수가 죽어버렸다. 물론 그들은 고려인이라는 이름으로 그 곳에서도 나름대로 잘 살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올라서기까지의 고통은 누구라도 다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고려인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면, 항상 그 당시를 이야기 하는데 영하 -10도인 상황에 몸만 던지고 알아서 살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땅굴을 파서 겨우겨우 살아 남은게 현재 고려인이다. 홍범도 장군도 이 때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로 가서 극장 간수로 취업하여 빈곤한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잠시 묵념.
또한 1941년 독소전 발발을 틈타 캅카스의 무슬림 체첸인들이 게릴라 활동을 벌이자 1944년 봄, 체첸인들을 독일군과 협력했다는 명목으로 인근의 잉구시인과 함께 몽땅 중앙아시아로 이주시켰다. 당시 체첸인의 10%가 강제이주 당시 사망했다. --소수민족 탄압은 소수민족 출신이 잘하죠-- 이들은 흐루쇼프 시기가 돼서야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물론 캅카스인이나 고려인만이 타깃은 아니었고, 우크라이나 크림 반도의 타타르인들도 스탈린에게 밉보여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다. 실제로 캅카스나 아시아 출신 러시아 포로들을 이용해서 독일군은 파르티잔들을 때려잡거나 포로 감시소 경비로 쓰기도 했다. 그러니 아무 근거 없이 숙청한건 아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수시로 숙청을 단행했으며, 죽기 직전에는 자기 주치의들을 숙청하기 시작해서, 주치의들이 고문을 당하고 있었던 관계로 발작을 일으켰는데도 손을 쓸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90년대에 구소련이 붕괴되고 여러 자료들이 비밀 해제되자 라브렌티 베리야가 독살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하지만 그 베리야도 흐루쇼프에 의해 축출…. 이 외에도 흐루쇼프와 말렌코프가 용의선상에 오르기도 한다. 심지어 저 3명이 공범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말년에는 의심이 너무 심해져서 심지어는 자신의 충복이었던 베리야조차도 믿지 못했을 정도. 게다가 필생의 라이벌 아돌프 히틀러의 망령이 씌웠는지, 갑자기 유대인들이 음모를 꾸며 자신을 해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1953년부터 유대인들에 대한 체포 사건이 계속 벌어났고, 스탈린이 죽기 직전에는 "유대인 의사 음모사건"이 소련 신문에 보도되기 시작했다. 유대인 의사들이 스탈린을 암살하려 했다는 것. 이는 대숙청 당시와 비슷한 패턴이라 소련 인민들은 모두 긴장했으나, 본격적인 숙청이 이뤄지기 전에 스탈린이 사망하므로서 흐지부지되었다. 스탈린 사후 유대인 의사 음모사건이 조작이라며 혐의자를 모두 KGB(NKVD의 후신)에서 풀어준 사람은 다른 사람도 아닌 베리야였다. [* 전 버전에서 농아를 숙청했다고 잘못 기술된 레닌그라드 사건(1950)은 농아학교의 교사진이 연루되어 숙청된 사건이다.]
이야깃거리
그는 대다수의 독재자와는 달리 여성편력 면에서는 그다지 특기할 만한 것이 없다. 독재자 치고는 사생활이 매우 담백했고, (소문으로 있는) 사생아도 권좌에 오르기 전에 낳은 것이다. 하지만 스탈린의 명령을 집행하던 NKVD 부장들인 겐리흐 야고다, 니콜라이 예조프, 라브렌티 베리야는 하나같이 변태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색마이자 새디스트들이었다. 실제로 위에서 언급된 스탈린의 3P 얘기는 양성애 성향의 변태였던 예조프의 얘기가 와전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여담으로 예조프는 실제로 한 부부를 통째로 협박하여 동시에 3P로 성관계를 가졌다. 여자아이들을 납치해서 같이 잤다는 얘기는 베리야의 얘기가 와전됐을 가능성이 크다. 베리야는 실제로 NKVD를 동원해 여자아이들을 무작위로 납치, 강간하는 것을 즐겼다.
콜라와 관련해서 꽤 재밌는 일화가 있는데, 트루먼 대통령이 보내준 코카콜라의 맛에 감탄을 하면서도 그런 음료가 서구에서 나온다는 것에 격분하며 식품화학자 미트로판에게 배를 원료로 해서 콜라를 능가하는 음료를 만들라고 명령했으며, 콜라를 수입금지시켜버렸다.[* <스탈린>의 저자 로버트 서비스는 이에 대해서는 스탈린의 말에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사족을 남겼다.] 그러자 콜라의 맛에 푹 빠졌던 게오르기 주코프는 안절부절 못해서 콜라를 밀수입해서 들어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스탈린은 말년에 러시아에 대해서 병적으로 집착했으며, 또한 모든 위대한 인류의 지적 유산은 소련과 러시아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고 믿으며 역사왜곡까지 하려고 들었다. 그는 말년에 소책자로 <마르크스주의와 언어학의 문제점>를 냈는데, 이 책에서 그는 '러시아 민족의 언어'의 기원을 쿠르스크와 오룔 지방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현대의 언어학자들 중 어느 누구도 이러한 말에 동의를 하지 않지만, 스탈린이 이러한 주장을 한 것은 유럽의 르네상스의 뿌리를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에 두려는 열망에서 비롯되었다.
2차대전 직전 미국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은 소련과, 소련 국내에서 폭압 통치를 자행하는 스탈린을 맹렬하게 까댔으나, 이후 독소전이 발발하고 소련이 자신들의 우군이 되자 이번엔 소련의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바꾸기 위해 대대적인 선전을 했다. 이 과정에서 스탈린에게도 애칭을 붙였는데, 바로 조 아저씨(Uncle Joe).[* 실제로 이후에도 조, 혹은 조 아저씨는 소련의 상징이 된다. '샘'과 '조'는 냉전기를 상징하는 이름으로, 특히 수학자 폴 에어디쉬는 자신의 수수깨끼같은 말버릇 중 하나로 이런 말을 애용했다.] 링크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 아니라 '조 아저씨의 굴라그'~~ 단 스탈린은 이 별명을 싫어했다고 한다. 얄타 회담에서 루즈벨트가 회담의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고 '미국인들은 스탈린을 친근하게 조 아저씨라고 부른다'고 조크를 던졌는데 스탈린은 불쾌해했다고 전해진다.
자신을 강철의 사나이로 자칭했지만 고소공포증 환자였다. 1943년 연합국 지도자와 열리는 테헤란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캅카스 지방 바쿠까지 열차로 이동하고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스탈린은 비행기를 타고 갔다. 다만 격이 떨어진다면서 조종사를 장군으로 하라는 측근들의 건의를 물리치고 대령에게 조종간을 잡게 했는데, 이유는 "장군까지 됐으면서 비행기 모는 법 기억이나 하겠냐?" 였다.(…) 스탈린이 비행기를 기피한 것 자체는 사실이다. 이는 소련의 항공기용 엔진 신뢰성이 낮아 사고율이 높았기 때문. 의외로 당대의 많은 국가원수 및 군 수뇌가 그 문제 때문에 비행기를 기피했고, 추락사고로 죽기도 했다. 1945년엔 비행기로 이동하기 싫은 탓에 얄타 회담시엔 건강이 나쁜 루즈벨트를 억지로 데려와서 루즈벨트가 건강이 더 악화돼서 죽게 만드는 데 영향을 주기도 한다.
앞서도 언급이 되었지만 주로 밤에 일하고 새벽이 되어서야 잠에 드는 그의 수면리듬에 맞추느라 그의 측근이나 주요정부기관까지 새벽근무를 해야했다. 그리고 라이벌이었던 히틀러가 행정업무를 싫어했던 것과 달리 스탈린은 지독한 일벌레로 모든 일을 꼼꼼하게 직접 처리하는 스타일이어서 부하들은 그야말로 죽어났다. 2차대전 때는 철도 운행 스케줄에 과부하가 걸려서 병력이나 물자를 수송하던 열차의 행방이 묘연해진 때가 종종 있었는데 이를 보고하던 한 장군에게 "별을 달고서도 못 찾겠다면 전선에 졸병으로 나가 찾게 해주겠다." 고 갈구기도 했다. ~~문제는 저 갈굼이 말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거~~
트로츠키를 평생 싫어하고 두려워해 그의 업적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위조했다. 호찌민의 당당함을 질투해서 소련에 초대되었을 때 KGB에게 그의 소지품을 훔쳐내게 하여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즐겼고, 마오쩌둥을 기름진 똘마니 정도로 보고 혐오하여 '마가린 공산주의자'라고 험담했으며, 김일성을 의외로 마음에 들어했다는 일화가 있다.~~자기보다 나은 사람은 싫고, 자기만한 병신도 싫고, 다만 자기보다 못한 병신만 OK~~ 중국 건국 60주년 영화 건국대업에선 저 마가린 운운하는 내용을 조금 비틀어서 스탈린이 미국을 마가린같은 자본주의자라고 욕하는 장면으로 바껴서 나온다. ~~공산당 찬양 영화에서 모주석 욕할리가...~~
사담 후세인은 스탈린을 존경하여 그를 벤치마킹 했다는 흠좀무한 사실이 있다. 한편 고향 취급인 조지아에서는 나름대로 존경과 사랑을 받는 위인이다.(…)
사실 아무리 악명 높은 권력자라 해도 정작 고향에선 그 인물에 대한 지지도가 의외로 높은 경우는 꽤 많다. 후세인도 그렇고, 한국도 예외는 아니지 않는가? 하지만 고향을 여러번 털어먹은 전적이 있기 때문에 평판은 반반이라고 한다. 특히 조지아어를 아예 없애려고 했으니... 죽은 뒤에 기밀해제된 문서들이나, 자료들에 의하면 나름대로 좋은 면도 있지 않았나 싶지만 해놓은 짓이 위낙 악당이라 변명의 여지가 없다.
위의 행각 때문에 좀 그렇긴 하지만 훌륭해 보이는 일화도 있는데, 존경하는 모든 노동자와 농민의 지도자에게 자신이 기르던 암소를 선물하려던 페클라 코르슈노바라는 한 70세 노인이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에 그는 직접 답장을 써 줬는데, 전문은 다음과 같다.
>"어머니, 다정한 편지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저는 농장이 없어 소가 필요 없습니다. 저는 완전히 국가에 고용된 사람이라 최선을 다해 국민에게 봉사하지만, 고용된 사람은 농장이 없답니다. 어머니, 제 생각에는 제게 소를 선물하지 말고 계속 기르면서 저를 기억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스탈린-"
또다른 훌륭해 보이는(?) 일화가 있다. 소련군의 총참모장이었던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의 아버지는 [동방정교회|러시아 정교회] 신부였는데, 당시 신부는 인민의 적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바실렙스키는 출세에 지장이 있을까봐 아버지와 의절하고 지냈다. 아무리 스탈린이 군사 지도부에 대해 의심을 풀고 신뢰하게 되었다 해도 대숙청을 생각해보면 그 피튀기는 시대가 얼마나 지났다고 인민의 적과 공공연히 만나겠는가? 아니 생각해보면 아직 숙청은 끝나지 않았다. 인민의 적과 가족이란 점은 출세가 문제가 아니고 그 이전에 목숨이 위험했다. 한 번은 스탈린이 같이 식사를 하다가 바실렙스키에게 그의 아버지의 안부를 물었다. "동무의 아버님은 잘 계시나?" 그러자 바실렙스키는 "저의 아버지는 신부로서 인민의 적입니다. 저는 공산당원으로서 아무리 아버지라 하더라도 인민의 적과는 상종을 안 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스탈린은 바실렙스키를 꾸짖으며 "아무리 그래도 자네는 자네 아버지의 아들 아닌가. 아들이 그러면 되나." 하고 아버지와 화해할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누구 명령이라고 거역하겠는가... ~~하지만 그때 일반 시민들은 늙은 부모에게 배급 식량을 나눠주면 정치위원들에게 감상주의라고 비판받곤 했다.~~
현대 러시아와 주변국들을 들썩이게 하는 러시아 내 공화국들의 독립투쟁이나 다른 나라에 거주하는 러시아인들 문제는 사실 이 사람이 러시아 내 소수민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펼친 이주정책의 공이 크다. 여러 의미로 러시아는 스탈린이 남긴 유산들을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셈이다. 소련 초기 민족인민위원 시절에는 캅카스 출신 독립운동가들이 볼셰비키에 의해 떼몰살을 당하는 와중에 개인적으로 간섭해서 자기 지인을 빼내주기도 했었다.
그런데 1945년과 1948년 노벨평화상 후보가 된 적이 있었다. 한 국가의 의회의 의원이면 누구나 추천할 수 있었기에 그런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외에도 히틀러, 무솔리니 등 온갖 사람이 후보에 오른적이 있다.(당연히 상을 받을 일은 없다.)
사후에 레닌과 마찬가지로 방부처리 되어 붉은 광장의 레닌 묘에 합장되었으나, 후에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이후 크렘린에서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석방된 사람이 "꿈에 레닌이 찾아왔는데 스탈린 보고 방 빼랍니다." 라고 크레믈린에서 연설을 하자 스탈린을 빼는 것이 심각하게 고려되었다. 결국 시신은 화장되어 크레믈린 벽 묘지에 안장. 모욕하기 위함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방부처리를 중단한 후, 바로 화장하지 않고 뜸들이다가 시체가 많이 부패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벽 묘지도 국가에 기여한 인물들에만 수여되는 상당한 영예인데, 아무리 스탈린을 디스하던 흐루쇼프도 스탈린의 업적은 부정할 수가 없었나보다. 아직도 붉은 광장 한켠에는 이 벽 묘지와 스탈린의 흉상이 남아 있다.
https://markhumphrys.com/Bitmaps/stalin.grave.jpg?width=500 굽시니스트의 만화에서는 "그의 고향 조지아에만 동상이 하나 남아 있다."고 했고, 이렇게 유일하게 남아있던 고리 시청 앞에 있던 스탈린 동상은 2010년 6월 철거되었다.[* 이와 함께 조지아의 스탈린 기념관도 반독재 기념관으로 바꾼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굽시니스트는 DC내의 [2차세계대전 갤러리]의 잘못된 설을 인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위에서 말했듯이 모스크바 크레믈린 벽묘지에 아직 스탈린의 상이 하나 남아있다.(크레믈린 앞의 상은 동상이 아니라 석상이니 그렇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 현재도 스탈린의 벽 묘지 앞에는 소련 시절을 그리워하는 참배객들이 매일 찾아와서 꽃을 놓고 간다고 한다.
히틀러만큼은 아니지만 스탈린도 반유대주의자였다. 이는 그의 정적이었던 트로츠키[* 원래 성이 브론슈테인으로, 전형적인 유대인 성이다.]를 비롯한 고참 볼셰비키들이 유대인이었다는걸 근거로 드는데 초기 혁명 직후에 러시아 내 유대인 인구에 비해 공산당원수나 고위급 중에 유대인이 많았던 건 사실이지만 그후 적백내전 때부터 새로 당원들이 유입되면서 유대인 출신은 인구수 법칙상 점차 줄어드는 추세였다. 소련에서 유대인 박대는 서유럽처럼 종교적이나 히틀러처럼 인종적인 면이 아닌 스탈린의 소수민족에 대한 편견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은 국제적으로 선민사상이 쩔었고(…) 국제적으로 전통과 민족문화를 중시하는 것도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당이나 국가보다 이스라엘에 더 충성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캅카스인(고향 조지아 포함), 폴란드인, 중앙아시아인 등을 모두 공평(?)하게 박대했다. 유대인이라고 더 박대한건 아니다.--특별히 박대했으면 씨를 말렸지-- 박해만 한 것도 아니어서 막심 리트비노프처럼 유대인이라도 능력이 있으면 등용했고 시베리아에 유대인 자치공화국을 만들고 소련의 유대인을 이곳으로 이주시키려고도 했다. 지금도 남아 있는 '유대인 자치주'는 이 때의 유산이지만, 이 지역에 이주한 유대인은 극소수였다. 이 밖에도 이스라엘에 무기를 판 체코 공산주의자들을 반역죄로 처형한 것,[* 초창기 이스라엘의 무기들은 체코제가 많았다.] 스탈린의 마지막 숙청이 될 뻔했던 "유대인 의사 음모 사건"도 반유대주의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로 남아 있다. 스탈린 사후에 아이러니하게 스탈린의 심복이었던 베리야가 "이 사건은 조작된 것"이라고 하면서 이들을 모두 석방하였다. ~~그리고 베리야가 흐루쇼프에게 숙청당하지~~
6.25 전쟁은 스탈린이 지시한 것이라고 추정되어 왔지만, 흐루쇼프 회고록이나 소련 붕괴 후에 문서 상 밝혀진 바로는 스탈린은 이에 대해 매우 소극적이었고, 김일성이 계속 주장해대서 마지못해 승낙했다고 한다. 후에 북한이 패망 직전에도 스탈린은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소련군이 직접 개입하지는 않으려 했지만 북한과 중국의 공군력이 너무나 형편없어서 마지못해 소련 공군의 참전은 허락했는데, 이것이 들통나지 않도록 미그앨리라고 부르는 북한의 북부 상공에서만 비행하도록 했고, 교신에 러시아어를 쓰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받을 정도였다. ~~No Russian~~ 스탈린은 미국과 대결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의외로 북에 대한 지원은 매우 소극적이었다.
말년에는 뇌에 심각한 타격을 입고 정신병적 행태를 보이기도 하였다. 흐루쇼프의 회고에 따르면 개의 울음소리를 녹음한 레코드를 틀어놓고서는 정치국(폴리트뷰로)의 일원들을 춤추게 하였는데, 흐루쇼프, 말렌코프, 불가닌, 몰로토프, 주코프 같은 자들이 구두를 벗고 개 울음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는 장면은 장관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흐루쇼프는 춤을 아주 못 추어서 웃음 거리가 되었지만, 몰로토프는 상당한 춤꾼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춤판에 딸 스베틀라나를 데려와 실신할 때까지 춤을 추게 했다는 말도 있다. 이는 냉전시대의 선전이 아니라 드미트리 볼코고노프[* 1928-1995. 정치장교이자 구소련 심리전부서의 책임자였으며 장성까지 승진했던 인물로, 후일에는 역사가로서 맹활약하였다. 만나본 사람의 평가에 의하면 꽤나 공산주의 사회의 고위층답지 않게 자유롭고 유연한 사상을 가졌다고 하며 나중엔 스스로도 공산주의를 비판하기도 했을 정도이다. 근데 이사람은 아버지가 대숙청 때 숙청되었기 때문에 원래 공산주의를 좋게 볼 수 없는 사람이다. 소련은 의외로 연좌제가 느슨했던 듯.]책에 실린 내용이다. 높으신 어른들이 이런다는 게 웃기긴 하지만 남녀노소 술퍼먹고 미친듯이 춤추는 건 러시아의 고유의 미풍양속(?)이긴 하다.
볼코고노프의 책에 실린 또다른 회고들에 따르면 스탈린은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친지, 심복들과 같이 코미디 영화를 보러 가서는 웃으면서 같이 보면서 웃던 사람들의 유배문서에(...) 서명하곤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국 회의 도중에 갑자기 한명을 지목하여 '당신은 스탈린 동무에게 무엇을 숨기고 있나?' 등의 얼토당토 않는 질문을 던지는데,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의 목숨은 경각에 달리게 된다는 것이다. ~~관심법이라도 배웠나?~~[* 레드얼럿 1편의 소비에트 미션9 오프닝 컷신에서 이게 패러디되었다. 그라덴코 장군과 함께 보드카를 들이키며 화기애애하게 유배문서에 서명했지만 다음미션에서 쿠코프와 정부인 나디아에게 독살당했다.]
하지만 저 내용이 신뢰성이 높은 편은 아니다. 실제로 볼코고노프의 책은 좀 과장되었다는 이야기가 많다. 역사학계에서도 이 사람은 인용하지 않거나, 인용하는 경우에도 매우 비판적으로 인용한다. 이 사람은 원래 소련군 장성 출신으로, 역사학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지만 소련이 흔들리자 가장 먼저 사상전향하고 소련과 공산당을 디스하는 책을 많이 펴냈다. 이런 책들이 옐친에 이로움을 줬음은 물론이다. 한국 뉴라이트들의 역사관을 생각해보면 이 사람의 역사관이 대충 그림이 나온다. (태생적으로 반공적인) 영미학계에서는 이사람 소스를 인용하여 스탈린 체제나 동유럽 체제를 비판하는 경우도 많지만, 이사람은 원래 옐친 정권에서 대통령 보좌관을 했던 사람으로, 특히 옐친 정권 하에서 정권의 입맞에 맞는 역사서를 펴내서 러시아에서도 많은 비판을 받았던 사람이다.
참고로 전쟁에서 딱히 도움이 안 되었던 이 사람은 전쟁에서 공적을 인정 받아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두번 받았다. 굳이 따지자면 이 사람의 공업화 정책 덕분에 기갑웨이브를 선보일 수 있었다는 것?~~그럼 제법 크구만.~~ [* 독소전쟁 초반의 병크대문에 매우 비판을 받지만, 일반적으로 그때만을 제외하면 스탈린의 전쟁수행 지도는 모범적이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는 서구에서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리처드 오버리著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군사적인 면은 전문가들이라고 할 수 있는 군인들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민간부분에서 독재권력을 이용하여 모든 국력을 전쟁에 효율적으로 투사하도록 지도했는데, 군사작전에 개입하여 말아먹거나 혹은 행정을 팽개친채 괴링이나 히믈러등의 중간보스들을의 전횡을 방치하여 국력을 낭비한 히틀러와 비교하면 스탈린의 성과는 분명하다. ] --앗! 시리즈에 의하면 입술을 움직이면 거짓말을 한다 카더라-- --콧수염때문에 입술이 안보인다--
평가
현재 러시아의 평가
스탈린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입장은 크게 '조국을 부강하게 만든 위대한 지도자'와 '수많은 인민을 숙청한 잔혹한 독재자'로 나뉘어진다. 전반적으로는 국가적인 관점에서 스탈린이 남긴 업적에 초점을 맞춘 긍정적인 평가가 우세하다.[* [<왜 러시아는 여전히 스탈린을 사랑하는가(Why Russia Still Loves Stalin)>]]
~~쉽게 생각해서 현 대통령직 지내시는 분의 아버지 정도?~~ ~~틀린말은 아니네~~
긍정적 입장과 평가
러시아 국영 TV채널과 러시아 역사연구소가 진행한 '위대한 러시아인'을 선발하는 프로젝트에서 스탈린은 조지아인임에도 불구하고 전체 3위에 올랐으며, 특히 소련 성립 이후의 모든 정치가들 가운데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스탈린, 러시아인들의 영원한 우상>]. 심지어 러시아 공산당은 스탈린이 1등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조작 의혹을 제기했다!] 또한 2006년 말의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47% 가량이 스탈린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반면 부정적인 답변은 29%에 불과했다.[* [<핵심 질문: 왜 스탈린은 잔혹한 통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러시아에서 추앙받는가?(The Big Question: Why is Stalin still popular in Russia, despite the brutality of his regime?)>] ] 2007년에 러시아의 10대 청소년 약 1,800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다른 투표에서도 절반 이상이 스탈린의 긍정적인 면을 우위로 평가했으며, 46%는 스탈린이 '잔혹한 독재자'라는 견해를 부정했다.[* [<러시아 청년들: 스탈린에는 긍정적, 이민자들은 나가야: 설문조사(Russian youth: Stalin good, migrants must go: poll)>] ]
현 러시아 대통령인 블라디미르 푸틴의 경우, 구 소련의 지도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평가는 꺼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의 시대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는 견해를 종종 표명하곤 했다. 일례로 푸틴은 1937년의 대숙청을 '공포의 역사'라고 표현하면서도 "타국이 우리들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을 용인하지 않겠다." 는 입장을 견지했으며, 소련과의 단절을 선언한 일부 러시아 정치가들을 비판하며 연속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푸틴 집권기 러시아 교과서는 스탈린의 대숙청이 급격한 현대화 과정에서 봉착한 난제들을 해결할 능력을 가진 새로운 계층의 부상을 유도했으며, 뛰어난 추진력과 지도부에 충성하는 유능한 인재들을 선발하기 위한 필요악이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핵심 질문: 왜 스탈린은 잔혹한 통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러시아에서 추앙받는가?(The Big Question: Why is Stalin still popular in Russia, despite the brutality of his regime?)>]]
이러한 인식은 주로 소련 붕괴 이후의 사회, 경제적 혼란과 강력한 리더십의 부재에 기인한다고 평가된다. 자본주의가 기대만큼 러시아인들을 부유하게 만들어주지 못했고 민주주의도 형식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으며, 소련 말기의 노멘클라투라들이 여전히 부를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반인들에게 이오시프 스탈린의 이름은 피와 편집증, 잔혹함보다는 승리와 영광, 무사무욕, 민족의 존재이유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또한 러시아 청년들에게 스탈린은 대조국전쟁에서 나치 독일을 상대로 승리를 일구어낸 강력한 지도자이자, 미국과 함께 전세계를 양분하던 시절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상징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스탈린시대 러시아는 존중 받았다>]]
부정적 입장과 평가
한편, 소련의 마지막 서기장이자 개혁을 주도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나, 러시아 연방의 초대 대통령 옐친은 --그 옛날 흐루쇼프처럼-- 스탈린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았다.
러시아의 전임 대통령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는, 2009년 크렘린의 공식 비디오 블로그에서 스탈린을 "재평가"하자는 모든 움직임들을 비판하며, 스탈린의 대숙청은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일침을 가했다.[* [<메드베데프가 스탈린의 옹호자들을 비난하다(Medvedev blasts Stalin defenders)>]] 뿐만 아니라 메드베데프는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에 소련을 "암울했던 시기"로 묘사하며, 강한 국가보다는 경제적 자유와 생활수준의 향상을 강조하기도 했었다.[* 다만, 메드베데프는 당선 직후 푸틴에게 통수권을 넘겨받으면서 72년간 지속되어온 전통을 기념한다는 내용의 축사를 남겼는데, 이는 스탈린의 대숙청이 한창이던 1936년을 기점으로 한다는 점에서 정통성을 인정했다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나치 독일 시절부터 통수권 위임식이 시작된 독일에서 만일 총리가 비슷한 전통의 기념 운운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생각하면...][* [<핵심 질문: 왜 스탈린은 잔혹한 통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러시아에서 추앙받는가?(The Big Question: Why is Stalin still popular in Russia, despite the brutality of his regime?)>]]
이외에도 대다수의 자유주의 정치가들이나 인권운동가들 역시 스탈린에 부정적이다. 대숙청 기간 동안 스탈린이 저지른 엄청난 학살은 당대에도 지속적으로 서구사회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미 흐루쇼프 집권기에 소련 내부로부터도 자성의 목소리가 일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각은 현대의 일부 인권운동가들에게도 이어져서,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인명경시풍조 및 정치적 부패와 결부되어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다.
2009년, 스탈린의 손자 예브게니 주가슈빌리는 대숙청을 두고 스탈린을 "피에 굶주린 학살자"로 묘사한 노바야 가제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스탈린 장남의 아들로 스탈린에게 매우 귀여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렇게 했던 것. 만약 장남 야코프가 살아있었다면 야코프는 함께 아버지를 디스했을 것이다.] 패소하였다. 노바야 가제타는 스탈린의 손자로부터 피소됐다는 사실을 공표한 뒤 사설을 통해 "진실은 가끔 위험한 것"이라며 "무시한다고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범죄를 숨기는 것은 공범이다. 스탈린은 2차대전 초기 히틀러가 저지른 범죄의 공범자였다." 고 지적했다.[* [<스탈린 손자, 조부 명예훼손 소송 패소>]]
구 소련 가맹국들의 평가
독립국가연합(CIS) 소속의 국가들은 대체로 스탈린의 강제적인 인종말살 정책이나 대학살에 대해서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나, 나치 독일에 맞서 소련을 지켜낸 것만큼은 높이 평가한다.[* 독소전쟁 초기 동유럽 국가들은 나치 독일을 해방자로 여겼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건 이유 불문의 잔혹한 학살뿐이었다.]
특히 우크라이나에서는 우크라이나 대기근 덕분에 아직까지도 증오하는 사람이 많다. 설문조사에서도 스탈린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 우세하며, 2010년에는 우크라이나 법원이 대기근과 대량 학살의 책임을 물어 스탈린을 기소한 적도 있었다.[* [<우크라이나 법원, 대기근 제노사이드에 대해 볼셰비키의 죄를 묻다(Ukraine court finds Bolsheviks guilty of Holodomor genocide)>]] 뿐만 아니라 2010년 봄에 스탈린 기념 동상이 건립되자, 당해 12월 말에 머리가 잘리더니 급기야는 폭발로 파괴되었다고 하니... 민족감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우크라이나, 스탈린에 비판적인 입장 고수(Ukraine stands by its view of Stalin as villain)>]] 아르메니아의 한 설문조사에서는, 응답자의 38%가 '스탈린과 같은 리더가 필요하다'고 답한 반면, 72% 가량은 '스탈린과 같은 지도자가 이끄는 국가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고 답했다.[* [<스탈린을 사랑하는 민주주의자들(Democrats who love stalin)>]]--둘 다 찬성한 10%는 뭐지?-- --조국을 떠나고 싶은 사람들--
단 스탈린의 출생지인 조지아에서는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조지아의 역사 교과서는 스탈린을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즘을 종식시키고 소련을 초강대국으로 만든 인물'로 기술하고 있다.[* [<스탈린 닮아서 행복한 사나이>]] 스탈린 동상이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곳도 조지아였고….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에서도 조지아에 진주한 러시아군은 많은 전리품을 챙겼으나, 스탈린 기념관과 동상은 전혀 손대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포로로 잡힌 조지아군 병사가 자신의 스탈린 문신(!)을 보여주자 러시아 병사는 그를 바로 석방했을 뿐만 아니라 보드카까지 줘 보냈다는 이야기가 있다. 현재 러시아와 조지아에서의 스탈린의 평가를 보여주는 일화이다.
성자 스탈린?
https://www.tatveteran.ru/www/img/777.jpg?width=400 무시무시하게도 정교회 성인들이나 그리는 이콘에 나오기도 했다. 이 그림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모스크바에 거주하던 성녀 마트로나(Матрона)와 비밀리에 만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사실상 도시전설이지만, 지독한 반그리스도교 정책으로 일관하던 스탈린이 갑자기 러시아 정교회와 파트너를 자처한데에는 그녀의 덕이 컸다고 한다. 마트로나는 맹인으로 당시 사람들의 미래를 예언하는 것으로 이미 잘 알려져 있었는데, 스탈린은 독일군이 모스크바 코 앞까지 진군했을때 몰래 그녀를 만났고, 마트로나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러시아군이 승리할 것이니 모스크바를 떠나지 말고 굳건히 지키라."는 조언을 했다 한다. 그리고 다른 도시전설에 의하면 스탈린이 꿈에서 "교회가 다시 열리면 러시아는 이긴다"는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정말로 많은 교회를 열었고, 신학교도 다시 열렸다.
어쨌든 독소전쟁 발발 이후 러시아 정교회는 어느정도 부활되었고[* 1940년까지 20여년동안 스탈린 동무가 죄다 죽인건 아니지만 4만명의 성직자중에 3만 6천명을 때려잡았다고 한다. --다 때려잡지 않았으니 성자는 성자인듯--], 심지어는 제2차 대전 승리 퍼레이드에 모스크바 총주교가 초청되기도 했다. 뭐 그 뒤인 흐루쇼프 시절 다시 정교회는 탄압당하긴 하는데….
그런데…
https://www.ljplus.ru/img4/s/o/sovetio/stalin_icon.jpg?width=400 https://www.rus.or.kr/upfiles/20101024_01.jpg --누구세요--
너무 무시무시하게도 스탈린만의 이콘이 있다!!! 이렇게 스탈린 러시아에는 스탈린을 성인으로 추대하려는 세력도 있다. 그 이유는 독소전쟁 이후 러시아 정교를 부활시켰기 때문에. 흠좀무.
뭐, 애시당초 스탈린부터 정교회 신학교 출신이긴 했으니... 그런데 그 신학교 출신에는 베리야도 있다. --신학교가 아니라 SIN학교--
한국과 북한에서의 평가
당연히 한국에서는 카를 마르크스, 김일성, 마오쩌둥, 블라디미르 레닌 등의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빨갱이들의 두목, 소련의 독재자라는 평가가 있었으며 특히 1950년 6.25 전쟁 때 소련이 북한에 밀접적으로 군사지원을 하였고 남침을 지지하는 입장을 보이면서 전쟁 이후에는 김일성, 마오쩌둥과 함께 6.25 전쟁의 원흉[* 물론 직접 개입한 적은 없지만 소련이 국가적으로 북한에 군사지원을 하였고 스탈린도 휴전 당시인 1953년에 죽었기 때문에 사실상 전쟁을 부른 원흉이나 다름없다. 오죽하면 김일성이 소련으로 날아가 스탈린에게 남침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였거나 남침에 성공해서 한반도 적화통일이 되면 소련에 공물을 바치겠다고 한 것이 괜히 있겠는가. 이 같은 내용은 스탈린의 후임으로 있었던 흐루쇼프 회고록에도 나와 있다.]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한국군의 주적론에 나오는 6.25 전쟁 주역 중에도 당연히 김일성, 마오쩌둥과 함께 포함되었다.
[조희연] 교수는 [박정희]의 체제를 개발동원체제 라 평했는데, [비스마르크]와 [스탈린]이 박정희와 같은 성격의 체제라고 평가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남침전쟁을 도와주었던 영웅으로 손꼽혔으며 김일성을 북한 주석자리에 앉히고 지금의 북한을 세우게 하였던 간접적 인물(...)로서 남한과는 달리 호의적이고 영웅적인 평가를 받고있다.
미디어믹스
https://www.pophistorydig.com/wp-content/uploads/2009/11/1932-rockefeller-stalin-250.jpg?width=400
록펠러 1세와 스탈린의 카툰.
attachment:thefallofberlin.jpg
충격과 공포의 개조 스탈린. 대원수께서 비행기를 타고 베를린에 강림하신다는 내용으로[* 스탈린은 전시 당시에도 전선시찰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비행기를 타고 내리는 건 흡사 나치 선전영화 의지의 승리 오프닝 장면 같다.] 우상화가 극에 달한 1949년에 만들어진 선전영화 <Падение Берлина(베를린 함락)>의 엔딩 장면. 게다가 달려나오는 ~~저글링~~사람들이 들고 있는 깃발은 소련의 깃발뿐만 아니라 영국, 미국, 프랑스,체코 등 온갖 국가들의 깃발이 보이며 유대인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그야말로 세계를 발아래 둔 대원수의 위엄이 잘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나?
1992년에 HBO에서 스탈린 전기 영화를 만든 적이 있었다. 로버트 듀발이 스탈린을 나와서 유배 시절부터 사망까지를 다룬 작품인데, 배우들과 실제 인물의 싱크로율이 꽤 높다. 역사영화이고 TV물이어서 극적인 장면은 부족하지만 스탈린의 일생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정도 볼만한 작품, 작중 화자인 스탈린의 딸을 줄리아 오몬드가 맡았고 레닌역을 철십자 훈장에서 찌질 독일장교를 연기했던 막시밀리언 셀이 맡았다. 한국에서는 비디오로 출시되었다.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에서도 현실과 비슷한 설정으로 나오며, 굉장히 똑 닮은 사람을 정말 스탈린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캐스팅 했다. 여기서 스탈린은 직접 무능한 부하의 목을 꺾는 터프한 일면도 보여준다.(…) 근데 소련군 엔딩이든 연합군 엔딩이든 둘 다 죽는다.
2009년 중반 스탈린이 군대를 이끌고 몸소 화성인과 대적하는 맛 간 게임이 출시되어 충격을 안겨주었다. 트레일러에서 나오는 서기장 동무의 화려한 꺾기춤은 그야말로 백미. 그런데 게임 자체는 게임스팟 평점 1.5/10에 빛나는(...) 쓰레기 게임이다.
이분 역시 모에화를 피할 수는 없었다. 예를 들자면 카텔린(대제국) 등.
그 외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꽤 정신나간 패러디도 많다.
계란계란 작가의 만화 오늘은 자체 휴강 44화에서는 송아람의 [스탠드(죠죠의 기묘한 모험)|스탠드]로 나와 호랑이 신령을 일격에 숙청해 버린다(...) 나름 대한민국에서 영험한 산으로 알려져 있는 계룡산에서 잔뼈가 굵은 신령들이 [땀|식은땀]을 흘리게 할 정도인 것을 보면 강철의 대원쑤 파워는 어디에 가지는 않은 모양.[* 사실 [무당|무속(무교(巫敎))]에선 '죽은 사람 중에서 아주 유명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신으로 삼아 숭배나 이용(...)의 대상으로 삼는데, 인지도나 파괴력을 봤을 때엔 스탈린 역시 신으로 섬겨질 여지가 있다.][* 다만 문제는 송아람이 [어떤 마술의 금서목록|과학 사이드]에 서서 스탈린을 스탠드로 소환, 신령을 박살낸 것인데 신령이라는 초과학현상을 부정하는 주제에 그에 버금가는 초과학현상인 스탠드를 부려대며(스탈린 뿐만 아니라 찰스 로버트 다윈도 스탠드로 등장한다.) '과학도로써 유물론에 역행하는 것들은 묻어버리겠다.'는 모순이 개그포인트. 또 이 장면을 곱씹으면 우스운게 스탈린은 일국 사회주의를 주장했다는 정도만 제외하면, 그 학문적 맥락이 블라디미르 레닌, 카를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와 사실상 상통한다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바닥에 깔린 사조가 앞의 송아람의 대사에서 언급된 유물론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무속, 사회사상, 과학론 등을 절묘하게 연관시켜 만든 개그포인트라 할 수 있다. ~~작가는 그냥 숙청에서 스탈린을 따온 것 같기도 하지만.~~]
러시아에서 공산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대체역사물에서는 그루지야의 공산주의 지도자로 자주 나온다. --덤으로 베리야도 스탈린의 딸랑이로 등장-- 다만, 카이저라이히:대전의 유산라는 게임에서는 베리야의 부하로 나온다. 베리야는 그루지야의 수령(?)으로, 스탈린은 치안장관으로. 흠좀무? --하지만 베리야는 조만간 숙청되고 스탈린이 결국 권력을 잡겠지-- 물론 스탈린이라는 이름도 없다..
Wind Blow라는 게임에서는 점점 커져가는 베리야를 이용하려다가 도리어 독살당해 사망한다. --왜 일케 베리야에게 엿먹는 이야기가 많냐?--
겁스 무한세계와 겁스 테크노멘서의 멀린-1 세계에서는 마법으로 부활하여 벨라루스의 공산 군벌을 이끌고 있다. 소련은 이미 무너져서 러시아 공화국이 성립된 상태. 하지만 그렇게 주목받거나 하지는 않고 그냥 듣보잡 취급.
해리 터틀도브의 대체역사소설 타임라인-191 시리즈에서는 등장인물들 간의 대사를 통해 공산혁명에 실패한 러시아 제국에서 사망한 것으로 암시된다.
동일 작가의 단편 <Steele>에서는 그루지야인 탄압에 못 이긴 스탈린의 부모가 미국행 여객선을 타게 되고, 스탈린은 'Joe Steele'이 되어 충실한 미국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문제는 대공황을 전후로 해서 민주당에 입당해서 배후에서 음모를 꾸며 루즈벨트를 불태워 죽이고서 미국 대통령이 되어서[* 그것도 6번이나 해먹는다. 참고로 1944년부터는 아예 자기 혼자만 대통령 후보에 출마해서 당선되는 기염까지도 토한다.][* 이때의 소련 서기장은 레프 트로츠키, 심지어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여기서는 트로츠키그라드 전투로 나온다.] 경제개발 4개년 계획[* 연방대법원에서 관련 법안 몇 개를 위헌이라고 하자 에드거 후버를 시켜 판사나 정치인 몇몇을 나치 독일 스파이로 몰아 숙청하고, 알래스카에 굴라그를 설치해서 사회주의자나 반대파 인사들을 나무 거름으로 만들어 버린다.]으로 미국을 부강하게 만드는 독재자로 탈바꿈하고 --아니 대체 미국이 거기서 더 부강해지면 어떡하냐?--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지도자가[* 올림픽 작전을 실제로 시행한다. 다만 핵은 Steele의 독재에 회의를 느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편지를 보내지 않아서 유럽전선 종전 후 개발된다. 그리고 그 사실이 나중에 발각되자 아인슈타인을 포함해서 애꿎은 유대인 과학자 여럿만 골로 보낸다.] 되고 냉전의 한 주축이 된다는 이야기. 일본은 분단되고 북일본과 남일본의 전쟁 때는 당연히 초반부터 일본에 핵을 날린다. 6번째로 취임해서 1년이 채 못 되어 죽는데, 그가 죽고 난 뒤에 권력투쟁이 일어났다가 결국에는 에드거 후버가 대통령이 되어서 전임자 못지않은 폭정을 저지른다.
로버트 해리스의 <아크엔젤>은 사실은 스탈린에게 또 다른 아들이 있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스탈린이 죽기 전에 베리야가 그 비밀을 훔치고, 역사의 비밀이 될 뻔했는데 스탈린의 사생아를 떠나서 그가 스탈린과 똑같이 생겼고 어려서부터 철저한 스탈린주의자로 키워졌으며[* 배우는 건 하나같이 스탈린의 철학과 연설문, 저서뿐이다.] 소련 붕괴로 듣보잡 괴물로 전락할 뻔한 것을 러시아의 어떤 재벌이 인수해서 꼭두각시 독재 체제의 괴뢰로 세우려는 음모를 그리고 있다. 90년대말 현시창인 러시아를 리얼하게 그리고 있으며 그러한 현실체제에서 스탈린과 같은 독재자를 바라는 러시아인들을 꼬집는 작품. ~~당시에는 비난을 꽤 받았지만 푸틴이 집권한 현실에는 뭐.~~ 참고로 열린 결말.
스탈린의 편지에서는 미국에 데꿀멍해서 중국 공산당과 북한을 포기하고[* 그 대신 서독을 공산권으로 넘겨받았다.], 의사와 짜고 사망한 척 페이크를 써서 베리야를 비롯한 부하들을 숙청한다. 그리고 노벨평화상을 받고, 현대 러시아인에게 러시아 역사상 최악의 인물로 평가받게 된다.
어새신 크리드 시리즈에서는 성당기사단의 일원이라고 나온다. 제 2차 세계대전의 주역인 윈스턴 처칠, 아돌프 히틀러, 프랭클린 D. 루스벨트도 다 성당기사단 소속이란 점에서 보면 정말 흠좀무. 결국 암살단에 의해 독살 당했다고 한다.
[DUST]에선 스탈린그라드를 함락당했지만 오히려 하르코프와 쿠르스크에서 독일군을 박살내버렸다. 하지만 영미연합군이 독일군의 VK기술[* 이 VK 기술을 연구하던 혈십자 군단이 히틀러와 나치당을 제거하고 나치즘이 덜했던 장성들로 독일을 이끌게 하였다,]에 데꿀멍해서 휴전 협정을 맺자 피가 거꾸로 솟은 스탈린은 영미연합군과 동맹을 끊고 중국의 마오쩌둥과 합심하여 중국과 소련을 합쳐서 중소 연방(Sino-Soviet Union)을 만든다.--강철의 대원수와 갓 핑거의 만남-- 그러면서 자신들을 배신한 영미연합군을 박살내기 위해서 알래스카를 침공하면서 남미의 공산혁명을 지시해서 미국대륙을 압박한다.
스탈린주의
스탈린은 그 특유의 독재정치로 인해 '스탈린주의'라는 독자적인 사상을 낳았고, 이는 오랫동안 전 세계 공산주의자들에게 현실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보급되었다.
어록
다만 여기에 기록한 말 가운데 정말로 스탈린이 했는지 의심스러운 말이 많다. 스탈린은 러시아어에 서툴렀고, 유창한 언변을 구사하는 스타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쓴 글은 대부분 그가 신학교에서 배운 교리문답식의 자문자답 형식의 문장이 많다.(예를 들어, "자본가들을 왜 타도하여야 하는가? 그것은 자본가들이 노동자를 착취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직설적인 어법을 구사했기 때문에[* 사실 기독교 교리문답식의 자문자답 문장은 스탈린 뿐 아니라 19세기 중반 이후의 혁명가들이 굉장히 선호한 문장 구조다. 따라 읽기도 좋고, 외우기도 좋고, 자신들이 주장하는 바를 강조하게 되는 문장 구조이며, 독자로 상정한 대중에게 익숙한 문장 구조이기 때문. 사실, 공산당 선언도 마르크스가 싹 정리해서 새로 쓰기 전의 초안은 '공산주의자의 교리문답' 형태로 쓰여졌었다.("당신은 무슨 주의자입니까? 저는 공산주의자입니다", "공산주의자는 무엇에 반대합니까? 공산주의자는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에 반대합니다.)][* 스탈린이 정권을 잡은 이유 중 하나가 트로츠키처럼 말 많은 혁명가들을 혐오하는 러시아 인민들의 성향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가끔은 다른 작가들의 말(아래에도 있는 레마르크)이나, 창작물 속에 등장하는 스탈린의 말이 스탈린이 한 말로 둔갑한 경우가 많다. 단, 복잡한 내용을 쉽고 간결하게 풀어쓰는 능력은 뛰어났다고 한다. 중요한 외교전문은 초안을 직접 작성하기도 했다.
>"나는 독재자가 아닙니다. 당의 결정을 따르는 일꾼일 뿐이죠."--[애니메이션은 좋아하지만 오타쿠는 아니라구요|독재정치는 좋아하지만 독재자는 아니라구요!]-- - 1931년 영국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현대군은 공격부대다. 붉은 군대는 현대군이다!"[* 이어야한다가 아니다.]
>"히틀러라는 친구 굉장해! 정적은 바로 그렇게 다뤄야 해!! > - 1934년 SA 숙청(장검의 밤) 소식을 듣고-[* 리처드 오버리 <독재자들>]
>"지도자들은 왔다가 사라집니다.--나만 빼고-- 하지만 인민들은 남습니다. 오직 인민만이 영원합니다. > - 1937년 대숙청 와중에서 연설- >"현명한 자는 보는 걸 믿고 겁쟁이는 믿는 걸 본다."
>"[그런 거 없다|정직한 외교관은 나무로 만든 철이나 마른 물과 같다]."[* Speech "The Elections in St. Petersburg" (January 1913)]
>"어떤 나라의 외무장관이 평화 협정에서 목숨을 걸고서라도 세계 평화를 지키겠다고 말한다면, 그 시간에 본국에서는 최신 군함과 전투기들을 만들고 있다고 보면 된다."[* Speech "The Elections in St. Petersburg" (January 1913)]
>"감사하는 마음은 개나 앓는 질병이다.--스탈린은 개만도 못하다는 걸 알 수 있다--"[* The Memoirs of former Stalin's secretary (1992) by Boris Bazhanov]
>"우리의 적들이 스스로 무장을 해제한다면,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직접 해버리면 된다."[* The Political Report of the Central Committee, The Fif*****th Congress of the C.P.S.U.(B.) (7 December 1927)]
>"교황이라! 그런데 교황은 몇 개 사단이나 갖고 있답니까?"[* 1935년에 프랑스 외무장관 라발이 모스크바를 방문해서 스탈린과 회담하다가 소련에서 종교 탄압이 줄면 저희가 교황과 일하는 데 도움이 될거 같다고 하자 스탈린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1차출처 https://sonnet.egloos.com/4443362 2차출처 Churchill, Sir Winston. The Gathering Storm : The Second World War Vol.1. Houghton Mifflin, 1948(Houghton Mifflin Harcourt, 1986). p.121]
>"내가 죽고 나면 사람들은 내 무덤에 쓰레기를 집어던지겠지만, 결국 역사의 바람이 그 쓰레기들을 전부 쓸어낼 것이다."[* 1943년, 몰로토프와의 대화에서. 출처: Felix Chuev's 140 Conversations with Molotov Moscow, 1991.]
>"표를 던지는 사람은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다. 표를 세는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Said in 1923, as quoted in The Memoirs of Stalin's Former Secretary (1992) by Boris Bazhanov]
>"인류 역사상 무적의 군대란 존재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1941년 7월 3일, 라디오 연설에서.]
>"붉은 군대에서는 전진할 때보다 후퇴할 때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당시의 미국 대사 Averell Harriman과의 대화 중. 출처: Truth about the Great Patriotic war by B. Sokolov (in Russian)]
>"교육은 누구의 손아귀에 쥐어졌는지,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지에 따라 효과가 결정되는 무기이다."[* 1937년 9월, 허버트 조지 웰스와의 인터뷰.]
>"신이 당신의 편이라고? 그가 보수당원인가? 악마는 나의 편이지. 그는 훌륭한 공산주의자야."[* 1943년 11월, 테헤란 회담에서 윈스턴 처칠에게. 출처 - Fallen Eagle: The Last Days of the Third Reich (1995) by Robin Cross, p. 21]
>~~"한 명의 죽음은 비극이다. 하지만 백만 명의 죽음은 통계수치에 불과하다."~~[* 이말은 원래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저술한 레마르크의 말이다. 스탈린이 처음 한 말은 아닌데, 스탈린도 테헤란 회담 때 1번 했다는 이야기는 있다. 채플린의 살인광 시대에도 비슷한 말이 나온다. ― "한명을 죽이면 살인자다. 백만명을 죽이면 영웅이된다. 전인류를 몰살하면 신이 된다.]
>"열린 마음은 문지기 없는 요새와 같다."
>"인간에겐 막역한 사이란 없다. 막연한 사이만 있을 뿐이다."
>"악인의 무관심은 선행이 되지만 선인의 무관심은 악행이 된다." --고로 악인을 하자?--
>--"모조리 죽여라. 죽음은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 Anatoly Rybakov의 소설 *****ren of the Arbat (1987)에서 나오는 말이다.]
>"[답이 없다|답이 없는 문제]도 있기 마련이다."
>"공포는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
>"결국 죽음이란 나쁜 것을 잃는 거다."
>"공포 앞에 논쟁이란 없다."
>"상황이 사람을 만드는 게 아니라 상황은 단지 사람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를 보여줄 뿐이다. 지금 우리의 혁명은 적들에 의해 죽어가고 있다. 적에게 죽느니 차라리 우리가 흘린 피에 익사하는 길을 택하겠다.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마라."
>"인민은 낙엽과 같다. 하나씩 밟을 때는 바스락거리지만 한데 긁어모아 불을 붙이면 매우 잘 탄다." --본격 인간 연료설, 혹은 떨어질 인민은 떨어진다. 뭔가 나무 뭉쳐서 꺾어보라는 일화도 생각나고….--
>"사단은 시장에서 파는게 아니라 지원 못해주겠다." >~~강철의 대원수도 시장에서 사단을 사오진 못했나 보다.~~ ~~[공산주의 유머|아니면 사단이 다 떨어졌거나, 사단을 만들 재료가 다 떨어졌거나.]~~
>"포병은 현대전의 신이다."